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유명세(4)
오늘 두 번째 경기에 선발로 나서는 투수는 다름 아닌 ‘불독’ 오렐 허샤이저였다. 지난 88년 역사에 길이 남을 5경기 연속 완봉승+59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던 그였지만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다. 특히 1990년 당했던 어깨 부상의 후유증은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지난 4년간 125경기에 등판해 770.2이닝 56승. ERA 4.26을 기록했다.
발렌타인 감독은 그런 허샤이저를 제법 잘 컨트롤하고 있었다. 현재 메츠의 25인 로스터 중 13명이 투수로 이뤄진 것 역시 반쯤은 허샤이저에 대한 배려였다. 발렌타인은 종종 옥타비오를 여섯 번째 선발로 내세웠고 그를 통해 허샤이저의 휴식일을 챙겨주었다.
타코를 폭풍처럼 흡입한 프레스톤과 함께 덕아웃으로 향했다. 경기 시작까지는 10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 녀석이 멍청한 질문을 던져왔다.
“그나저나, 더블 헤더인데 마이너에서 누구 불러와야 하는 거 아니야? 1명 더 쓸 수 있는 상황인 거잖아.”
“뭐, 우리야 사실상 6선발로 로테이션이 돌아가고 있으니깐. 만약 올린다면 제일 부족한 외야수를 올리는 건데, 너 경기 뛰기 싫어?”
더블 헤더의 경우 예외적으로 26인 로스터가 허용됐다. 대다수 팀은 휴스턴이 밀러를 급하게 데리고 온 것처럼 마이너에서 선발 투수를 하나 보강하는데, 우리 팀의 경우 애초에 6선발에 가까운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기에 만약 보강한다면 외야수를 올리고, 나나 프레스톤에게 휴식을 부여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아직 20대 초반, 그리고 시즌이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체력적으로 부족한 점을 느끼기에는 너무 일렀다. 물론 아침에 조금 더 자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 마음 이상으로 경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그것은 올 시즌이 첫 풀타임인 프레스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객관적으로 나, 혹은 프레스톤의 실력은 올스타급에 근접해있었다. 마이너에서 뛰고 있는 그렉 보어가 딱히 나쁜 선수는 아니었지만, 팀의 입장에서도 최대한 우리가 뛰어주는 것이 이득이었다.
덕아웃에는 이미 많은 선수가 대기하고 있었다. 1차전 선발로 마운드에 올랐던 요시이 역시 아이싱을 칭칭 감은 채 덕아웃에 앉아있었다. 잠시, 승리에 대한 축하, 그리고 겸양의 말이 오갔다.
“자, 그러면 슬슬 준비해볼까?”
피아자가 포수의 장비를 착용했다. 헨더슨을 비롯한 야수들 역시 글러브를 끼고 그라운드로 걸어 나갔다. 불펜에서 걸어 나온 오렐 허샤이저가 마운드로 올라갔다.
[뉴욕 메츠 대 휴스턴 애스트로스. 더블 헤더 경기 2차전. 마운드에 오렐 허샤이저 선수가 올라왔습니다.]
[올 시즌 네 번째 등판이죠? 앞선 세 경기에서는 18.1이닝을 던져 총 7실점 3.8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패배 없이 2승을 수확했습니다.]
[커리어 통산 192승. 아마 이대로라면 올해 무난하게 200승을 달성할 듯싶습니다.]
오렐 허샤이저의 피칭이 시작됐다. 최고구속 91마일밖에 나오지 않는 40세 투수의 피칭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샤이저는 피해가지 않았다. 그는 불독이라는 별명답게 안타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덤벼들었다. 대부분이 존을 통과하는 과감한 공이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만 40세의 투수가 연간 200이닝을 먹을 수 있는 비결이었다.
따악!!
선두타자인 크레이그 비지오의 내야안타. 하지만 허샤이저의 표정에 당황은 보이지 않았다. 허샤이저가 침착하게 두 번째 타자 데렉 벨을 상대했다. 여전히 존으로 과감히 밀어 넣는 빠른 공. 이번에도 타자의 배트가 튀어나왔다.
따악!!
2, 3루 쪽으로 튀어나가는 빠른 타구. 타석에서는 팀에 마이너스밖에 되지 않지만 그라운드에서 그 마이너스를 만회할 만큼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는 레이 오도네즈의 수비가 빛을 발했다. 6-4-3 병살타.
곧바로 이어지는 제프 배그웰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했지만,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어지는 4번 타자 켄 캐미니티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허샤이저가 이닝을 마무리했다.
