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57화 (57/210)

# 57화.

시즌의 시작(4)

그레이프프루트 리그 막판.

5경기 19타석 17타수 8안타 3홈런 1볼넷 1희생플라이

옥석구분이 거의 끝나고 실제 메이저에서 뛸만한 선수들만이 남은 상황이었기에 이것은 매우 놀라운 성적이었다.

가리비아는 자신의 고용주가 대단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잘못된 방식이라고는 해도 증량의 경험이 있었던 만큼 상당히 빠르게 적응을 끝낼 수 있으리라고도 예상했다. 하지만 진호는 그런 가리비아의 예측조차 훨씬 웃도는 시간 안에 적응을 끝냈다.

무려 20파운드에 가깝게 증량한 몸의 밸런스를 맞추는 작업이었다. 또한, 가장 단순한 운동들조차도 몸이 불어나면 그 불어난 몸에 맞게 적절한 수정을 거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었다. 하물며 타격은 가장 복잡한 운동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그가 예상한 시점은 4월 중순.

이것도 진호의 재능과 기타 여러 요소를 고려해서 상당히 빠르게 예상한 기간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진호는 3월 시범경기 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어난 몸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뭐 본인은 여전히 몸이 무겁다고 투덜대기는 하지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몸에 저장된 단백질은 분해하는 데 소모되는 에너지가 너무 과다하여 탄수화물을 섭취하여 얻는 에너지와 별반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반면 지방은 대사하는 에너지를 제외하고도 1g에 9Kcal라는 열량을 제공해준다. 한 시즌, 일주일에 6경기 이상의 가혹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메이저리거에게 적절한 지방은 필수불가결이다. 당장은 몸이 무겁게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6개월간의 긴 여정을 생각한다면 지금 몸 상태야말로 올해 그가 만들어 줄 수 있는 최선의 상태였다.

***

개막전 우리의 상대는 플로리다 말린스. 선발 투수는 알렉스 페르난데스였다. 지난 90년 시카고 화이트 삭스에서 데뷔한 이후 7년간 79승 ERA 3.78이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한 에이스급 투수. 97년 플로리다 말린스와 5년 3,500만 달러의 계약을 맺었던 그는, 현재 우리 팀의 에이스인 알 라이터와 함께 말린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다만 98년 메츠로 트레이드된 알 라이터가 여전히 압도적인 활약을 보인 데 반해 97년 포스트시즌에서 어깨를 다쳤던 그는 98시즌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99시즌. 마운드에 선 페르난데스의 구속은 여전히 빨랐다. 하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부상에서 돌아온 그의 공에는 더이상 타자를 압박하던 지난날의 그 맹렬한 구위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강력한 투수였다. 하지만 타석에 선 타자는 리키 헨더슨이었다. 8개의 공이 헨더슨에게 쏟아졌고 헨더슨은 그 공을 철저하게 골라냈다.

뻐엉!!

[페르난데스 선수의 제8구!! 아 빠졌습니다.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네요. 헨더슨 선수 볼넷으로 출루에 성공합니다.]

대기 타석으로 나아갔다. 1루에 선 헨더슨이 씨익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 번의 스윙. 여전히 묵직하게 느껴지는 몸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 묵직한 무게감이 만들어내는 파괴력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는 지난 시범경기들을 통해 충분히 체감했다.

타석에 선 2번 타자 에드가르도 알폰조의 의욕이 충만했다. 굳이 내밀지 않아도 될 공에 번번이 끌려나가는 그의 배트. 페르난데스의 슬라이더가 그의 배트를 또 한 번 끌어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스윙 삼진. 타석에서 물러나는 그의 얼굴에 짜증이 느껴졌다. 충분히 쳐낼 수 있는 공을 공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구위가 떨어진 만큼 존의 외곽을 공략해보겠다 이건가?’

강력한 공으로 타자를 윽박지르던 파워 피처가 떨어진 구위를 대신하기 위해 피네스 피처로 변신을 꾀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원 아웃. 주자 1루. 타석에 메츠의 3번 타자 Kang이 들어옵니다.]

[시범경기 막판 아주 좋은 타격을 보여줬던 Kang입니다. 그 좋았던 타격감을 정규시즌에서도 이어갈 수 있을지 기대되는군요.]

