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56화 (56/210)

# 56화.

시즌의 시작(3)

프레스톤에게는 큰소리를 뻥뻥 치고 대기 타석에 나왔지만, 홈런을 칠 자신이 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홈런을 칠 자신이라니. 그저 좋은 타구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 정도는 들었다. 하지만 그게 타석에서 120m 떨어진 담장까지 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해보지, 뭐.’

2아웃 주자 없음. 2번 타자인 그렉 보어가 타석에서 고군분투하는 것이 보였다. 솔직히 말해 특별한 위닝샷 없이 그럭저럭 쓸만한 공들로 승부하는 에드 야널 같은 타입의 투수는 그렉 보어에게 요리하기 쉬운 타입의 투수였다. 세월은 그에게서 많은 것을 뺏어갔지만 대신 그런 다양한 공들을 상대할 수 있는 경험을 안겨줬으니 말이다.

따악!!

6구째, 살짝 몰린 공을 그렉 보어가 침착하게 두들겼다. 내야수의 키를 살짝 넘는 페어볼. 그렉 보어가 1루에 무사히 안착했다. 확실히 36살까지 중견수를 고집하는 만큼 몸놀림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물론 지금 모습이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모습이라면 메이저에서 주전을 차지할만한 기량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잘하면 4번째나 5번째 옵션 정도로는 살아남을 수도 있겠는데?’

타석에 들어서서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마운드에 선 에드 야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름대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흔들린 기색이 역력한 표정. 그것이 그렉 보어의 안타 때문인지 이전 타석 나에게 얻어맞은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운드의 투수가 고작 그런 이유로 흔들린다는 것은 분명 선발로 써먹기엔 커다란 약점이었다.

‘역시 정신력 쪽이 문제인가?’

근거는 또 있었다. 어드벤스드 싱글 A와 더블 A를 박살 내고 올라갈 때만 하더라도 당장 메이저로 올라갈 것 같았던 녀석이 1년 이상 AAA에서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이 바로 그 근거였다. 야수라면 자리가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녀석의 보직은 투수. 어지간하면 일단 올려서 시험해보는 것이 투수였다. 그런데도 아직 메이저 데뷔를 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 어딘가 하자가 있었다는 의미였다.

셋 포지션. 에드 야널의 양손이 글러브에 들어갔다. 잠깐의 정지 동작. 그리고 이어지는 피칭. 손에서 공이 튀어나오기 한참 전부터 드러난 왼손. 바깥쪽 낮은 코스로 누런 공이 날아들었다.

‘포심? 커터?’

흔들린 멘탈 덕분인지 살짝 중앙으로 몰려 날아드는 공. 코스는 나쁘지 않았다. 묵직한 무게감이 실린 나의 배트가 세차게 돌았다. 마지막 순간 약간의 흔들림. 이번에도 커터였다. 하지만 이전 타석과는 달랐다. 나의 손목이 미묘하게 틀어졌다. 녀석의 커터가 보여주는 변화가 크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포심과 커터 양쪽을 모두 노리는 스윙이었다. 만약 포심 패스트볼이었다면 손목을 반대로 틀었을 것이다.

따악!!

마지막 순간 억지로 배트를 틀었던 만큼 온전하게 모든 힘이 실린 자세는 아니었다. 하지만 충분히 장타로 연결될만한 타구였다. 2사 1루의 상황 1루 주자 그렉 보어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Kang이 에드 야널의 초구를 그대로 받아칩니다. 우중간 큼지막한 타구!!]

최소한 2루타. 잘 하면 3루까지도 가능할 것 같았다. 1루를 지나 2루를 향해 질주했다.

‘뭐야 저 아저씨는!!’

그런데 앞서 달리던 그렉 보어가 3루를 앞두고 속도를 늦추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이런 타구에 홈까지 달리지 않는다 이 소리인가? 아니었다.

[어? 어? 어?? 넘어갔습니다!! 홈런, 홈런입니다!! 3회 말 2아웃 주자 1루 상황에서 Kang이 에드 야널의 초구를 담장 밖으로 넘겼습니다.]

[와, 이게 넘어가네요. 사실 타구 각만 보면 넘어갈 타구가 아닌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힘이 강하게 실렸던 것 같습니다. 우중간 담장을 살짝 넘기는 홈런. Kang이 시범경기 두 번째 홈런을 기록합니다.]