공수 교대.
웨이드 밀러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근 2년 만에 보는 밀러는 척 보기에도 많이 변해있었다. 한층 두꺼워진 팔다리, 그리고 사라진 여드름. 그러고 보니 녀석도 이제 한국 나이로 24살이었다. 대졸 투수의 1년 차나 마찬가지인 나이. 이제는 마냥 어린 유망주라고 보기 힘든 나이였다. 하지만 한 가지, 자신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 같은 그 눈빛, 그리고 자세만큼은 여전했다.
‘뭐, 어쨌든 메이저에서 통할 만한 재능은 재능이니깐.’
내 기억에 따르자면 밀러는 마이너 시절 기대받던 것처럼 사이 영 컨텐더 급의 리그 에이스로는 성장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팀의 프런트라인을 담당할 만큼은 포텐셜을 터트릴 것이다. 어깨 부상으로 조금 일찍 커리어를 마감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타석에 1번 타자 리키 헨더슨이 들어갔다. 바비 발렌타인의 관리 때문일까? 헨더슨은 만 40세라는 나이가 무색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냥 수치로만 보더라도 헨더슨의 OPS는 피아자와 나 다음으로 높았다. 심지어 타율과 출루율만 따진다면 팀 내 1위는 물론이거니와 리그 전체를 따져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성적을 기록 중이었다. 그보다 높은 네 명의 선수 중 세 명이 콜로라도 로키스의 선수로, 쿠어스 필드 구장 빨을 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성적이었다.
[타석에 리키 헨더슨 선수!! 어제 1차전 경기에서 3타수 1안타 볼넷 하나를 기록했습니다. 출루 기록도 무려 7경기 연속 출루에 그중 세 번이나 멀티 출루를 기록했군요.]
[마흔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활약입니다. 지금까지만 봤을 때 메츠가 그와 올해 연장계약을 체결한 것은 매우 성공적인 선택인 것 같군요.]
웨이드 밀러의 초구. 헨더슨의 배트가 움직이지 않았다.
“스트라잌!!”
심판을 바라보는 헨더슨.
‘이게 스트라이크라고?’
표정만으로도 헨더슨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헨더슨 정도 되는 타자의 어필은 심판에게도 상당한 압박을 줄 수 있었다.
‘확실히 아슬아슬하기는 했지.’
어차피 판정이 번복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이런 코스의 공에 스트라이크 콜을 하는 것을 조금은 망설이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마운드에 선 것은 이제 막 메이저 데뷔전을 치르는 루키였다. 헨더슨의 권위가 더 먹힐 수밖에 없었다.
마운드의 웨이드 밀러가 크게 와인드업했다.
부웅!!
허공을 가르는 헨더슨의 배트. 전광판에 99라는 숫자가 선명하다.
‘미친 99마일?’
복판에 몰리기는 했지만 99마일의 빠른 공이었다. 미리 준비돼 있던 데이터에 따르자면 녀석의 구속은 최대 98마일. 평균적으로 95마일 인근에서 형성된다고 했다. 정보가 잘못됐든지 아니면 최근 구속이 더 올라갔다는 의미였다.
‘근데 그런 것 치고는 앞서 던진 공은 92마일이었잖아. 아!! 설마 앞서 던진 공은 포심패스트볼이 아니었단 건가? 이거 꽤 까다롭겠는데.’
그리고 세 번째. 슬라이더. 우완투수인 웨이드 밀러의 슬라이더가 헨더슨을 유혹했지만, 헨더슨이 잘 참아냈다. 0-2의 카운트라고 믿기 힘든 침착함. 밀러가 똑같은 서식으로 네 번째 공을 뿌렸다.
딱!!
체인지업이었다. 헨더슨이 방망이를 억지로 가져다 댔다. 하지만 결과는 투수 앞 땅볼. 공을 주워든 밀러가 1루로 가볍게 공을 던졌다. 헨더슨이 1루를 향해 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아웃!!”
나의 타석이 돌아왔다.
[투수 앞 땅볼 아웃. 웨이드 밀러가 체인지업으로 리키 헨더슨 선수를 잡아냈습니다.]
[전체적으로 공이 몹시 훌륭합니다. 방금 체인지업 같은 경우도 헨더슨 선수의 타이밍을 완벽하게 뺏었거든요. 웨이드 밀러!! 과연 BA 리포트 우완 전체 2위에 랭크될 만합니다.]
