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유명세(5)
그 순간 공을 받아낸 포수 토니 에우제비오가 미트를 들어 3루심에게 스윙 여부를 물었다.
3루심이 고개를 젓는다. 다행이다. 볼카운트는 이제 1-1. 잠시 손을 들어 타석 밖으로 나왔다. 급작스러운 제동 탓에 몸 곳곳의 근육과 관절이 뻐근하다. 특히 방망이의 운동에너지가 만들어내는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낸 손목관절은 뻐근함을 넘어 욱씬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가리비아와 1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만들어온 몸은 고작 이정도에 상처 입을 만큼 약하지 않았다. 매일 꾸준히 이어온 스트레칭과 필라테스가 만들어낸 근섬유와 관절의 유연함이 이런 급격한 움직임으로 생길 수 있는 부상의 위험에서 나의 몸을 지켜냈다.
가볍게 손을 털고 몸을 진정시켰다. 평소의 루틴대로 옷깃을 털어내고 배팅 장갑을 조여 맺다.
‘헨더슨이 당할 만했어.’
99마일의 빠른 공을 던질 때와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 완벽한 자세였다. 나이를 먹어 둔해진 헨더슨의 순발력으로는 반응하기 힘든 공이었을 것이다. 다시 방망이를 움켜쥐고 타석에 섰다. 마운드의 밀러가 세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바깥쪽 체인지업 다음 이어지는 몸쪽 높은 코스의 빠른 공. 정석적인 조합이었지만 언제나 통용되는 강력한 조합이었다. 녀석이 제대로 몸쪽 깊숙하게 공을 찔러넣었다면 말이다.
따악!!
시원하게 돌아간 배트가 복판으로 몰린 빠른 공을 후려쳤다. 2, 3루간, 유격수의 키를 살짝 넘기는 타구. 휴스턴의 유격수인 팀 보거가 서둘러 공을 주워들었지만 한참 늦었다. 나의 발이 무사히 1루를 밟았다.
“세이프.”
[좌중간 안타입니다. 99마일 빠른 공을 Kang이 제대로 받아쳤습니다.]
[아주 조금 몰렸을 뿐인데 여지없이 받아치는군요.]
마운드의 녀석 얼굴에서 약간의 짜증이 읽혔다. 감정을 제대로 감추지 못하는 투수라니. 최근 능구렁이 같은 베테랑 선발 투수들만 상대하다 만난 이 젊은 피의 솔직한 표정이 너무 반가웠다.
세트 포지션.
밀러의 양손이 글러브 안에 들어갔다. 정지동작 직후 이어지는 피칭.
‘셋, 둘, 하나. 지금!!’
나의 몸이 2루를 향해 쏘아진다. 최대 99마일의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 그리고 포수인 토니 에우제비오의 어깨 역시 나쁘지 않다.
“세이프!!”
나의 왼손이 2루 베이스를 터치했다. 분노는 시야를 좁게 만드는 법. 감정이 흔들린 어린 투수의 타이밍을 포착하는 것은 너무 쉬웠다.
1아웃 주자 2루. 타석에 서 있는 타자는 마이크 피아자. 메이저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포수였다.
부웅!!
“스트라잌!!”
피아자의 고개가 잠시 갸웃했다. 그리고는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웨이드 밀러의 장점은 빠른 공이었다. 거의 동일한 자세에서 튀어나오는 체인지업이나, 괜찮은 변화를 보이는 커터 등도 훌륭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결국 빠른 공이라는 튼튼한 기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이크 피아자는 리그 최고의 강속구 투수들인 로저 클레멘스와 페드로 마르티네즈를 가장 잘 두들겨 팬, 강속구 킬러였다.
따악!!
[마이크 피아자 쳤습니다!! 큼지막한 타구!! 그대로 펜스를 직격합니다!!]
좌측 파울라인 아슬아슬한 곳으로 날아간 타구가 펜스를 두들겼다. 피아자의 큼지막한 2루타.
1:0
홈플레이트를 밟고 덕아웃으로 돌아가기 전 마운드를 잠시 바라봤다. 반쯤 넋이 나간듯한 웨이드 밀러의 얼굴이 보였다.
‘밀러,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걸 환영한다고.’
경기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
안타와 아웃. 그리고 진루타. 허샤이저가 이를 악물고 던진 그 공들을 휴스턴의 타자들은 차근차근 공략해왔다. 그리고 7회 초. 2아웃 주자 1, 2루. 오렐 허샤이저는 여전히 마운드에 서 있었다.
