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60화 (60/210)

# 60화.

유명세(3)

‘포심패스트볼, 커터, 슬라이더에 체인지업이라.’

비록 훗날 먹튀 계의 전설로 남는 마이크 햄튼이었지만 1999년의 그는 양대리그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단한 투수였다. 대기타석에 서서 공을 지켜보니 그 대단함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볼끝이 더러운 90마일 중반의 포심패스트볼, 그리고 그보다 3마일 정도 떨어지는 컷패스트볼. 슬라이더의 경우 88마일을 오갔고 78마일 전후로 형성되는 체인지업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단한 점은 그것들을 적절히 활용한 볼 배합과 그렇게 함으로써 나타나는 시너지였다.

따악!!

낮게 깔린 커터에 레이 오도네즈의 배트가 튀어나갔다. 결과는 2루수 앞 땅볼. 제법 발이 빠른 오도네즈였지만 도저히 살아나갈 수 없는 타구였다.

‘땅볼 유도 투수라 이거네.’

기본적으로 땅볼을 유도하는 투수들은 피안타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 피안타율에 비해 평균자책점을 굉장히 낮게 유지한다. 이는 땅볼이라는 것의 근원적인 속성이 장타로 연결되기 힘들다는 점, 그리고 병살유도가 많아진다는 점. 마지막으로 홈런이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즉 피출루율은 높지만 피장타율을 억제함으로서 실점을 최소화하는 셈이었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땅볼을 유도한다는 것은 결국 볼끝이 더러운 공으로 존의 낮은 쪽을 공략한다는 의미였다. 존의 낮은 쪽 공은 길게 팔을 뻗어 쳐야 하는 만큼 타격에 힘을 싣기 힘들고, 좋은 타구를 만들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높은 공과 비교해 공을 보고 대처할 시간 자체가 길어진다는 단점 역시 포함하고 있었다.

덕분에 마이크 햄튼은 투수의 가장 큰 미덕인 삼진 개수가 비슷한 수준의 투수들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그리고 거기서 땅볼 투수의 진짜 단점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삼진은 삼진 자체로 아웃과 직결되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땅볼은 땅볼을 유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내야수들의 긴밀한 움직임이 동반되야 했다. 즉, 리그 평균 이상의 내야수가 없다면 아무리 많은 땅볼을 유도해봤자 별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휴스턴의 내야진은 마이크 햄튼을 올 시즌 가장 강력한 투수로 손꼽히게 만들어 줄 만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1루의 제프 배그웰 같은 경우는 조금 부족했지만, 센터라인의 크레이그 비지오와 팀 보거, 그리고 3루의 빌 스피어스는 모두 평균을 훨씬 웃도는 수비능력을 보여줬다.

1, 2번 타자가 모두 땅볼로 물러났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두 타자가 연속 땅볼로 물러난 상황에서 메츠의 3번 타자 Kang이 타석에 들어옵니다.]

[바로 어제 경기에서도 3타수 1안타의 좋은 성적을 보여줬던 Kang 선수, 과연 마이크 햄튼을 상대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확률적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최근 기록에 의하면 Kang선수 1루까지 도착하는 시간이 평균 3.8초 정도 된다고 합니다. 좌타자라는걸 감안해도 굉장히 빠른 속도예요. 햄튼 선수가 땅볼을 잘 유도한다고 해도 충분히 1루까지 살아나갈 수 있을 겁니다.]

타석에 들어서기 전 가볍게 배트를 휘둘렀다. 부드러운 스윙. 완벽한 몸상태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리비아의 재촉을 받으며 미리 일어나 몸을 풀어둔 보람이 있었다.

[아, 지금 중앙 전광판에 잡히는 저 사람. 파멜라 앤더슨 아닌가요?]

[어? 맞는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파멜라 앤더슨.]

[와우, 파멜라 앤더슨이 셰이 스타디움을 찾았습니다. 이거 상당히 놀라운 일이로군요.]

[최근 파멜라 앤더슨이 몇몇 매체에서 메츠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고 들었습니다만, 설마 평일 낮경기를 직접 관람하러 올 정도인줄은 몰랐습니다.]

타석에 섰다. 마운드의 마이크 햄튼의 얼굴에서 무뚝뚝함이 묻어났다.

‘내가 완벽하지 못한 것만큼 햄튼도 마찬가지겠지.’

투수라는 족속은 기본적으로 무척이나 예민하다. 휴식일 자체는 같더라도 경기 시간이 평소보다 이르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비록 앞서 타자들을 잡아내는 걸 생각해보면 충분히 강력했지만, 작년 말 상대했던 랜디 존슨에게 비견될 정도인가를 생각해본다면 그건 아니었다.

마운드의 마이크 햄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초구 낮은 코스 빠른 공.

부웅!!

“스트라잌!!”

