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유명세(1)
플로리다와의 3연전, 그리고 직후 이어진 몬트리올과의 4연전이 끝났다. 7번의 시합 모두 선발로 출전한 나는 기대 이상의 놀라운 성적을 기록했다.
33타석 31타수 11안타 2홈런 1볼넷 1희생플라이.
0.355/0.375/0.710.
커리어 두 번째 이주의 선수가 따라온 것은 기본이었다.
-강진호 시즌 54홈런 페이스!!-
몬트리올과의 3차전 두 번째 홈런을 기록했을 때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스포츠 일간지의 머리기사 제목이었다. 뭐 일간지들이 늘 그렇듯 팔아먹기 위한 과장된 기사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올 시즌 나의 타격이 범상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자, 하나만 더!!”
끄응!!
“O.K 오늘은 여기까지.”
“어? 벌써?”
그리고 그 범상치 않은 타격의 근원은 결국 파워였다. 몸에 힘이 붙은 만큼 타구의 질이 좋아졌고 타구의 질이 좋아진 만큼 BABIP은 상승했다. 그런 만큼 그 힘의 근간이 되는 근력운동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시즌도 시작됐으니 훈련의 양은 이정도면 딱 적당해.”
“몸이 아직 덜 풀린 것 같은데.”
“그 정도가 딱 적절해. 아직 시즌 초반이라 힘이 남아돌아서 그런 거야. 시즌이 흐르다 보면 이정도 운동에도 헉헉거릴 시기가 올 테니깐, 쉬라고 할 때 기분 좋게 쉬어두라고.”
원정 6연전을 앞두고 주어진 하루의 휴식일. 40분간의 운동이 끝났다.
‘뭘 하지?’
본래 훈련으로 보낼 생각이었기에 제법 긴 시간이 붕 떠버렸다. 돌아온 이후 오직 야구에만 몰두해서 보냈던 터라 특별히 취미라고 할만한 것도 없었다. 또한, 가장 최근에 만났던 여자인 비다 게라의 경우 내가 미국에 돌아올 때 즈음 돌아올 것이라는 말과 달리 아직도 유럽에 머물고 있었다. 뭐, 연락도 잘 되지 않는 것이, 유럽에서 좋은 일자리를 구했던지, 아니면 좋은 남자를 만났던지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예상됐다.
‘가볍게 영화나 한 편 보면서 쉬어야겠다.’
가리비아가 구매해다 둔 DVD 플레이어를 TV에 연결했다.
‘은근히 얼리어답터라니깐.’
아무거나 골라잡아 집어넣은 DVD는 2017년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태의 미국을 배경으로 거유의 금발 여배우가 튀어나와 활약하는 팝콘 무비였다. 딱히 내용이랄 것도 없이 여배우의 흉부만이 아주 훌륭하게 강조되는 영화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한참 절정의 미모를 과시하는 여배우는 아름다웠고 간단히 시간을 떼우기에는 심오한 내용의 고상한 영화보다 이런 싸구려 영화가 더 어울렸다.
물론 2017년의 미국이 저렇게 황폐화된다는 상상력은 실제 그 시대를 경험한 내 입장에서 조금 웃긴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
몬트리올 엑스포스. 훗날 워싱턴으로 건너와 워싱턴 내셔널스가 되는 이 팀은 현재 시점에서 토론토와 함께 둘밖에 되지 않는 캐나다 소속의 메이저리그 팀이었다. 그리고 캐나다에 위치했다는 것은 몬트리올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기본적으로 몬트리올은 메이저리그 30개 팀 중에서 시애틀과 함께 가장 긴 이동거리를 자랑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선수들의 컨디션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는데, 시즌 막판으로 갈수록 떨어지는 그들의 승률이 그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몬트리올이 캐나다 소속의 메이저리그 팀이라서 얻는 불이익은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세금.
몬트리올 엑스포스가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함께 가진 가장 큰 불이익은 바로 미국에 비교해 높은 캐나다의 세율이었다. 몬트리올이 좋은 선수들을 잡기 위해선 그 세금만큼의 연봉을 더해줘야 했지만, 초대형 FA계약을 맺는 선수에게 2~3%의 세율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캐나다에서 야구의 인기는 그리 높지 않았고 몬트리올은 리그에서 손에 꼽을 만큼 가난한 구단이었다.