‘지금까지 4실점인가.’
다행히 오늘 팀의 타자들은 그를 매우 많이 도와주었다. 6회가 끝난 시점에서 무려 8점. 화끈한 득점 지원이었다. 물론 그 8점 중에는 허샤이저가 직접 만들어 낸 1타점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4점이나 앞서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진작 불펜 투수가 마운드로 올라왔을 것이다.
오른손으로 로진백을 집어 든 오렐 허샤이저의 눈 속에 타석에 지저분한 헬멧을 뒤집어쓴 타자 놈이 올라오는 것이 들어왔다. 허샤이저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젠장.’
크레이그 비지오.
휴스턴의 망할 이루수 놈이었다. 다저스에서의 말년. 허샤이저가 한창 몸이 좋지 않던 시절 떠오르기 시작했던 크레이그 비지오는 그가 잠시 아메리칸리그로 떠나있는 사이 내셔널 리그 최고의 이루수로 성장했다. 비지오의 나이 32살. 타자로서 절정에 다다른 시점이었다. 오늘 허샤이저가 그에게 허용한 안타는 무려 두 개였다. 그리고 비지오는 두 번째 안타로 무려 2타점을, 그리고 그 두 번의 출루를 모두 득점으로 연결시켰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이를 악문 허샤이저가 신중하게 투구 자세에 들어갔다. 최대한 낮게 제구 한 투심 패스트볼. 비록 90마일도 채 되지 않는 구속이었지만 작년 자이언츠에서 허샤이저에게 11승을 안겨줬던 공이었다.
뻐엉!!
“스트라잌!!”
노리던 곳보다 조금 더 밖으로 빠진 공이었지만, 결과는 좋았다. 초구 스트라이크. 허샤이저가 두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초구와 비슷한 코스로 낮게 깔린 채 날아드는 투심. 이번에도 비지오의 배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허샤이저의 시선이 주심에게 향했다.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쳇.’
볼카운트 1-1. 세 번째, 타자와의 승부에서 가장 중요한 세 번째 공이었다. 1-2 카운트에서는 제아무리 위대한 타자라 해도 1할 타자로 변하는 법이었다. 허샤이저가 조금 더 과감하게 안쪽으로 공을 찔러넣었다.
부웅
“스트라잌!!”
됐어!! 허샤이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삐거덕거리는 몸으로 던질 수 있는 가장 강한 공을 던진 보람이 있었다. 볼카운트 1-2. 이제 남은 스트라이크는 단 하나. 유인구를 요청하는 피아자의 사인에 허샤이저가 고개를 저었다.
지난 85년의 그 날 이후 그는 중요한 순간에서는 절대 피해가지 않았다.
“네게 불독이라는 별명을 주마. 허샤이저 네가 이 별명에 어울리는 모습만 보여준다면 넌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투수가 될 수 있다.”
비록 시간이 흐를수록 몸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지만, 허샤이저는 토미 라소다 감독의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물론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에게 불독이라는 이름을 안겨줬던 토미 라소다 감독은 늙었고, 라루사리즘이라는 새로운 이론은 허샤이저가 불태웠던 투혼은 혹사라는 이름으로 둔갑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오렐 허샤이저였다. 그가 마운드에 오른 것은 토미 라소다의 강요가 아닌 이기고자 하는 본인의 의지였고, 마흔이라는 나이에도 여전히 마운드에 오르는 것은 그가 아직 ‘불독’이라는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입은 여전히 메이저리그라는 최고의 무대를 물어 뜯고 있었다.
오렐 허샤이저의 네 번째 공이 날아들었다. 던지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 그가 던진 모든 공 중에서 가장 완벽한 싱커였다.
바깥쪽 낮은 코스, 가장 완벽한 무브먼트를 보이는 싱커. 비지오의 배트가 나오지 않는다면 루킹삼진일 것이고, 배트가 나온다면 내야 땅볼 아웃일 것이다.
타석에 서 있던 크레이그 비지오가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크레이그 비지오 쳤습니다!! 잘 받아친 공. 중앙 담장을 향해 날아갑니다!!]
[강한 타구!!]