[자 이어지는 2번 타자. Kang. 이 선수, 아까 낮 경기에서 마이크 햄튼 선수를 상대로 홈런을 기록했죠?]
[오프시즌 동안 몸을 착실히 키운 것 같습니다. 장타력이 말도 못 하게 좋아졌어요. 전체적인 플레이 스타일에 변화를 준 것 같은데 그게 아주 성공적입니다.]
[네, 제가 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작년 신인왕에 골드 글러브까지 수상한 선수가 오프시즌 동안 이렇게 더 성장해서 돌아왔습니다. 정말 대단한 워크에씩이에요. 사실 저 또래 선수가 저만큼 성공했는데 저러기는 쉽지 않거든요.]
과거 마이너 시절 녀석의 약점은 오만함이었다. 우완투수 주제에 좌타자가 간파한다면 그대로 행잉슬라이더가 돼버릴 백도어성 슬라이더를 아무렇지 않게 던져대는 오만함. 그 버릇이 그대로 유지 중이라면 더없이 좋을 일이었다. 하지만 올해 초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다는 걸 보면 그 버릇은 수정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마운드의 녀석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앞서 헨더슨의 타석을 지켜본 바에 의하면 제법 괜찮은 딜리버리였다. 끝까지 공을 쥔 손을 노출 시키지 않으려는 디셉션. 저 헨더슨이 속아 넘어갈 체인지업.
‘패스트볼의 구위도 만만치 않을 거야.’
천하의 헨더슨이 커트해내지도 못하고 헛손질을 했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공일 리 없었다. 녀석의 초구가 한순간 터져 나왔다.
나의 오른발은 이미 반쯤 튀어나간 상황. 90kg에 육박하는 무게의 이동이 배트에 실렸다. 몸쪽 코스로 빠르게 날아드는 공이 홈플레이트를 몇 미터 앞에 두고 미묘하게 변화했다.
‘커터?’
몸쪽으로 더 깊숙하게 들어오는 공. 하지만 이미 배트를 멈추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딱!!
1루 파울라인을 크게 벗어나는 공. 손바닥 전체가 얼얼하게 아려왔다. 아니 아픈 것은 손바닥 만이 아니었다.
‘젠장.’
배트 브레이커라는 별칭답게 나의 배트가 쪼개졌다. 전광판에 새겨진 숫자는 무려 93. 속구로 착각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커터였다.
덕아웃에 준비해둔 예비 배트를 꺼내왔다. 부러진 배트와 똑같은 무게, 똑같은 길이의 배트. 배트가 바뀌면 느낌이 다르다는 타자들도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렇게 예민하지 않았다. 새로 꺼내든 배트를 가볍게 돌려본 뒤 다시 타석에 들어왔다.
정말 대단한 코스, 대단한 구위의 공이었다. 이정도로 극한까지 몸쪽에 붙일 수 있는 배짱이라니. 어지간한 자신감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것도 무려 93마일짜리 커터를 말이다.
‘실력은 아닐 거야.’
하지만 웨이드 밀러가 이런 공을 의도적으로 던질 수 있다고 믿기는 힘들었다. 방금 이 공은 양키스의 코어 4. 그들의 수호신 마리아노 리베라의 그것에 필적할만한 공이었다. 애초에 이런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를 마이너에 두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아무리 리그에서 손꼽는 전력을 자랑하는 휴스턴이라 해도 말이다.
하지만 설사 그것이 운이라고 해도 그가 나의 배트를 쪼갰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볼카운트는 0-1. 웨이드 밀러가 두 번째 공을 뿌렸다.
최고 99마일의 속구 타이밍에 맞춰 나의 배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몸의 중심은 이미 이동한 이후였다. 녀석의 공은 아직 저 멀리 있었다.
‘젠장!!’
체인지업. 아직 늦지 않았다. 배트를 돌리던 몸통을 억지로 멈춰 세운다. 배트를 돌리기 위해 유기적으로 움직이던 근육과 관절이 갑작스러운 제동에 비명을 질렀다. 운동에너지를 얻은 배트가 자신의 방향으로 나가겠다 용트림했다. 하지만 녀석의 공이 느리다는 것을 눈치챈 타이밍은 빨랐다. 충분히 멈춰 세울 수 있었다.
뻐엉!!
뚝 떨어진 공이 존을 벗어났다. 배트는 다 돌아가지 않았다. 올라오지 않는 심판의 손.
‘됐어.’
그 순간 공을 받아낸 포수 토니 에우제비오가 미트를 들어 3루심에게 스윙 여부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