[몬트리올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벌어지는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뉴욕 메츠의 경기 1차전.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칼 파베노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왔습니다.]
[직전 원정에서 1승 3패의 성적표로 돌아온 몬트리올. 하지만 원정과 홈은 또 다르거든요. 오늘 경기 몬트리올도 충분히 해볼만 합니다.]
[맞습니다. 아무래도 여러 가지 부분에서 원정 경기는 불리한 법이니깐요.]
몬트리올의 마운드에 칼 파베노가 올라왔다. 작년 메이저 1년 차에 24경기 6승 9패. 하지만 ERA는 4.21로 어지간한 팀의 2,3선발 급의 활약을 보여줬던 좋은 투수였다. 나이는 만 23세. 아마 이대로 꾸준히 좋은 성적을 기록한다면 3~4년 뒤 몬트리올이 아닌 다른 팀에서 뛰게 될 확률이 높은 투수였다.
뻐엉!!
우리 팀의 선두타자로 타석에 선 것은 홈 7연전 막판 즈음에 체력적으로 조금 부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던 리키 헨더슨이었다. 하루 휴식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피곤을 완전히 떨친 것 같아보이지는 않았다.
[리키 헨더슨, 역시 공을 잘 골라내고 있습니다.]
[지난 시즌 무려 3할 8푼의 출루율을 기록한 리키 헨더슨 선수. 올 시즌 역시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눈은 쉽게 늙지 않는 법이니깐요. 아 헨더슨 배트 휘둘렀습니다!!]
[높게 뜬 타구. 이루수 윌튼 게레로가 잡아냅니다.]
좋은 코스의 공이었는데 헨더슨의 배트가 늦었다.
‘하루 휴식으로 안 되나 본데?’
스윙 자체가 좋지 않았다. 작년보다 한층 더 힘들어 보이는 헨더슨. 역시 저 나이의 선수를 휴식일이 하루 끼어있다고는 해도 8경기 연속 출장시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헨더슨의 뒤를 이어 Kang이 타석에 들어옵니다. 지난 주 Player of the Week를 수상했던 Kang!!]
[칼 파베노 선수와의 대결은 처음입니다만, 지난 주 몬트리올의 다른 투수들을 상대로 4경기 무려 5개의 안타를 기록했습니다.]
[개막 이후 7경기에서 11개의 안타 9개의 타점 그리고 7개의 득점을 기록하고 있군요. 그야말로 메츠 타선의 핵심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볍게 몸을 풀어주며 타석에 들어섰다.
‘어?’
평소와 조금 다른 풍경. 내외야 야수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수비 시프트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지금 보여주는 형태는 내가 메이저 데뷔한 이래 처음 보는 형태였다.
‘전진이 아니라 후진 수비?’
내 외야가 모두 뒤로 물러났다. 메이저에서도 손에 꼽히는 발을 가진 나였기에 의외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는 수비였다.
‘조금 감동인데?’
하지만 이것은 나의 발을 경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이것은 나의 발보다 장타력이 더 위협적이라는 표현이었다. 내야안타를 각오하더라도 큰 타구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 배트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달라진 것은 시프트만이 아니었다.
[칼 파베노의 까다로운 공!! Kang 쉽게 배트를 내밀지 않습니다.]
[저 선수 제구력이 뛰어난 타입이라고 보긴 힘든데, 오늘은 코스가 굉장히 좋습니다.]
집요하게 아슬아슬한 코스에 집착하는 공. 이건 단순히 삼진으로 나를 잡겠다는 의도가 아니었다. 설사 볼넷으로 출루를 허용한다 해도 좋은 공은 주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이었다.
시즌 초반 제법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대접을 받으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앞선 경기들에서 높은 타율과 장타율을 동시에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은 늘어난 파워, 그리고 운도 제법 큰 몫을 했지만, 투수들이 가진 데이터가 작년의 것이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좋은 공을 주더라도 기껏해야 단타, 혹은 나의 발을 이용한 2루타 정도를 예측했지만, 돌아온 것은 11개의 안타 중 2루타 1개 3루타 2개 홈런 2개. 0.710이라는 터무니없는 장타율이었다.
덕분에 나는 꽤 괜찮은 선구안을 가지고 있음에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볼넷을 기록했지만, 그것이 전혀 아깝지 않을 장타를 기록할 수 있었다.
‘뭐, 좋은 공을 안 주면 걸어 나가면 되는 거지.’
