# 51화.
시즌 이후(1)
시즌 막판 와일드카드 한 장을 놓고 벌이는 승률 싸움에서 패배가 기록된 것이 뼈아팠다. 2012년의 개정된 와일드카드 방식이었다면 최근 폼으로 봤을 때 와일드 카드를 차지하는 것은 아마 우리 뉴욕 메츠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1998년이었고 와일드카드 결정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92승 70패. 0.567의 높은 승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와일드카드를 얻어내지 못했다.
팀의 와일드카드 획득은 무산됐지만, 나의 개인적인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은 채 달려든 보람이 있었다. 비록 기대하던 것처럼 15홈런에는 하나 부족했지만 98시즌 나는 14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도루는 기대했던 50개를 넘어 54개를 기록했고 이는 헨더슨과 토니 워막에 이어 내셔널리그에서 세 번째로 많은 도루이자 올 시즌 아메리칸리그 도루왕인 케니 로프튼과 동일한 기록이었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팀들은 남은 일정을 불태울 예정이었지만 9월 28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1998년 우리들의 시즌은 끝났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렸던 만큼 몸에 쌓인 피로는 막중했고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 그 피로가 우리를 덮쳐왔다.
“진호, 일단 좀 쉬긴 쉬는데, 완전히 퍼지는 건 곤란해. 넌 다른 선수들이랑 일정이 다르잖아.”
“그렇죠.”
“일단 오프 시즌 계획은 짜왔어. 물론 무조건 이 계획대로 가는 건 아니고, 중간중간 상황 봐서 조절하자고.”
가리비아가 하루 단위로 짜인 다섯 달짜리 빽빽한 계획표를 들이밀었다. 아무래도 나 같은 경우 다른 선수들과 달리 12월 초에 방콕아시안게임 일정이 있는 만큼 가리비아로서도 상당히 고심해서 짜낸 결과물일 터였다.
“일단은 10월 둘째 주까지는 휴식이네요.”
“아무래도 시즌 막판에 일정이 너무 혹독했으니, 충분한 휴식을 취해 줄 필요가 있어. 물론 아예 쉬는 건 아니고 기본적인 회복 운동은 꾸준히 해야 해.”
“그리고 10월 셋째 주부터 다시 몸을 만들고, 아시안 게임 이후로는 또 휴식이네요.”
“어, 그때는 정말 푹 쉬어도 괜찮아. 사람이 일년 내내 운동만 하고 살 수는 없지. 대신 먹는 것만 좀 신경 써서 듬뿍듬뿍 먹어주라고. 진호 너 같은 경우는 입도 짧고 체중도 정말 안 늘어나는 편이니깐 말이야.”
“O.K 알겠어요.”
물론 가리비아가 나에게 휴식을 권했다고 해서 나의 일정이 진짜 휴식으로 가득 차게 된 것은 아니었다.
구단 행사, TV 출연, CF 촬영. 시즌 중에는 할 수 없었던 수많은 일이 나를 덮쳐왔다. 물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을 즐겼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은, 야구에서 좋은 결과를 얻는 것 다음으로 나를 기쁘게 했다.
‘게다가 이런 보너스도 있고 말이지.’
“자, 좋습니다. 그대로 조금 더 편안하게.”
패션잡지인 QG의 촬영이었다. 나와 함께 촬영하는 쿠바 출신의 여자 모델 비다 게라의 몸매는 매우 바람직했다. 특히 엉덩이에서 남미 특유의 건강함이 물씬 풍겼다.
“잠깐 쉬었다 가죠.”
1시간이 넘는 촬영 이후 짧은 휴식시간. 그냥 사진에 찍히는 것뿐이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고됐다. 게다가 웃통을 벗고 찍는 사진들도 다수 있었던지라 입에 무언가를 함부로 넣을 수도 없었다.
“촬영이 생각보다 힘드네요.”
“오늘 정도면 쉬운 편인걸요. 사진 작가님도 까다롭지 않고요.”
“그런가요? 제가 이런 건 아무래도 처음이라서요.”
“처음치고는 엄청 잘 하시던걸요. 역시 운동선수라서 몸을 쓰는 일에는 전부 재능이 있는 건가?”
“아, 제가 운동선수인 거 알고 계셨어요?”
“당연하죠. 뉴욕에 사는 사람이 Kang을 모를 리가요. 제가 봤을 때 올 시즌 신인왕 받으실 것 같던데요. 미리 축하드릴게요.”
