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54화 (54/210)

# 54화.

시즌의 시작(1)

“어이고!! 우리 강진호 선수 아니에요.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봐요.”

“뭐 강진호라고? 진짜 강진호네. 이야, 실제로 보니깐 더 단단해 보이는구만. 이리 와서 한 잔 받으라고. 어허!! 어른이 주는 술은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넙죽 받는 거야.”

“와씨, 대박. 강진호 선수!! 내가 진짜 메이저리그 경기도 꼬박꼬박 보면서 응원할 테니깐 파이팅이에요. 가서 양키 놈들이랑 쪽바리 놈들 코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어 주세요.”

한국에서의 일정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길지 않은 일정 중에는 내가 싫어하는 음식을 억지로 권하는 아줌마도 있었고, 초면에 반말을 턱턱 내뱉는 술 취한 할아버지도 있었으며, 다른 민족에게 무분별한 증오심을 보이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보내는 시간은 즐거웠다. 그들의 행동은 무례하거나 무지했지만, 그 눈빛과 행동, 그리고 목소리에는 나를 향한 선망과 애정이 담뿍 묻어있었다.

찬화 선배가 뭐 때문에 그렇게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국가대표에 집착했는지, 그리고 가슴에 달고 있는 태극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어째서 더이상 국가대표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에 눈물을 흘렸는지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단순히 내가 나의 일을 잘한 것만으로 이런 무차별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축복이었다.

‘앞으로도 국제대회에 참가할 여건이 된다면 참가하자.’

어차피 세계 최고의 야구는 메이저리그였다. 국제대회라고 해봐야 그 메이저리거 대부분이 참가하지 않는 아이들의 재롱잔치, 혹은 싹수가 보이는 이들을 메이저리거로 만들기 위한 데뷔 무대에 불과했다. 게다가 시즌을 끝내고 휴식과 다음 시즌 준비로 보내야 할 오프시즌에 대회에 참가한다는 것은 분명 다음 시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본래 나는 이번 대회를 통해 병역을 해결하고 특별히 국제대회에 이름을 올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출국을 앞둔 지금 나의 그런 마음이 아주 조금 바뀌어 있었다. 물론 여전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커리어였다. 그런 만큼 내 커리어에 영향을 줄 만큼 중요한 순간에 억지로 출전을 감행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여건이 된다면 다시 가슴에 태극기를 다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방콕 아시안 게임이 한창이던 12월. 메이저리그 역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FA를 선언한 수많은 선수. 그리고 30개 구단의 단장들이 모여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는 윈터 미팅. 그들과 접촉하고자 하는 에이전트들까지.

그리고 그 가운데 메츠의 단장 스티브 필립스가 있었다.

‘젠장.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군.’

98시즌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무브는 전체적으로 본다면 크게 나쁘지 않았다. 빠르게 콜업시켰던 강진호는 신인왕에 선발됐고, 피아자나 헨더슨의 경우 성공적인 트레이드라고 자평할 만했다. 게다가 플로리다와의 트레이드로 자리 잡은 알 라이터 역시 몹시 훌륭했다. 물론 몇몇 트레이드의 경우는 실패했다고 평가받기도 했지만, 모든 트레이드가 다 성공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메츠의 팬들이 그를 향해 보내는 시선은 싸늘했다.

‘미래를 팔아 현재를 사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미래만 팔아먹은 얼간이.’

스티브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평가였다. 분명 올해는 승부를 걸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그가 걸었던 승부수 대부분은 성공했다. 단지 같은 지구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라는 규격 외의 괴물이 존재했다는 점이 문제였을 뿐이다.

‘뭐, 노모 히데오의 경우는 확실히 내 실수이긴 했지만 말이야.’

어찌 됐건 이미 기호지세였다. 이미 순위권의 유망주들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는 정말 무리를 해서라도 달려야 할 타이밍이다.

‘쓸만한 선발 투수, 그리고 내야수.’