내가 단순히 공을 쳐내는 것에 욕심을 내는 타자였다면, 혹은 선구안이 그리 좋지 못한 타자였다면 무리한 스윙으로 타율을 까먹을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정도 공들은 충분히 골라낼만한 눈이 있었고, 나의 뒤에 서있는 타자들은 리그에서 가장 비싸고 화끈한 타자들이었다.
로빈 벤츄라, 마이크 피아자, 존 올레루드. 나의 뒤를 이어 타석에 들어서는 저 셋의 연봉만 더하더라도 올 시즌 리그에서 3번째로 연봉총액이 낮은 몬트리올의 팀 연봉보다 높았다.
뻐엉!!
[Kang이 칼 파베노의 다섯 번째 공을 골라내며 볼넷을 얻어냅니다.]
[꽤 까다로운 공이었는데 배트가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Kang이 자신의 존에 얼마나 강한 확신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배트를 내려놓고 1루로 걸어 나갔다. 확실히 장타율이 높은 타자를 상대로 장타를 허용하는 것보다는 볼넷을 각오하더라도 까다로운 공으로 승부하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다만 그들이 착각한 것이 있었다.
[어? 1루 주자 달립니다!!]
[마이클 바렛 공을 잡아 그대로 2루에!!]
“세이프!!”
[아, 늦었습니다. 도루 성공. 기습적인 도루!! Kang이 칼 파베노와 마이클 바렛을 상대로 2루를 훔쳐냅니다.]
[마이클 바렛 선수도 어깨가 나쁜 포수가 아닌데, 완벽하게 당했어요. 이건 투수의 피칭 타이밍을 정확하게 훔쳤다고밖에는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마이너 시절부터 내가 가장 높게 평가받던 툴은 장타나 컨택 등의 타격 관련 툴이 아니었다. 스카우트들이 나에게 가장 높은 평가를 내렸던 것은 수비, 어깨, 그리고 스피드였다. 그들의 말에 따르자면 나는 홈 베이스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위력을 드러내는 선수였다.
[올 시즌 워낙 화끈한 타격쇼를 보여주는 탓에 잊고 있었지만 이 선수 주루에 굉장한 강점을 가지고 있는 선수입니다. 작년 도루가 무려 54개로 리그 3위의 기록이에요. 아메리칸리그였다면 도루왕의 타이틀을 차지할만한 개수입니다. 와, 이거 말하고 보니 정말 무서운데요? 컨택, 파워, 주루, 수비, 송구까지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습니다.]
만족스러운 주루는 아니었다. 아마 좌완투수였다면 이렇게 깔끔하게 도루에 성공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나를 쉽게 출루시키면 안 된다는 인식을 박아넣기에는 충분한 플레이였다.
3회 초, 두 번째 타석. 칼 파베노는 나에게 볼넷을 허용하는 것을 각오하지 못했다. 6구째. 꽉찬 코스를 노리던 공이 중앙으로 몰렸다. 오늘 경기에서 보여준 공 중에서 가장 좋은 공이었다.
따악!!
내야의 키를 넘기는 깔끔한 우전 안타. 나의 발이 2루 베이스를 밟았다.
[1루 주자 헨더슨은 홈까지!! 타자는 그사이 2루를 밟습니다.]
[첫 번째 타석 볼넷으로 출루했던 Kang이 두 번째 타석에서 적시 2루타를 기록합니다!!]
몬트리올과의 원정 3연전 시리즈 스윕.
14타석 10타수 3안타 3볼넷 1희생 플라이 4타점 5득점 그리고 4도루.
그리고 개막전 이후 10경기 8승 2패.
포스트시즌으로 향하는 길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
“야, 진호!! 강진호!!!”
“어? 왜?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이야.”
“이거, 이거 봐봐.”
“뭔데?”
원정 9연전을 끝내고 돌아가는 비행기 안. 프레스톤이 나에게 호들갑을 떨며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 들려진 작은 책자. 인쇄상태가 좋은 걸 보니 주간지, 혹은 월간지 정도 돼 보이는 잡지였다. 잡지의 표지에 찍힌 사진에는 충실한 흉부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아주 바람직한 여성이 붉은 수영복을 입은 채 백사장을 달려가고 있었다.
“음, 좋네. 훌륭해. 근데 이게 왜?”
“아니, 사진만 보지 말고 기사를 좀 읽어봐 기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