“아, 야구 팬이신가요?”
“네.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요. 뭐 미국에 온 이후로는 시즌권은 워낙 비싸서 좀 힘들지만 그래도 가끔은 야구장을 찾아가고 있고요.”
“혹시 어떤 팀 응원하시나요?”
혈기왕성한 23살의 나이. 마지막으로 만났던 셀레나와의 관계도 어느덧 두 달 전 이야기였다. 야구를 좋아하는 쿠바 출신의 바람직한 미녀라니. 은근한 기대감이 밀려왔다.
“양키스요. 특히 데릭 지터 선수. 너무 섹시한 것 같아요.”
“아, 양키스요.”
젠장, 기분이 싸하게 식었다. 와일드 카드를 얻는데 실패한 우리와 달리 뉴욕 양키스는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하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그뿐만 아니라, 디비전 시리즈에서 만난 텍사스 레인저스를 일방적으로 두들기며 홈 2경기에서 모두 완승을 하고 지금은 텍사스로 떠난 상황이었다.
본래도 양키스와 비교하면 인기가 많지 않은 메츠였다. 심지어 성적까지 밀리는 상황이었으니 지나가는 사람에게 뉴욕 사람에게 어느 팀 팬이냐 묻는다면 양키스 팬이라는 말을 들을 확률이 높은 것은 당연했다. 아마 오늘 촬영도 포스트 시즌 진출로 인해 양키스 선수들이 바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돌아갔을 확률이 더 높지 않았을까?
‘잠깐만, 비다 게라에 데릭 지터면······.’
기억났다.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엉덩이 비다 게라. 분명 지터와 염문설이 있었던 모델이었다. 어쩐지 주로 여성의 흉부에 관심을 두는 내가 엉덩이에 눈길이 가더라니. 그것이 세계제일의 엉덩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까워할 필요는 없지. 어차피 지금 비다 게라랑 먼저 만난 건 나잖아.’
시간은 충분했다. 나에게 주어진 휴식일은 2주가 넘게 남아 있었고, 데릭 지터는 뉴욕에서 2,200Km 떨어진 텍사스에 있었고 비다 게라는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의 강진호. 1998시즌 신인왕 유력!!-
어제를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 1998시즌 162경기의 대장정이 끝났다. 올해는 메이저리그를 사랑하는 한국팬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한해였다.
작년 14승을 수확하며 국민들에게 기쁨을 안겨 줬던 LA다저스의 박찬화 선수는 올 시즌 그보다 1승 더 많은 15승을 수확하며 메이저리그의 에이스급 투수로 우뚝 섰다.
투수에 박찬화가 있었다면 타자에는 강진호가 있었다.
올해 5월 메이저리그에 갑작스럽게 올라온 강진호는 지난 5개월간 118경기 503타석 454타수 129안타 14홈런 54도루 91득점과 59타점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정상급의 기량을 뽐냈다. 강진호 선수의 올 시즌 슬래시 라인은 0.284/0.345/0.443로 이는 팀 내에서 2, 3위를 다투는 좋은 성적이고, 리그 전체의 정규타석을 소화한 선수들을 따져봐도 각각 38위 47위 46위라는 무척 빼어난 성적이다.
현재 미국 현지의 많은 전문가가 강진호 선수를 가장 유력한 신인왕 후보 중 하나로 꼽고 있다. 강진호 선수의 경쟁자는 시카코컵스의 선발투수 케리 우드 선수와 콜로라도 로키스의 1루수 토드 헬튼 선수이다.
올해 강진호 선수와 동갑인 케리 우드 선수의 경우 24경기 13승 6패 ERA 3.40의 매우 훌륭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8월 말에 부상을 당한 덕분에 후반기 임팩트가 부족한 것이 약점으로 꼽힌다.
또한, 토드 헬튼 선수의 경우 0.315/0.380/0.533의 슬래시라인과 25홈런 78득점 98타점이라는 아주 빼어난 타격성적이 장점이지만 수비와 주루가 좋지 못했다는 점이 약점으로 꼽힌다.
반면 우리 강진호 선수의 경우는 타격 성적은 토드 헬튼 선수에 비해 조금 부족하지만, 수비만큼은 현재 메이저리그 최고의 외야 수비수로 알려진 배리 본즈, 래리 워커 등의 선수와 비교해도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을 뿐 아니라, 54개의 도루는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 3위의 기록이다. 단순히 타석에서만 강한 토드 헬튼과 비교하면 한결 돋보이는 5툴 플레이어 그 자체다.
