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시즌의 시작(2)
시범경기 일정이 계속되면서 67명으로 시작한 캠프의 인원은 점점 줄어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올 시즌 메츠에 필요한 인원은 40. 그나마도 15명은 AAA 혹은 AA에서 뛰면서 메이저에 빈자리가 생기기를 기다려야 할 처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팀 저팀을 전전하는 36살의 저니맨인 그렉 보어는 자신이 제법 운이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경쟁자가 알아서 스스로 나가 떨어주다니 말이다.
본래라면 거의 불가능한 경쟁이었다. 신인왕, 골드 글러브 동시 석권에 10위 표 하나라지만 MVP 표까지 받아낸 루키라니. 단순히 타격감만 좋은 선수보다 더 까다로운 경쟁상대였다. 타격은 부침이 있어도 수비는 부상 같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 법이니 말이다.
하지만 겨울이 끝나고 돌아온 강진호는 더 이상 작년의 그 압도적인 루키가 아니었다. 한눈에 봐도 체중조절에 실패한 것 같은 육중한 체구. 그리고 확연하게 떨어진 경기력. 이것은 단순히 살을 빼고 안 빼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지난겨울을 얼마나 게으르게 보냈는지에 대한 방증이었다.
보어 자신처럼 나이 먹은 선수가 어린 선수와 경쟁 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현재의 실력보다는 미래에 대한 그 막연한 기대감이 더 컸다. 그런 의미에서 워크에씩(work ethic, 성실성, 근면성, 팀의 화합 등 프로로서 요구되는 종합적인 정신 능력)이 좋지 않은 유망주라는 이미지는 현재 보여주는 안타 하나, 파인 플레이 하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애송이가 너무 일찍 성공의 단맛을 취해버렸군.’
오랜 시간 리그를 떠돌았던 그렉 보어는 저런 식으로 망가진 선수들을 여럿 알고 있었다. 물론 타고 난 재능이 있으니 다시 정신을 차리고 올라올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최소한 그것이 올해는 아닐 것이다.
[그렉 보어의 잡아당긴 타구, 2, 3루 간을 뚫어냅니다.]
1루에 선 그렉 보어가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충분히 가능해.’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오늘도 아무 기록을 남기지 못한 채 먼저 자리를 떠난 강진호의 빈자리로 향했다.
***
‘좋아.’
가리비아의 얼굴에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재작년 말에 만났던 이 동양의 어린 친구는 최고의 소재였다. 단순히 육체적인 포텐셜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툴 적인 부분에서도 진호는 훌륭했다. 그의 육체적인 능력은 NFL의 어지간한 엘리트 러닝백 이상이었다. 하지만 가리비아가 진정으로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런 툴의 대단한 보다는 그의 치열한 워크에씩, 그리고 자신을 책임지는 트레이너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는 멘탈의 단단함이었다.
자신의 성적이 점점 좋아지는 것이 눈에 띄는 상황에서 트레이너를 믿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도 트레이너의 지도를 꿋꿋하게 믿고 조급증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설사 합리적이고 타당한 계획하에 이뤄지는 일이라 해도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강진호는 그 힘든 일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다. 엉망진창의 시범경기 성적, 그리고 하루가 멀게 떠들어대는 언론의 압박을 그는 꿋꿋하게 이겨냈다.
가리비아는 확신했다. 이제 멀지 않았다. 얼마 전 경기에서 보여준 그 밀어치는 홈런, 그리고 최근 늘어나기 시작한 컨택을 생각한다면 조만간 그가 계획했던 강진호의 2년 차가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뛰어난 민첩성과 순발력으로 필드를 질주하는 스캣 백에서 라인맨을 밀어내고 돌진할 힘까지 갖춘 파워 백으로.’
그리고 그것은 작년의 강진호가 보여줬던 모습 그 이상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
스프링 트레이닝이 시작되고 스물세 번째 시범경기. 상대는 빌어먹을 줄무늬 놈들이었다.
‘몸은 점점 올라오긴 오는 것 같긴 한데.’
확실히 캠프 초반 느꼈던 무겁고 답답한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작년 한창 좋은 시절에 느끼던 그 가뿐한 감각과도 거리가 있었다. 묵직함.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각은 ‘묵직하다.’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어? 쟤 야널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허, 피아자 씨 때문에 말린스로 트레이드되더니 그새 양키스로 다시 트레이드됐나 보네.”