젠장, 괜찮은 코스로 들어오는 빠른 공이라 생각했는데,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였다. 확실히 수준 있는 좌완투수의 슬라이더만큼 상대하기 까다로운 공은 없었다. 포수에게 곧바로 공을 건내 받는 햄튼. 앞선 타자들을 손쉽게 잡아낸 만큼 좋은 분위기를 빠르게 가져가려는 속셈이었다.

끊어갈 필요가 있었다.

잠시 손을 들어 타석 밖으로 걸어 나왔다. 가벼운 심호흡. 그리고 옷깃을 털고 배팅 장갑을 조여 맺다. 몇 번의 연습 스윙. 햄튼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괜찮았다. 사소한 것이었지만 분명 기세를 끊고 가는 것에는 의미가 있었다.

다시 타석에 들어왔다.

[마이크 햄튼 선수의 초구 슬라이더에 완벽하게 속아 넘어간 Kang. 자 다시 Kang이 타석에 들어옵니다.]

[햄튼 제2구!!]

햄튼의 동작에 맞춰 나의 오른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의 체중을 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배트. 하지만 햄튼의 손에서 공이 떠난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체인지업!!’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이건 억지로 공을 쳐봤자 좋은 타구가 나올 리 만무했다. 물론 살아나갈 확률은 있다. 하지만 볼카운트는 0-1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세차게 돌아가던 나의 배트가 멈췄다.

뻐엉!!

완벽하게 뺏긴 타이밍. 하지만 아직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분명 마지막 순간 공은 더 떨어졌다. 충분히 볼 판정을 기대할 만했다.

[햄튼의 체인지업!! Kang이 배트를 잘 멈췄습니다.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는군요. 볼카운트 1-1.]

[Kang의 판단이 좋았어요. 역시 선구안이 상당히 뛰어난 선수입니다.]

세 번째. 바깥쪽으로 완벽하게 빠진 공을 흘려보냈다. 볼카운트는 2-1. 상황이 나에게 유리하게 흘렀다.

그리고 네 번째. 이전의 공이 완벽하게 빠진 것을 의식한 탓일까? 여전히 낮게 제구되긴 했지만, 중앙으로 상당히 몰린 공이 튀어나왔다.

‘이거다!!’

사실 낮은 코스의 공은 본래 치기 좋은 공이 아니었다. 괜히 지도자들이 투수들에게 낮게 제구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대의 타자들은 아직 적응하지 못한 낮은 공.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며 모든 약점은 보완되기 마련이다. 수십년 간 낮은 공이 주류가 돼버린 야구계에 적응하기 위해 타자들은 점점 낮은 공을 치기 쉬운 형태로 진화했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을 이제는 오지 않을 미래에 이미 경험했다. 비록 작년 초에는 메이저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운 컷 스윙에 연연했지만, 테드에게 자세를 교정받은 이후 나의 타격 메커니즘은 상당히 달라졌고, 올겨울 시즌을 통해 한층 더 본래의 자세에 가까워졌다.

나는 양대리그를 통틀어 낮은 공을 가장 잘 쳐 낼 수 있는 타자 중 하나다.

따악!!

긴가민가한 감각이 아니었다. 이건 확실했다. 방망이를 내리고 1루를 향해 천천히 달려갔다. 1루를 지나 2루로 가는 길. 포수석 뒤편 가장 좋은 좌석에 파멜라 앤더슨의 모습이 보였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 그녀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휴스턴과의 더블 헤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

오늘 우리의 선발은 마사토 요시이였다. 작년 일본에서 건너온 그는 20만 달러의 기본급 외에 87만5천달러라는 성과급을 받아내며 활약했다. 29경기 선발등판에 6승 8패. 비록 승패는 좋지 않았지만, ERA 3.93의 성적은 작년 형편없던 우리 팀의 선발진을 생각했을 때 감지덕지를 넘어 연봉 몇배의 활약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만 34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2년 500만 달러라는 준수한 계약을 끌어냈다. 마이크 햄튼이 더러운 볼끝의 빠른 공을 낮게 제구해서 땅볼을 만들어내는 유형이라면 마사토 요시이는 순수하게 포크볼 덕분에 땅볼의 비중이 높은 타입이었다. 게다가 포크볼 자체의 특성상 삼진 역시 적지 않은 투수. 다만 그 포크볼을 뒷받침해줄 다른 공들의 구위가 부족하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따악!!

좌중간을 향하는 강한 타구. 나의 몸이 빠르게 튀어 나갔다. 아슬아슬한 공이었다. 평소처럼 헨더슨이 좌익을 지키고 있었다면 맡겨도 괜찮을 만한 공. 하지만 오늘 더블 헤더 1차전의 좌익을 지키고 있는 것은 배니 아그바야니. 타격은 나쁘지 않았지만, 수비는 전형적인 코너 외야수 그 자체인 선수였다. 빠른시일 내에 조속히 일루수로 컨버전 하는 것이 팀을 위해 도움이 될 것 같은 수비 실력이라는 이야기였다.