돌아온 덕 아웃. 프레스톤 녀석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부진하던 친구가 홈런을 예고하고 나갔다. 솔직히 나도 반쯤은 허풍이었고, 녀석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대뜸 초구를 후려쳐 홈런으로 만들고 돌아와 버렸다.

“너, 너 인마. 너.”

“그래, 나도 알아. 나 대단한 거.”

“오늘 아주 제대로 한 건 하는구만.”

“한 건은 무슨. 아직 3회밖에 안 됐잖아. 한 번은 더 타석에 설 것 같은데?”

“와 이 자식 욕심 좀 보게.”

이 묵직함이 의미하는 것이 단순히 나를 갑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막 알기 시작한 것들을 제대로 적용해볼 시간이 충분하다는 의미였다.

***

프레스톤이 자신을 둘러싼 기자들에게 방실방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박이었어요. 진짜로. 그러니깐 제가 이렇게 말했거든요. 너 요새 주변에서 소포모어 라느니, 관리부실이라느니, 워크에씩에 문제가 있다느니, 뱃살이 보인다느니 하는 말들 신경 쓰이지 않냐고요. 그랬더니 녀석이 어차피 홈런 한 방이면 다 해결될 거니깐 신경 안 쓴다는 거예요. 솔직히 웃기잖아요. 아니 시범경기 내내 부진 해놓고 홈런 한 방에 다 해결된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그 자식 시범경기 안타 몇 개 쳤었죠?”

“오늘 경기 전까지 두 개입니다. 내야안타 하나랑 홈런 하나요.”

“맞다. 두 개. 뭐 앞선 타석에서 안타 하나 더 쳤으니 안타 세 개. 근데 거기다가 홈런 하나 추가한다고 여론이 반전될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웃었죠. 그 잘난 홈런 언제 칠 생각이냐고. 그랬더니 녀석이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잠깐의 정적. 기자들의 눈과 귀가 프레스톤의 입으로 집중됐다. 프레스톤이 오른 주먹을 불끈 쥐고 목소리를 쫙 깔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금.”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 프레스톤 자신도 자신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한차례 탄성을 내뱉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캬, 그러고는 방망이를 멋지게 뽑아 들고 대기 타석으로 나가는데 솔직히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설마 그게 예고 홈런일 줄이야. 그렇게 홈런을 치고 덕아웃으로 돌아와서는 이러더라니까요.”

“아직 안 끝났다.”

“크, 아주 각오를 제대로 한 것 같았어요. 그러더니 결국 일을 낸 거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예고 홈런!! 오직 강진호만이 예상했다.-

-강진호 화려한 부활의 신호탄!! 3타수 3안타 2홈런!!-

-개막까지 1주일 이제 영점 조준은 끝났다. 신인왕 강진호의 새로운 도전!!-

-팀 동료 프레스톤 윌슨이 말한다. ‘강진호의 홈런 쇼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뉴욕 메츠의 Kang. 드디어 돌아오기 시작한 타격감.-

-작년에 비해 한결 튼튼해진 메츠의 야수진. 하지만 여전히 보강되지 않은 선발진은 약점으로 지적된다.-

***

디트로이트와의 시범경기가 끝났다. 작년 백업 외야수로 마이너를 오갔던 제이 페이톤이 자신의 라커룸을 비웠다. 4월 5일 있을 개막전까지 며칠 남지 않은 상황. 이제 캠프에 남은 것은 25명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여기 남아 있는 사람들이 올 시즌을 함께할 메이저 멤버라는 의미였다.

‘마음에 안 드네.’

야수진의 구성은 별 불만이 없었다. 한 가지 불안이라면 삼루수였던 에드가르도 알폰조의 2루 수비였지만 타격 측면에서 그 불안 이상의 이득을 기대할 만했다.

문제는 투수진. 특히 작년에 비교해 크게 나아지지 않은 선발진이었다. 노모 히데오는 방출됐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마이너에서 올라온 옥타비오였다. 물론 작년 노모가 워낙 엉망이었던 만큼 당연히 그보다는 나을지 몰랐다. 하지만 노모는 애당초 프런트라이너 역할을 기대하고 데려왔던 선수였다. 폭삭 망했던 성적보다 조금 나은 성적을 거두는 투수가 더해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대충 다 나온 것 같네. 오늘 저녁 가볍게 맥주 한 잔 콜?”

