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53화 (53/210)

# 53화.

시즌 이후(3)

98년의 KBO는 프로 초창기, NPB의 2군급 선수가 최고의 선수로 꼽히던 그런 리그는 아니었다. KBO의 최상위급 선수는 NPB에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방콕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모인 선수들은 KBO에서도 최고의 실력, 혹은 최고의 재능을 지닌 선수들이었다.

자신의 재능에 자부심을 보이는 것이 당연한 선수들. 그렇기에 그들의 눈에는 메이저리거라는 이유로 모든 이들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진호가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다만 박찬화 역시도 메이저리거였지만 여기 모인 선수들 가운데 연배가 가장 높았고, 게다가 꽤 오래전부터 이름을 알렸다는 점 때문인지 거부감이 덜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메이저리그라는 곳이 얼마나 대단한 곳이며 그런 곳에서 두각을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또한 각종 대회에서의 경쟁과 국제대회에서 함께 뛰어본 경험을 통해 강진호라는 인간이 얼마나 재능으로 똘똘 뭉친 인간인지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 역시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굳이 그런 착각을 하는 이들에게 메이저리그가, 그리고 거기서 두각을 드러낸 이 괴물이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를 일깨워주지 않았다.

‘뭐, 어차피 합동 훈련 시작되면 알게 될 테니깐.’

눈이 달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풀타임 메이저리거, 그것도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그 괴물들은 ‘같은 프로야구 선수’라고 범주화 시킬만한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외야 뜬공 훈련, 그리고 외야 땅볼 훈련. 머신으로 날려 보낸 공을 캐치하는 비교적 간단한 훈련이었으니 그리 어려운 훈련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단순한 훈련에서도 강진호는 달랐다. 공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안전한 거리에서 완벽한 자세로 잡아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특히 땅볼을 처리할 때 두드러졌는데, 그는 매우 과감하게 앞으로 달려나가며 공을 잡아냈다. 자신이 실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타구에 대한 반응속도 역시 특출났다. 공이 공중에 뜨는 그 순간부터 그는 마치 그 공이 어디에 떨어질지를 아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저게 말이 돼?’

그러나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강진호의 수비는 이미 메이저에서도 가장 특출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하지만 상혁이 진정으로 믿기 힘들었던 것은 그의 타격이었다.

따악!!

배팅볼 투수들이 던져주는 공들이 담장을 쭉쭉 넘어가고 있었다. 물론 상혁도 배팅볼을 담장 밖으로 넘기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어찌 됐건 그는 96년 대학리그 최우수 선수이자 프로에서 2년 연속 20홈런을 달성한 훌륭한 타자였다.

‘좌, 중, 우. 자기 마음대로 공을 넘겨 버린다고?’

‘2할 8푼. 14홈런. 장타율은 비교적 높았지만 빠른 발의 도움 덕분이다.’ 이것이 상혁이 알고 있는 강진호였다. 하지만 티배팅부터 시작된 타격 연습에서 강진호가 보여주는 모습은 고작 그런 말로 설명 가능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신기에 가까운 배트 컨트롤을 보여주며 밀어치기와 당겨치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뿐만 아니라 장타력 역시 굉장했다. 당장 한국 프로에서 뛴다면 30홈런 이상도 가능할 것 같은 파워였다. 시뮬레이션 배팅에서 요구하는 각종 미션들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 역시 기본이었다. 그야말로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곳이 없어 보이는 완벽한 타격이었다.

‘이런 녀석이 2할 8푼에 14홈런이라고? 맙소사. 그럼 대체 미일 올스타에서 일본 올스타 선수들이랑 박빙으로 싸웠던 미국 올스타들은 뭐라는 거야?’

비록 시리즈에서 일본이 이긴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7번 가운데 2, 3번씩은 꼬박꼬박 승리를 가지고 왔던 일본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본 올스타들을 상대로 지난 95년 한국 올스타는 2승 2패 2무의 전적을 기록했었다. 하지만 지금 연습을 통해 보이는 강진호와 자신은 KBO의 골든 글러브급 선수와 2군 선수들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메이저리거들에게 주어지는 관심과 특혜에 불만을 품고 있던 상혁을 비롯한 선수들은 그 불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프로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었다. 그들은 충분히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야, 쟤 학교 다닐 때도 저랬어?”