대졸 출신. 97년 메츠의 3라운드인 에드 야널이 양키스 마운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세인트 루시에서 잠깐 함께 뛰었던 녀석으로 대졸 출신 투수답게 제법 괜찮은 완성도를 자랑하며 트리플A까지 빠르게 올라갔었다. 이후 성장이 잠시 정체되긴 했지만 그래도 98년 상반기 BA 리포트 전체 60위로 프레스톤보다 높은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다.
‘성장했겠지?’
스프링캠프는 이미 종반을 향해가고 있었다. 어지간한 옥석구분은 끝난 상황. 단순히 경험을 시켜주기 위해 불렀던 유망주들은 애저녁에 자기 자리로 돌아간 시점이었다. 아직 캠프에 남아서, 심지어 선발로 출전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실제로 에드 야널이 올 시즌 양키스의 전력에 포함될 만큼 성장했다는 의미임이 틀림 없었다. 뭐, 작년 BA 리포트 전체 60위, 좌완투수 3위까지 올라갈 만큼 잠재력을 보여줬던 녀석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분명 공 대부분이 상당히 완성도가 높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녀석에 대한 인상만큼은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고작 두 경기. 녀석이 어드밴스드 싱글A 세인트 루시에서 더블A 빙엄턴으로 올라가는데 필요했던 경기 숫자였다. 2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저 뉴욕 양키스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이곳에 선 이상, 그때보다 한층 더 강력해진 것은 틀림없었다.
[자, 메츠의 1번 타자 마이크 킨케이드 선수가 타석에 들어왔습니다.]
[밀워키 출신의 선수죠? 작년 트레이드로 메츠에 입단해 AAA팀인 노포크에서 3할 2푼의 타율을 기록한 선수입니다.]
‘자, 어디 얼마나 발전했는지 한번 보자고.’
볼 수 없었다. 에드 야널의 바깥쪽 낮은 코스 빠지는 공에 마이크 킨케이드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높게 뜬 타구가 이루수의 글러브에 쏙 들어갔다. 초구 내야 팝플라이. 곧바로 두 번째 타자가 타석에 섰다.
그렉 보어.
백업 요원으로 10년 이상 이 팀 저 팀을 돌아다니고 있는 저니맨이었다. 기본적으로 어느 팀에 완벽히 자리를 잡기에는 부족한 실력. 하지만 무시할 만한 실력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찌 됐건 만 36세라는 나이까지 10년 넘는 시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가 메이저리거라고 불리기에 합당한 능력을 갖췄다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만 23세의 투수가 만 36세의 타자에게 공을 던졌다. 초구 슬라이더. 그렉 보어의 배트가 멈춰섰다.
‘흠, 슬라이더는 그럭 저럭인가? 아니야 우타자인 그렉 보어에게는 쉬워도 나에겐 까다로울 수도 있어.’
두 번째, 몸쪽 속구. 이번에도 그렉 보어의 배트는 나가지 않았다.
“스트라잌!!”
둘의 승부가 이어졌다. 체인지업 슬라이더 커브 포심. 다채로운 레퍼토리가 그렉 보어를 현혹했다. 하지만 이 노련한 타자는 끝까지 공을 지켜봤고, 마침내 9번째 공을 흘려보내며 1루로 걸어 나갔다.
‘포심,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이라 이거네.’
대기 타석에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에드 야널이 구사하는 구종은 총 네 가지. 다채로운 레퍼토리였지만 특별히 대단한 구종은 보이지 않았다.
[자 이어지는 3번 타자. Kang입니다. 작년 내셔널리그 신인왕에 골드 글러브를 수상한 수퍼루키!! 하지만 이번 시범경기 성적은 영 좋지 않군요.]
[19타석 16타수 2안타 1홈런 1볼넷 2희생플라이. 슬래시 라인은 0.125/0.176/0.313을 기록 중입니다.]
[현재 그레이프푸르트 리그 전체에서 세 번째로 나쁜 타격 성적입니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드는군요.]
마운드의 에드 야널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상당히 정직한 폼. 그의 손끝에서 공이 튀어나오는 것이 똑똑히 보인다.
티익!!
[바깥쪽 빠른 공!! 스윙!!!]
[빗맞은 타구가 3루 내야 관중석에 떨어집니다.]
‘젠장.’
타이밍이 조금 빨랐다. 실제 타석에서 지켜본 에드 야널의 공은 생각보다 더 느렸다. 게다가 나의 스윙 스피드가 작년보다 조금 더 나아진 이유도 있었다.
‘반 호흡 더 느리게 가자.’
에드 야널의 두 번째 공이 그의 손을 떠났다. 바깥쪽 낮은 코스!! 힘차게 돌아가던 배트를 멈춰 세웠다. 서클 체인지업이었다.