프레스톤이 다가왔다. 녀석은 25인 로스터에 포함됐다. 올해로 6년 차에 들어가는 부치 허스키보다 훨씬 나은 모습을 보여줬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프레스톤에게 밀린 부치 허스키는 시애틀과의 트레이드 매물로 사용됐다. 받아온 선수는 작년 AAA에서 2.97의 좋은 성적을 거둔 선발 투수 터크 프렛. 하지만 아직 메이저에서 사용할만한 수준의 투수는 아니었다. 프렛은 열흘 전 노포크로 짐을 싸서 내려갔다.

“어이, 맥주 한잔하려는 거면 여기로 합류하라고.”

제법 떨어진 곳에 있던 그렉 보어가 프레스톤에게 소리쳤다. 부치 허스키가 시애틀로 트레이드된 덕분에 배니 아그바야니와 5번째 옵션을 두고 경쟁해야 할 처지였던 그렉 역시 로스터에 남는 데 성공했다.

그의 주변에는 이미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당장 메이저 로스터가 확보된 만큼 기분 좋게 한잔할 요량들인 것 같았다. 어차피 앞으로 한 시즌을 함께 보낼 동료들이었다. 친하게 지내는 편이 여러모로 좋았다. 나와 프레스톤이 합류 의사를 밝혔다. 왁자지껄하게 달아오른 라커룸. 옷을 갈아입은 선수들이 주차장으로 향하려는 찰나 라커룸의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의 마흔 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였다.

“오, 오렐 씨!! 오래간만입니다.”

피아자가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엉? 오렐?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설마?”

헨더슨이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오렐 허샤이저!!’

맙소사. 돈 드라이스데일, 샌디 쿠팩스와 함께 LA다저스의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전설적인 투수. 다저스의 전설 ‘불독’ 오렐 허샤이저였다. 사이 영 위너이자 양대리그 챔피언십 MVP. 월드시리즈 MVP에 빛나는 빅게임 피처. 그리고 내가 회귀한 시점까지 깨지지 않았던 최장 이닝 무실점 기록까지. 메이저리그에서 그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프런트라이너 급 선발 투수의 보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작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풀타임 2선발로 활약하며 두 자릿수의 승리, 4점대 초반의 ERA를 기록한 오렐 허샤이저라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그런대로 프런트라이너 급이라고 볼만했다.

‘문제는 나이인가······.’

만 40세. 우리 나이로 42살. 작년이 훌륭했다고 올해도 훌륭하리라 보장하기 힘든 나이였다. 막말로 언제 꼬꾸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인 것이다.

“계약이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잘 부탁한다. 오늘부터 캠프에 참가하게 된 오렐 허샤이저다.”

25명의 멤버가 모두 결정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경쟁자가 합류했다. 비록 나이가 많다고는 했지만, 충분히 빅리그에서 경쟁력을 갖춘 투수의 등장이었다. 투수진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

마지막 시범경기. 허샤이저가 자신의 기량을 과시했다. 발렌타인 감독이 체력만 잘 관리해준다면 1년 300만 달러의 몫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그리고 경기 직후, 마지막 한 사람이 마이너로 떨어졌다.

‘발렌타인 감독이 허샤이저를 제대로 활용할 생각인가 보네.’

투수가 아니었다. 발렌타인 감독의 선택은 팀의 다섯 번째 외야수 그렉 보어였다. 그가 12명이 아닌 13명의 투수로 로스터를 운용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외야수들의 체력에 부담이 더해지는 것이 불안하긴 했다. 프레스톤은 올해가 첫 풀타임이었고, 헨더슨 역시 나이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선택은 옳았다. 만약 외야진에 부하가 심해진다면 그때 가서 불펜 하나를 내리고 외야수를 올려도 늦지 않았다. 지금은 최대한 이길 수 있는 형태로 팀을 구성해야 했다.

만으로 40살이 되는 두 명의 베테랑, 그리고 이제 막 풀타임을 뛰기 시작한 루키들. 약간의 위태로움 속에 1999년. 뉴욕 메츠의 25인 로스터가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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