현재 메츠에 가장 부족한 것은 선발 투수. 알 라이터를 제외한다면 확실하게 자기 몫을 해줄 선발 투수가 없었다. 야수들의 경우 외야의 강진호나 리키 헨더슨은 내구성에서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거의 올스타급의 활약을 해주고 있었다. 프레스톤 역시 그만하면 자기 몫은 한다고 봐야했다. 문제는 내야였다. 일루수인 올러루드나 포수인 피아자는 MVP 순위권의 선수들이었기에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루수와 유격수라는 키스톤 콤비의 공격력은 양대리그를 통틀어 가장 나빴다.

‘1,500만 달러 증액이라면 충분해.’

올 시즌 뉴욕 메츠의 페이롤은 5,800만 달러. 메이저리그 전체 구단 7위의 높은 페이롤이었다. 거기에 1,500만 달러가 더해진다는 것은 올 시즌 가장 높은 페이롤을 자랑했던 볼티모어나 양키스에 뒤지지 않을 만큼 페이롤이 올라간다는 의미였다. 물론 상위팀들 역시 페이롤이 증가하겠지만, 그들의 경우 연봉협상대상이 되는 코어선수, 혹은 자팀의 FA를 잡기에도 바쁠 것이다. 반면 메츠의 경우는 달랐다. 팀의 코어라고 볼 수 있는 존 올러루드와 마이크 피아자, 알 라이터는 이미 장기계약으로 묶었고 2년 차인 강진호는 최저연봉 대상자이며, 리키 헨더슨 역시 2년 300만 달러로 싸게 묶어둔 상태였다.

시장에 나올 S급 FA 하나에 A급 FA 두셋 정도는 노려볼만한 거액이 손에 들어온 셈이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그 돈을 아낄 생각이 전혀 없었다.

***

3월 스프링 트레이닝에 합류하기 위해 트래디션 필드로 향했다.

‘1년 반 만인가?’

우리 메츠의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는 다름아닌 본래 나의 선수생명이 끊겨야 했던 바로 그 야구장이었다. 캠프에는 이미 일주일 전에 합류한 투수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옥타비오,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야?”

“어? 진호?”

작년 9월 확장 로스터를 통해 콜업 됐던 최고의 자질, 옥타비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탄탄하게 가꿔진 몸. 잠깐이나마 메이저의 맛을 봤던 만큼 어떻게든 25인 로스터에 들어가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엿보였다.

‘뭐 옥타비오라면 가능하겠지?’

특별히 선발 보강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았던 만큼, 옥타비오라면 충분히 25인 로스터에 이름을 올릴만했다. 아니 어쩌면 4선발이나 5선발을 노려볼 만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불만이었다.

‘스티브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당연히 지금 팀 상황 생각하면 선발진을 보강해야지. 어째서······.’

“헤이 진호!!”

“프레스톤!!”

저 멀리 프레스톤이 모습을 드러냈다. 텍사스의 고향집에 내려갔던 녀석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한층 거대해진 몸으로 돌아왔다. 프레스톤을 시작으로 야수들이 한둘씩 합류하기 시작했다. 작년 한 해 함께 동고동락한 동료들. 그리고 마이너에서 지겹게 얼굴을 맞댔던 녀석들과 마이너 옵션을 다 소모한 채 리그를 떠도는 저니맨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조금은 경계 섞인 눈빛으로 그라운드를 서성였다.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바라보는 선수들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것은 작년 하반기 메이저에서 쏠쏠하게 활약했던 프레스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40인 로스터. 더 나아가 25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기 서있는 경쟁자들을 이겨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들 사이를 떠돌았다.

물론 피아자나 올러루드같이 마이너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선수들은 달랐다.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그쪽에 더 가까웠다.

1998년의 신인왕. 그리고 골드 글러브와 MVP 1점의 사나이. 피아자나 올러루드처럼 시즌 중에 삽질을 한다고 해도 절대 마이너로 내려가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안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스프링 트레이닝의 성적으로 마이너 강등을 위협받을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라운드에 그들과 마찬가지의 눈빛으로 사람들을 지켜보는 낯선 얼굴이 하나 존재했다.