마운드의 페르난데스가 자세를 잡았다. 1루의 헨더슨을 매섭게 노려보는 페르난데스. 그의 몸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세이프!!!”

여유로운 귀루. 1루의 헨더슨이 헬멧을 고쳐 쓰며 씨익 웃었다.

‘어지간히 컨디션 좋은가 본데.’

확실히 시즌 초라서 그런지 헨더슨의 상태가 좋아 보인다. 적당한 거 한방이면 타점도 가능한 상황. 배트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페르난데스의 눈빛이 1루를 향했다. 헨더슨은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잠깐의 정지 동작. 페르난데스의 초구가 날아들었다.

97마일의 바깥쪽 빠른 공.

나의 배트가 불을 뿜었다.

따악!!

[Kang 쳤습니다!! 우측 라인을 따라 흐르는 타구!! 마크 캇세이 달려갑니다!!]

[1루 주자 헨더슨 2루 지나 3루로. 어? 헨더슨 3루 지나 홈까지!! 홈에서!!!]

“세이프!!”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그 사이 Kang은 무사히 2루에!! 1회 말 Kang의 적시 2루타. 1:0 메츠가 경기를 앞서 나갑니다.]

피네스 피처로 변신을 꾀하는 파워 피처는 많았다. 하지만 그것에 성공하는 이는 결코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종종 착각하곤 한다. 빠르고 강한 공을 던지는 것은 재능이지만 제구력은 노력의 산물일 것이라고.

아니다.

강한 공을 던지는 능력에 못지않게 제구력 역시 재능의 영역이었다. 페르난데스의 공은 코너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그나마 구위는 잃었지만, 구속은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점 정도가 페르난데스가 던진 공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그 구속이 아니었다면 그는 개막전 1회부터 피홈런을 경험해야 했을 것이다.

[타석에는 4번 마이크 피아자, 마이크 피아자 선수가 들어옵니다.]

[지난겨울 메츠의 프랜차이즈 기록을 큰 폭으로 갱신하며 7년 9천만 달러의 연장계약에 합의한 마이크 피아자 선수입니다. 연평균 1,300만 달러의 거액인데요. 케빈 브라운의 1억 달러에는 미치지 못하는 액수입니다만, 그래도 상상하기 힘든 거액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하, 저희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액의 연봉이군요. 이거 30년만 늦게 태어날 걸 그랬습니다.]

페르난데스의 세 번째 공에 마이크 피아자의 배트가 돌아갔다. 유격수의 키를 훌쩍 넘기는 안타. 3루 코치의 팔이 힘차게 돌아갔다.

‘젠장!!’

사력을 다한 질주.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쭉쭉 뻗어 나가야 할 몸을 누군가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괜찮을까?’

전신의 근육이 요구하는 산소에 맞춰 격렬하게 뛰는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2루에서 홈까지. 약 60미터의 거리. 8초도 되지 않는 그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플로리다 브루스 어반 선수!! 공을 잡아 그대로 홈으로!!]

어김없이 절반 넘게 홈 베이스를 가로막고 서 있는 포수의 모습이 보였다. 대지에 단단히 뿌리박은 마이크 레드몬드. 늦은 나이에 데뷔해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플로리다의 주전 포수였다.

콰앙!!

슬라이딩은 없었다. 나의 어깨가 보호장구로 둘러싸인 레드몬드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단단하게 버티고 서있던 레드몬드의 몸이 나뒹굴었다.

“세이프!!”

[와우!! Kang의 강력한 보디체크에 레드몬드 선수가 밀려났습니다. 밀려난 위치도 좋지 않군요. 레드몬드 선수 홈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Kang 선수답지 않은 플레이에 마이크 레드몬드 깜짝 놀란 표정입니다.]

[작년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Kang이 이렇게 몸으로 뚫고 나간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Kang은 소극적인 슬라이딩으로 상황을 타개하곤 했었죠. 다른 선수와의 충돌을 꺼리는 모양새였는데, 이번 겨울 동안 그 부분을 교정한 것 같습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바닥을 나뒹구는 레드몬드를 뒤로한 채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덕아웃에서 헨더슨과 프레스톤을 비롯한 선수들이 다가와 나의 등을 두들겼다.

“잘했어!!”

“매일 계집애처럼 굴더니, 이제야 좀 사내답네.”