본능적으로 등을 돌려 공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타구는 잡을 수 없다. 저 올스타급 이루수가 쳐낸 것은 오늘, 아니 어쩌면 올해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공이었다. 1루와 2루 주자, 그리고 타자까지. 모두 홈으로 들어갈 것이고 자신은 오늘 일곱 번째 실점을 기록한 채 강판당할 것이다.
‘젠장.’
하늘 높이 떠오른 공을 바라보던 그의 고개가 떨어졌다.
‘응?’
그런데 바닥을 향하던 그의 시선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잡혔다. 저 멀리 펜스 근처, 있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
크레이그 비지오의 배트가 돌아가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이건 넘어가는 공이다. 하지만 나의 몸은 이미 펜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젠장.’
마치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3시간 45분의 첫 번째 경기. 그리고 후반으로 접어드는 두 번째 경기. 나의 근육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의 머리는 지금 저 타구가 어디로 어떻게 넘어갈지, 그리고 내가 어디까지 가서 어떻게 하면 저것을 막을 수 있을지 너무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느린 걸음. 나의 머릿속 이미지대로라면 벌써 펜스 근처까지 도착해있어야 했다. 하지만 펜스까지는 아직도 다섯 걸음이나 더 남은 상황이었다. 괜찮았다. 미리 도착해서 뛰어 잡는 것보다 달리는 힘을 이용해서 강하게 뛰어오르는 것이 더 높게 더 멀리 뛸 수 있었다.
네 걸음, 세 걸음, 그리고 두 걸음. 나의 몸이 달려오던 힘 그대로 날아올랐다. 쭉 뻗은 왼손 글러브가 쫙 벌어졌다.
쾅!!
펜스는 부드러웠지만 달려오던 힘은 그 부드러움으로도 다 소화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몸 전체를 덮쳐 오는 얼얼한 충격. 하지만 괜찮았다. 공은 놓치지 않았다.
[Kang!! 슈퍼 캐치!!!]
[메츠의 외야수 Kang의 슈퍼 세이브!! 맙소사. 방금 보셨습니까? 거의 3.5피트는 뛰었어요. Kang의 놀라운 점핑 캐치!!]
[믿기지 않습니다. Kang이 크레이그 비지오의 홈런을 훔쳤습니다.]
[Kang이 또 다시 기록에 남을만한 수비를 보여줬습니다. 작년 골드글러브 수상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이렇게 증명합니다!!!!]
글러브의 공을 뽑아 높게 들었다. 저녁 경기. 셰어 스타디움에 모여든 3만여 팬들이 환호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성과 박수 소리. 한순간 펜스에 부딪혀 생긴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미친 놈!!!”
어느새 달려온 프레스톤이 나의 머리를 헝클였다. 귀신처럼 나타난 헨더슨 역시 거기 합류했다.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하나 둘씩 합류한 동료들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땡큐.”
불독의 감사 인사. 그리고 마스크를 벗어든 마이크 피아자가 말없이 엉덩이를 툭 건드린다. 이제 남은 것은 2이닝. 중부지구의 최강자 휴스턴을 상대로 한 스윕이 코앞이었다.
***
“얼마 전, 야구장을 직접 방문하신 게 굉장히 화제가 됐습니다.”
“아, 그거요? 그날 마침 낮 스케쥴이 비어있어서 찾아갔죠. 으, 그런데 괜히 갔어요.”
“경기가 별로 재미 없으셨나요?”
“아뇨, 경기야 엄청 재밌었죠. 무려 중부지구의 압도적인 1위 팀인 휴스턴을 상대로 우리 팀이 이겼는데요.”
“그러면 뭐 때문에······.”
“아니, 제가 시간이 없어서 더블 헤더 1차전 밖에 못 보고 나왔거든요. 그런데 맙소사 2차전에서 역대급 장면이 나왔잖아요. 어차피 못 볼 거였으면 이렇게 아깝지도 않은데, 그 장면을 아슬아슬하게 놓쳤다고 생각하니깐 너무 억울한 거 있죠.”
-뉴욕 메츠. 휴스턴과의 홈 3연전 스윕 달성!!-
-지난 30일 더블 헤더, 공수 양면에서 완벽하게 활약한 강진호!! 올 시즌은 MVP까지?-
-강진호 4월 이달의 선수 매우 유력? 경쟁자는 맷 윌리엄스, 새미 소사, 마크 맥과이어-
-VIP의 주인공 파멜라 앤더슨의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든 바로 그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