올 시즌 FA를 통해 팀에 합류한 로빈 벤추라였다. 화이트 삭스 출신의 삼루수로 5번이나 골드 글러브를 따냈던 남자. FA 직전 조금 주춤하긴 했지만 그래도 리그에서 손에 꼽을만한 훌륭한 내야수였다. 밝혀진 바에 의하면 4년 3,150만 달러. 연평균 787만 달러로 팀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큰 계약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스티브를 욕하는 이유였다.

물론 로빈 벤추라가 나쁜 선수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충분히 제 몫을 해줄 수 있는 훌륭한 야수였다. 하지만 지금 팀에 부족한 것은 3루수가 아니었다. 당장 기존 삼루수인 에드가르도는 작년 팀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훌륭한 타격과 수비를 보여줬다. 물론 이루수 자리에 에드가르도가 옮겨가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돈을 쓴다면 투수를 보강하는 것이 지금 팀의 상황에 더 알맞았다.

하지만 올 겨울 스티브가 보강한 투수는 그나마 아몬드 베니테즈 정도만이 25인에 이름을 넣을 만한 불펜이었을 뿐 데니스 쿡, 오스카 헨리케, 조슈아 만자닐로, 팻 마홈스 등의 스프링 트레이닝에서나 긁어 봄 직한 투수들뿐이었다.

심지어 더 화가 나는 것은 올 시즌 FA 시장에 나왔던 그 랜디 존슨이 고작 4년 5340만 달러라는 점이었다. 그 말은 저 로빈 벤추라에 연간 500만 달러만 보탰다면 우리는 빅유닛이라는 최고의 에이스를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었다.

‘젠장, 올해도 고생 좀 하겠네.’

스프링 트레이닝이 시작됐다.

가벼운 합동 훈련과 연습게임. 미리 몸을 만들어온 것이 분명할 마이너리거들과 저니맨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흠, Kang, 살이 좀 많이 찐 것 같은데?”

“네, 한 24파운드 정도 늘었어요.”

“증량이 좀 필요하긴 했는데, 그래도 군살도 상당히 붙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겨울에 국제대회가 있었으니깐요. 예정 자체가 좀 많이 뒤로 밀렸어요.”

“O.K. 그러면 뭐 천천히 끌어올려 보자고.”

코치가 가볍게 나의 등을 두들겼다. 안심됐다. 물론 나의 입지가 상당히 두터울 거라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내가 그렇게 짐작하고 있는 것과 코치진에게 직접 듣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조급해 하지 마. 넌 12월 중순에 시즌이 끝난 거나 다름없어. 남들처럼 스프링 트레이닝에 맞춰서 몸을 만든다는 말은 제대로 쉬지 않는다는 이야기야. 그렇게 해서는 1년을 보낼 몸을 만들 수가 없어.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긴장해야 되는 선수들은 로스터에 드는 걸 경쟁해야 되는 선수들이야. 그리고 너에게 스프링 트레이닝은 말 그대로 트레이닝일 뿐이야.”

1월, 2월 내가 페이스를 올리려고 할 때마다 가리비아가 해줬던 이야기였다. 그의 말이 옳았다. 나는 아직 1년도 채 뛰지 못한 선수였지만 이미 그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 선수였다. 스프링 트레이닝에 조급할 필요가 없었다.

프레스톤을 비롯한 마이너 리거들의 시즌이 3월부터라면 나의 시즌은 4월부터였다.

-강진호. 소포모어 징크스? 4경기 연속 무안타!!-

-발렌타인 감독의 알 수 없는 기용. 라인 업에서 사라진 강진호.-

-바비 발렌타인 감독 ‘강진호는 이미 확정적인 카드다. 지금은 다른 선수들을 시험해봐야 할 시간.’-

-13일 연습경기 홈런포 가동!! 강진호 부활의 신호탄인가-

-땅볼!! 땅볼!! 또 땅볼!! 사라져버린 주루 능력. 강진호 이대로라면 올 시즌 메이저 로스터 장담 못 해.-

-초비상!! 뉴욕 메츠, 시범경기 6연패.-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