더욱이 몇몇 전문가들은 토드 헬튼과 강진호의 타격 성적의 차이가 보기보다 크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2할 8푼 4리의 타자와 3할 1푼 5리의 타자가 어떻게 큰 차이가 아닌지 의구심을 표시하는 독자분들도 계실 것이다. 야구에서 타율이 3푼이나 차이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차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전문가들은 토드 헬튼의 홈구장이 쿠어스 필드라는 최고의 타자구장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쿠어스 필드에서 얻은 좋은 타격 성적은 그만큼 감해서 보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전문가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경우 토드 헬튼의 OPS+(출루율과 장타율을 합친 OPS에 각 구장의 유불리를 더해 나온 값)는 119. 그리고 우리 강진호 선수의 OPS+는 110으로 그 차이가 확연히 줄어든다.
미국의 유명 스포츠 캐스터인 카트리나 에반스의 말에 따르자면 추후 강진호 선수는 현재 메이저리그 최고의 외야수인 켄 그리피 주니어나 리키 헨더슨에 못지않은 선수로 성장할 것이라고 한다.
지난 1995년 일본의 노모 히데오가 수상했던 내셔널 리그의 신인왕. 하지만 그는 이미 일본의 프로리그를 거친 중고신인이었다. 만약 올해 강진호 선수가 내셔널 리그 신인왕에 오른다면 그것은 메이저리그 최초의 동양인 출신 타자 신인왕이자 다른 나라의 프로를 거치지 않은 진짜 신인왕이 될 것이다.
현재 강진호 선수는 미국 현지에서 오는 12월에 있을 방콕 아시안 게임에 대비해 몸을 만드는데 열중하고 있으며 11월 14일의 전체 소집일에 맞춰 귀국할 예정이다.
***
“Jin 축하해.”
“고마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엉덩이가 나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허벅지에 느껴지는 꽉 찬 무게감. 과연 세계제일이었다.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손가락이 나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골드 글러브는 솔직히 예상 못 했는데 말이야.”
“그래? 난 오히려 신인왕보다 그쪽이 더 확률이 높지 않나 싶었는데.”
“물론 Jin 의 수비도 돋보이긴 했는데, 솔직히 배리 본즈랑 래리 워커 두 선수에, 브레이브스의 앤드루 존스 선수도 대단했잖아. 게다가 메츠와 달리 브레이브스는 포스트 시즌에도 진출했으니까.”
야구에 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에서도 그녀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나의 셔츠를 벗겨낸 그녀가 내 가슴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물론 23살 혈기방장한 나의 하반신은 그녀의 손가락이 셔츠를 다 벗겨내기도 전에 이미 최적의 발사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뭐, 이름값만 따지면 그렇다지만, 아무래도 올 시즌 래리 워커 선수는 타격이야 그대로였다지만 수비는 좀 아니었잖아.”
“그건 그렇지만.”
아직 월드 시리즈가 시작되지 않은 시점. 신인왕을 비롯한 주요 타이틀의 발표를 일주일 앞두고 골드 글러브와 실버 슬러거가 발표됐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배리 본즈와 앤드루 존스 그리고 나의 이름이 외야수 골드 글러브에 올라왔다. 내 생각에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래리 워커의 이름값이 이름값이었던 만큼 현지인들에게는 제법 큰 뉴스로 받아들여졌다. 골드 글러브가 수비만으로 선정된다고는 하지만, 아직 수비 스탯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만큼 선수의 이름값이 주는 영향력을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그보다 이번에 유럽 쪽 일은 어떻게 됐어? 하기로 한 거야?”
“응, 내일 오후 비행기야. 어차피 Jin도 국제대회 대비해서 당분간 플로리다에서 몸을 만든다며. Jin이 그 대회 끝내고 뉴욕에 돌아올 때 즈음 나도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면 오늘 보면 당분간 못 본다 이거네?”
“응, 아마 한두 달 정도 못 보지 않을까?”
나의 오른손이 그녀의 흉부를 감추고 있는 몹쓸 물건을 단박에 풀어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둔부에 비해 조금은 부실한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둔부에 비해 부실하단 것이지, 평균적인 여성, 그러니깐 평균적인 남미 여성에 비교한다면 훌륭하기 그지없는 물건이었다.
그날 밤. 나는 그녀의 매끈한 구릿빛 피부가 분홍빛으로 물들 때까지 나의 수십 년 경험과 20대의 젊음을 불살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