“잘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미국물이 좋긴 좋나 보네.”

***

처음 걱정했던 것과 달리 합숙훈련은 나쁘지 않았다. 선수들은 생각보다 친절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다만 이런저런 훈련에 관해 나에게 질문하는 것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사실 이 시기 KBO의 수준은 생각처럼 낮지 않았다. 아, 다시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지금 이 대표팀에 선발된 KBO 최상위권 선수들의 수준은 낮지 않았다.

일본과 비교해 선수 풀 자체가 작고, 미국처럼 리그 간의 차등도 제대로 정립되있지 않은 한국의 특성상 같은 리그 안에 수준 차이가 심각하게 나는 선수들이 같이 뛰고 있는 부분은 있었다. 아니, 당장 국가대표로 선발된 선수들만 보더라도 당장 미국에 건너와도 40인에는 너끈히 들어갈 만한 실력자와 더블A에서도 제대로 적응하기 힘들어 보이는 선수가 공존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그 40인에 들어갈 만한 실력자가 훗날 FA 기간을 채우고 메이저에 진출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KBO의 전반적인 수준의 문제였다.

진작 MLB 확장 로스터를 들락날락거리며 AAA리그에서 자신의 실링을 채워나가야 할 시기에 싱글A에서 머무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잠재력을 모두 폭발시켜 최대치에 도달하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상태에 고정되어버린다는 의미였다.

이들과 나의 차이는 단순히 훈련법의 차이가 아니었다. 넓은 사바나에서 다른 사자들과 경쟁하며 성장하는 사자에게 동물원 사파리의 사자가 ‘너는 어떻게 훈련해서 이렇게 강해진 거냐?’라고 물어봤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듯이, 나 역시 그들에게 딱히 해줄 수 있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훈련 방식 자체도 조금 다른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나에게 더 알맞은 훈련방법일 뿐 꼭 그들이 기존에 하던 훈련 방식보다 훌륭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가장 원론적인 이야기 뿐이었다.

“아무래도 근력운동은 1RM의 90%정도로 3회씩 치고 휴식시간을 충분히 갖고 있어요. 물론 위험하니깐 개인 트레이너는 항상 대동하고요.”

“허, 웨이트를 그렇게 한단 말이야? 그거 하면 유연성이랑 순발력 같은 거 문제 생기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 원론적인 이야기조차도 이들에게는 제법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러고보니 아직 98년이면 일본 야구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시기였다. 야구선수는 야구를 통해 만들어지는 근육이면 충분하지, 쓸데없이 근력운동으로 몸을 키우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 취급받던 그런 시기 말이다. 물론 정확한 자세와 플랜을 제시해 줄 트레이너가 없다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합숙 훈련에서 주로 연습한 것은 알루미늄 배트에 대한 적응이었다. 사실 타석에서는 적응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더 가볍고 더 멀리 나가는 마법의 배트를 쓰는데 적응이 필요할리 만무했다. 진짜 적응이 필요한 것은 투수들, 그리고 강하게 날아오는 타구를 맞이해야 하는 수비상황에서의 적응이었다.

“마이 볼!!”

수비에 대해서는 조금 어려운 면이 있었다. 타구의 강도 때문이 아니었다. 문제는 잔디의 질이었다.

‘내야수가 아닌 게 다행이네.’

오래간만에 경험해보는 인조잔디 구장. 상당히 닳아버린 인조잔디는 함부로 몸을 날릴 수 없을 만큼 위험했다. 메이저리그에서 하듯 몸을 날렸다가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돼버릴 위험이 다분했다. 그뿐만 아니라 불규칙 바운드도 역시 심했다. 다른 선수들이 왜 저렇게 굳이 안전하게 수비를 하려고 하는지 대충 이해가 간다고 해야 할까?

그나마 바운드볼 보다는 뜬공 처리가 많은 외야수인 게 다행이었다.

그렇게 차가운 기온과 열악한 잔디, 그리고 하루에도 수천장씩 찍어대는 사진들 속에서 보름의 시간이 흘러갔다.

방콕으로 향하는 비행기.