뻐엉!!
“스트라잌!!”
이런, 생각보다 공격적인 피칭이었다. 설마 체인지업을 존 안에 넣어버릴 줄이야. 볼카운트는 0-2. 나에게 굉장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초조함은 없었다. 침착하게 세 번째 공을 기다렸다.
제3구.
‘커브다.’
던지는 순간 느껴지는 미묘한 이질감. 역회전을 품고 있는 구질인 커브였다. 볼카운트는 0-2. 코스 역시 그리 높지 않았다. 또, 한번 나의 배트가 멈춰섰다.
뻐엉!!
심판 판정을 지켜볼 필요도 없었다. 존을 크게 벗어나는 볼이었다. 볼카운트는 1-2. 잠시 타석에서 벗어나 옷을 가다듬고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에드 야널의 네 번째 선택은 바깥쪽 아슬아슬한 코스 빠른 공이었다. 카운트에 여유가 있다면 그냥 지켜봤을 만큼 아슬아슬한 코스. 나의 배트가 정확하게 움직였다.
‘이런!! 커터?’
앞서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공이 튀어나왔다. 마지막 순간 미묘하게 흔들리는 공. 다행히 그 변화는 크지 않았다. 중심에서 조금 벗어나도 괜찮았다. 돌아가던 나의 배트에 힘을 더했다.
따악!!
[바깥쪽 낮은 코스!! Kang 쳤습니다!! 강한 타구!!]
[이루수 머리를 훌쩍 넘긴 공!! 우익수 달려봅니다만 늦습니다!! 1루 주자 3루까지!! Kang은 무사히 1루에 안착합니다.]
여전히 완벽하지는 않았다. 분명 힘은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둔했다. 아마 작년이었다면 충분히 2루를 노려볼만한 타구였다.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자 하는 욕심은 아니었다. 하지만 흰 토끼의 몸통 절반을 미끼로 내놨다면 최소한 그 몸통보다는 큰 고기를 얻어야 했다. 아직은 본전, 아니 그보다 조금 부족했다.
‘오늘 한 번 더? 아니 어쩌면 두 번?’
경기가 이어졌다. 에드 야널은 양키스의 마운드 한 자리를 차지할 만했다. 슬라이더, 커브, 포심, 체인지업의 레퍼토리에 커터가 더해졌다. 물론 그 중 플러스 급이라고 할만한 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 하나가 평균 혹은 평균에서 약간 부족한 수준의 공이었다. 만약 저 중 단 하나라도 플러스 급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면 야널은 충분히 메이저에서 롱런하는 투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양키스는 만 23세의 젊은 투수에게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은근히 까다롭네. 다 할만한 것 같은데, 이거다 싶으면 저게 들어오고, 저거다 싶으면 이게 들어오네.”
삼진으로 물러난 프레스톤이 투덜거렸다. 몸을 키우고 장타력을 올린 프레스톤였지만 컨택은 오히려 더 나빠진 모양새였다.
“좀 참아봐. 아슬아슬하게 빠질 것 같은 공들도 죄다 건드리니깐 카운트가 불리해지는 거잖아.”
“그렇기는 한데, 공 대부분이 잡아먹어 달라고 하는 것처럼 비실비실하잖아.”
하지만 나쁜 방향은 아니었다. 아주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3할에 10홈런을 치는 똑딱이 외야수보다는 2할 5푼에 40홈런을 치는 거포가 더 매력적인 법이었으니 말이다.
“진호 너는 이제 좀 상태가 올라오는 모양이다?”
“뭐, 아직 완전한 건 아니고. 그래도 아직 시즌 시작까지 일주일도 넘게 남았으니깐. 개막식 즈음에는 완전히 올라오지 않겠어?”
“이 여유 좀 보게. 근데 너 WOL-TV랑 데일리 뉴욕이랑 또 뭐더라? 하여간 그 한인 신문이랑 그렇게 악평을 때려대는 데도 신경도 안 쓰이냐?”
“어차피 내가 홈런 한 방치면 부활이니 뭐니 하면서 빨아줄 텐데 신경 쓸 필요 있겠냐?”
“그런가? 그래서 그 홈런은 언제 한 방 칠 생각인데.”
“글쎄?”
마이크 킨케이드가 내야 땅볼로 물러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방망이를 뽑아 들고 대기 타석으로 나갈 시간이었다.
“일단 마음의 준비 하고 기다려봐. 왠지 이번 타석 천천히 걸어 들어올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