30미터에 가까운 거리를 전력으로 달려 낙구 예상 지점에 도달했다. 가볍게 글러브를 들어 공을 손에 넣었다. 왼다리를 앞으로 향한 채 받아낸 완벽한 수비. 루상의 주자들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마이너 시절에도 종종 경험했던 일이었다. 달라진 것은 이곳이 메이저라는 사실 뿐이었다.

[Kang이, 정확하게 공을 잡아냅니다.]

[낙구지점의 예측이 정말 정확하고 빨랐어요. 보시면 아주 간단하게 잡아내는 것 같습니다만, 어지간한 중견수였다면 다이빙 캐치를 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공이었습니다. 골드 글러브를 받았던 작년보다도 한층 더 성숙해진 것 같습니다.]

[Kang의 어깨를 경계해서일까요? 휴스턴의 주자들 움직이지 않습니다.]

[작년 보살 개수가 무려 20개입니다. 애틀랜타의 앤드루 존스 선수, 플로리다의 마크 캇세이와 더불어 리그 공동 1위의 기록이에요. 게다가 Kang선수 같은 경우 작년 5월에 콜업된 만큼 출전한 경기 숫자가 가장 적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 선수 어깨가 얼마나 굉장한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좌익수인 배니 아그바야니의 수비 범위는 내가 어느 정도 커버해줄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요시이가 유도한 땅볼을 처리하는 내야수들이었다. 그리고 바비 발렌타인 감독은 가끔 짜증날만큼 오만하지만 그래도 그 똥고집이 지나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명장이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감독이었다. 마사토 요시이가 선발로 출전하는 더블헤더 1차전. 우리 팀의 내야진은 타격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글러브 하나만큼은 확실한 선수들로 채워져 있었다.

오후 4시를 조금 넘긴 시간. 12시 15분부터 시작됐던 경기가 끝났다. 9회 말 공격이 필요 없는 5:3 승리.

“수고했어. 오늘 아주 날아다니던데.”

“2차전은 좀 쉬엄쉬엄해도 괜찮을 거야. 내가 책임져 줄 테니까.”

어느새 출근한 헨더슨과 피아자를 비롯한 선수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직 5월 초, 그리 무덥지 않은 날씨였음에도 나와 프레스톤의 몸에는 끈적한 땀과 흙먼지가 엉켜 붙어 있었다.

“일단 좀 씻고 배 좀 채우고 올게요.”

“그래, 한 35분 정도 시간 있으니깐 천천히 하고 오라고. 아 라커룸에 타코 사다 뒀어. 우리 집 근처에 새로 생긴 가게인데 맛이 아주 좋더라고.”

“고마워요.”

야구는 축구나 테니스처럼 경기시간 내내 뛰어다니는 종목은 아니었다. 하지만 긴 시간 긴장을 유지하다 한순간 폭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그 나름대로 정신과 체력을 깎아 먹었다. 더군다나 오늘 나 같은 경우 정말 신나게 외야를 뛰어다녔다. 지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음, 이 타코 진짜 맛있는데?”

“넌 아침에도 그거 먹었다면서 그게 넘어가냐?”

“당연하지. 너도 어서 와서 좀 먹으라고.”

프레스톤 녀석이 올러루드가 사온 타코를 양손에 집어 들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자극적인 타코의 향기가 역하게 느껴졌다.

“난 별로 생각이 없는데.”

“네가 그러니깐 그렇게 살이 쭉쭉 빠지는 거야.”

“됐고, 난 이걸로 살 보충할테니 너나 많이 먹으라고.”

미리 준비해둔 에너지바를 씹어 삼켰다.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던 만큼 약을 먹는다는 마음으로 할당된 양만큼을 밀어 넣었다.

“그나저나, 오늘 2차전 투수 그 녀석 맞지?”

타코를 입안에 밀어 넣은 프레스톤의 표정이 진지했다.

“그 녀석? 아, 너 밀러한테 좀 약했었지?”

“넌 엄청 강했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나? 난 세인트루시 시절에 홈런 기록했었잖아.”

“쳇, 그건 그렇지만. 너도 그 전에는 엄청 붕붕 날려댔잖아.”

“에이, 원래 최근 전적이 제일 중요한 거지.”

2차전 선발 투수는 다름 아닌 웨이드 밀러. 재작년, 위로 올라가는 재능이 무엇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줬었던 만 22세의 어린 투수였다.

“그나저나 밀러가 벌써 메이저에 선발로 뛸 정도인가?”

“그 녀석 작년에 더블A랑 트리플A를 완전 박살 냈었다던데? 스프링 트레이닝 성적도 굉장했고.”

분명 내가 기억하는 바에 따르자면 밀러는 내년이나 돼야 메이저에서 쓸 만큼 숙성되는 투수였다.

‘흠,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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