확실히 야구대표팀에 대한 대접은 매우 좋았다. 몇몇 종목의 경우 에이스급 선수들까지 이코노미 클래스에 앉았지만, 야구 대표팀에게는 전원 비즈니스 좌석이 제공됐다. 물론 국가에서 해주는 지원금의 차이는 아니었고, KBO가 그만큼 크게 돈을 썼다는 의미였다.

본래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는 총 8개 국가가 참가하기로 되어있었다. 야구라는 종목이 세계적으로 그리 인기 있는 종목도 아니었고, 어지간한 인프라 없이는 시작조차 하기 힘든 종목인 만큼 참가 국가 숫자가 적은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8개 국가조차도 모두 참가하지 못했다. 몽골의 불참. 덕분에 본래 1조로 배정되어있던 중국이 2조로 내려갔다. 1조의 구성이 한국 일본 대만 중국이라는 사실상 결승리그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중국으로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한국과 일본 대만의 더블 리그. 우리와 마찬가지로 프로들이 참가한 대만 대표팀과 사회인으로만 구성된 일본 대표팀. 대만의 프로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일본의 사회인팀이 대만의 프로팀보다 오히려 나았다.

‘그래 봐야 더블A 수준도 안 되는 것 같긴 하다만.’

4번의 경기에서 총 21타석 13타수 9안타 3홈런 8볼넷.

현역 프로 최고 수준의 선수가 고등학생들과 경기를 했을 때나 나올법한 기록이 터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메이저리거에게 알루미늄 배트를 쥐여주고(심지어 저반발력 배트도 아니었다.) 사회인 투수와 대결하게 했으니 말이다. 솔직히 말해 이 배트라면 메이저리그에서도 4할 타율에 50홈런도 너끈히 가능할 것 같았다.

준결승에서 만난 2조 1위 팀인 중국은 더 쉬웠다. 리그 막판 고의볼넷을 남발하며 나를 내보냈던 대만이나 일본과 달리 중국의 에이스 투수는 과감하게 나와 맞대결을 펼쳤다. 그리고 과감하게 부서졌다.

5회 16:5 콜드게임.

그리고 대망의 결승전. 조별 예선에서 두 차례나 깨졌던 일본은 나와의 승부를 철저하게 피했다.

[1사 만루 상황. 타석에 메이저리거 강진호 선수가 들어옵니다. 이번 대회 어마어마한 활약을 선보인 강진호 선수. 결승전, 지금까지 모든 타석에서 고의사구를 받아냈는데요, 이번만큼은 일본도 물러설 수 없거든요. 만루입니다. 여기서 시원하게 한 방을 응?]

[이게 뭔가요!! 포수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고의사구 고의사구입니다.]

[맙소사, 만루에서 고의사구라뇨. 이건 점수 1점을 그냥 주는게 싸게 먹힌다 그런 이야기인데요.]

만루에서 고의사구.

그러니깐 배리 본즈가 경험해봤다는 바로 그 만루 고의사구를 일본 대표팀이 나에게 선물했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사회인들이 주축이 된 이 국제대회에서 나는 전성기의 배리 본즈 이상의 타자였다.

***

-98 방콕 아시안 게임 최우수 선수 강진호 28타석 16타수 12안타 5홈런 8볼넷 0.750/0.857/2.063의 압도적인 활약.-

-일본 대표팀 만루에서 고의사구를? 어떻게 이런 야구가!! 1점을 공짜로 얻은 강진호 선수의 괴력.-

-야구 전문가 허영순 ‘강진호를 1점으로 막아냈으니 일본으로서는 남는 장사를 한 셈.’-

“이곳 김포공항은 지금 발디딜 틈도 없을 만큼 혼잡한 상황입니다. 지금 한국으로 돌아오는 우리 자랑스러운 태극전사들의 귀환을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인데요. 아, 지금 게이트가 열리는군요.”

98 아시안게임 야구는 IMF를 통해 상처받았던 국민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특히 그들이 열광했던 것은 야구선진국이라 알려진 일본 대표팀이 만루에서 강진호에게 고의사구를 던지는 장면이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패배의 인정. 그것은 단순히 좋은 타격을 보여준 것 이상으로 그들의 자존감을 충족시켜주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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