다른 선수와의 접촉이 거북한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작년 내가 포수 태클을 하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자와 포수가 홈에서 싸우는 것은 무려 100년이 넘게 이어져 온 전통이었다. 홈 충돌 방지 규정이라는 말랑말랑한 규정이 생기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메이저리그 포수들 대부분은 주자의 태클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준비가 되어있었다. 반면 나는 그런 포수들의 수비를 뚫어낼 피지컬이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비록 홈까지 도착하는 시간은 길어졌지만 대신 홈플레이트를 막아서는 포수를 날려버릴 무게를 얻을 수 있었다.

1회 말, 1타점 2루타. 그리고 1득점.

경기가 이어졌다.

플로리다의 투수들을 대표해 개막전 마운드에 오른 페르난데스를 우리 팀의 타자들이 연신 두들겼다. 존 올레루드, 로빈 벤추라, 프레스톤 윌슨. 올 시즌 우리 팀의 타선은 그 어느 타선에 뒤지지 않는 강력함을 자랑했다.

그리고 오늘 경기 우리 팀의 마운드를 지키는 투수는 알 라이터였다. 작년 17승 6패 ERA 2.47이라는 올스타급 활약을 보였던 그는 33살이 된 올해도 그 기세를 잃지 않았다.

4회 말, 알폰조에게 안타를 허용한 페르난데스가 마침내 마운드를 내려갔다. 2아웃 주자 1, 3루. 마운드에 플로리다의 어린 투수가 올라왔다.

“어?”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마운드에 새로운 투수가 올라옵니다. 브렌튼 빌링슬리. 작년 더블 A와 트리플 A에서 활약한 선수입니다.]

[21경기에 선발로 출장해서 121.1이닝 ERA는 4.47을 기록했군요. 눈에 띄는 성적은 아닙니다만 저맘때의 선수 기량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법이니깐요. 한번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작년 AA 빙엄턴 메츠의 개막전에서 상대 팀인 포틀랜드 시독스의 선발로 출전했던 브렌튼 빌링슬리였다. 제법 괜찮은 공을 던지는 투수였지만 멘탈이 좋지 못했던 거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난 1년 내가 성장한 만큼 녀석 역시 성장했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다면 빅리그에 올라오지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작년 나쁘지 않은 성적 덕분일까? 개막전인 오늘 우리의 홈구장 셰이 스타디움은 빈자리 없이 꽉 들어찬 상황. 45,000명이 내뿜는 기세가 마운드의 빌링슬리를 압박했다. 하지만 작년 플로리다 리그 개막전에서 사색이 됐던 것과 달리 오늘 빌링슬리의 표정은 평안했다.

초구, 바깥쪽 높은 코스로 날카롭게 날아드는 빠른 공.

‘빠졌어.’

아슬아슬한 코스로 보이긴 했지만 분명 존 밖으로 벗어난 공이었다. 나의 배트가 멈춰섰다. 살짝 눈을 돌려 심판을 바라봤다. 올라오지 않은 손. 볼이었다.

볼카운트 1-0. 빌링슬리의 손에서 두 번째 공이 흘러나왔다.

비슷한 코스, 하지만 더 안으로 들어오는 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의 손이 멈춰섰다.

뻐엉!!

‘좋았어.’

작년 나를 고생시켰던 슬라이더였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기 힘들었던 슬라이더. 하지만 지난 1년. 메이저의 놀라운 투수들과 부대끼며 쌓아온 경험이 나에게 이야기해줬다. 지금 빌링슬리가 던지는 공은 슬라이더라고 말이다.

볼카운트는 2-0. 슬슬 빌링슬리의 표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역시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개막전 원정 마운드 2구 연속 볼은 그의 멘탈로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인 듯싶었다.

‘그렇다면 편하게 해줘야지.’

제3구. 빌링슬리의 손에서 공이 빠져나왔다. 체인지업이다. 대체 어떻게 저렇게 확연히 티가 나는 체인지업을 완전무결하다고 착각했던 것일까? 바깥쪽 코스로 날아드는 그의 체인지업을 향해 나의 방망이가 빠르게 돌아갔다.

따악!!

아쉽게도 지난 1년. 더 성장한 쪽은 내 쪽이었던 듯싶었다. 우측 담장을 훌쩍 넘어가는 큼지막한 대형 홈런. 관중석의 관중들이 끓어올랐다. 오늘 경기의 승패가 완벽하게 갈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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