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63화 (63/210)

# 63화.

유명세(6)

기본적으로 프로야구 선수라는 직업은 대중에 노출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그 연예인들처럼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자신을 노출한다기보다 야구라는 스포츠를 사랑하는 팬들, 그중에서도 내가 소속된 팀에게 애정을 쏟는 팬들에게 노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몇몇 전국구급 인지도를 갖춘 선수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하지만 그런 선수는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당장 우리 팀에서 가장 잘나가는 마이크 피아자만 하더라도 캘리포니아나 뉴욕 쪽에서나 얼굴을 알아보지, 다른 지역으로 갈 경우 야구 팬이라고 해도 얼굴을 못 알아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 대륙은 넓었고 메이저리그 팀은 무려 30개에 달했으니, 설사 야구에 관심 있는 팬이라고 해도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선수가 아닌 다른 29개 팀 선수들의 ‘얼굴’을 기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작년 신인왕 수상자이자, 아시아인이라는 독특한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맨얼굴을 드러내고 공원을 달려도 나를 알아보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저거 그 사람 아니야?’

‘글쎄, 아시아인은 다 그게 그거 같아서.’

‘내가 몇 번 봤는데 맞는 것 같아. 그리고 아시아인이 저렇게 큰 경우는 별로 없잖아.’

하지만 무려 프라임 타임, 전국에 중계되는 토크쇼에서 최근 가장 핫한 섹시심볼이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선수라고 소개되는 순간 나의 인지도는 순식간에 전국구로 껑충 뛰어올랐다. 어딜 가건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1년 가깝게 나를 동양인 유학생으로 알고 있던 근처 식당의 웨이트리스도 그 방송이 나간 뒤 드디어 내가 야구선수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물론 이렇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처음 경험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스포츠 스타 중 하나였고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미국인들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아마 한국이었다면 저 사람들은 그저 나를 힐끔거리는 것이 아니라 다가와 악수하고 사인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여어 진호!! 이번에도 아주 제대로 한 건 했다면서.”

“뭐, 그럭저럭 이요.”

“계속 그렇게 열심히 하라고. 나중에 우리 팀에서 아주 돈을 다발로 싸 들고 데리러 가줄 테니 말이야.”

집 근처 공원 푸드트럭의 주인이자 양키스의 팬인 필립스 씨가 인사를 건네왔다. 작년 양키스와의 맞대결에서 조금 활약한 이후 나를 기억하고 있는 그는 내가 언젠가 양키스의 유니폼을 입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보다 우리 팀 경기나 좀 보러 오세요.”

“어휴, 양키스 경기 볼 시간도 없는데 메츠 경기라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필립스에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면 올 10월 즈음에 양키 스타디움은 조용하고 저희 셰어 스타디움은 붐빌 테니까 그때 보러 오시면 되겠네요.”

“푸하하하핫. 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네가 우리 MO를 제대로 상대해본 적 없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올 시즌 반지는 우리 팀이 가져갈 예정이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꿈은 일찌감치 접어 두라고.”

필립스의 이야기처럼 최근 양키스의 기세가 심상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작년 월드시리즈에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4:0 스트레이트로 눌러버리며 월드 시리즈 반지를 손에 낀 그들은 시즌 초 37경기에서 무려 26경기를 가지고 오며 시즌 113승 페이스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91년 이후 지구 우승을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1승 차로 따돌리며 동부지구 1위 자리를 수성하고 있었다.

“어쨌든 셰어 스타디움에서 월드 시리즈 하게 되면 우리 응원하러 오시는 겁니다? 약속하시는 거예요.”

“상대가 양키스만 아니라면 내 꼭 가서 응원하도록 하지.”

“O.K!!”

가볍게 조깅을 끝내고 돌아와 끈적해진 몸을 씻은 후, 가리비아가 준비해둔 음식을 섭취하고 구장으로 향했다. 구장에는 이미 제법 많은 선수가 도착해있었다.

“진호,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일찍 오기는. 평소보다 30분이나 늦게 왔구만.”

“어차피 오늘 출전도 없고, 훈련도 못 하잖아.”

그저께 있었던 휴스턴전의 점프 캐치가 문제였다. 약간 뻐근하긴 했지만 뭐 근육이 놀란 것 정도로 생각했는데 경기가 끝난 이후에도 뻐근함이 사라지기는커녕 쿡쿡 쑤시는 감각이 더 심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무실을 찾았고 구단 의사는 나에게 3일간의 휴식을 명령했다.

-Kang,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1차전 결장!! 이유는 가벼운 타박상으로 밝혀져.-

“하루 자고 일어나니깐 멀쩡해진 것 같은데. 이거 보라고. 쌩쌩하잖아.”

따악!!

어디선가 나타난 헨더슨이 나의 뒤통수를 찰지게 내리쳤다.

“악!! 헨더슨 씨!!”

“그런 사소한 부상이 나중에 고질병으로 자리 잡는 법이야. 그러니깐 젊을 때일수록 더 관리를 잘해주라고.”

“모처럼 헨더슨이 맞는 말을 하는 구만. 게다가 Kang 자네 어차피 지난 한 달 동안 한 번도 안 쉬고 전 경기를 소화했잖아. 하루 정도 쉬어줄 때도 됐어.”

헨더슨의 이야기를 허샤이저가 거들었다. 팀 내 최고참이자 메이저리그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선배들의 충고였다. 그저 알겠노라 조용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지난겨울, 대박급 계약이라고 할 만한 선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준척급 선수를 알차게 영입한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전력은 제법 올라온 상태였고 덕분에 덕아웃에서 지켜본 경기는 제법 화끈하게 재밌었다.

따악!!

[프레스톤 윌슨!! 프레스톤 윌슨이 시즌 1호 홈런을 기록합니다!!]

윌슨 녀석의 마수걸이 홈런. 필리스와의 1차전은 우리의 9:6 승리로 끝났다. 나의 자리를 대신한 배니 아그바야니의 수비가 영 좋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크게 흠잡을 곳이 없는 경기였다. 에러는 없었다. 하지만 아그바야니의 수비 범위는 너무 좁았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체력적으로 힘들 헨더슨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빨리 복귀해야겠다.’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다만 프레스톤 녀석은 본래 중견수로 뛰었던 녀석답게 제법 넓은 범위를 커버해주었다. 만약 녀석의 수비가 아니었다면 오늘 1~2점 정도는 더 헌납했을지도 몰랐다. 그것도 특별한 에러 없이 말이다.

***

“방송요?”

“네, 이번에 LA 원정 1차전 끝내고 저녁에 잠깐 시간 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파멜라 앤더슨 덕분에 한창 이름을 알리고 있는 상황에서 방송 섭외가 들어왔다. 그것도 심지어 전국구 방송인 Fox TV의 섭외였다. 자회사인 Fox Sports나 FX 정도만 되더라도 거절하기 힘든 제의인 마당에 Fox TV 라니. 물론 원정 경기 도중에 방송에 참가하는 것은 약간 빡빡했지만 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MLB는 결국 쇼비즈니스였고 이런 식의 홍보는 오히려 구단 차원에서 권장하는 바였다.

“언제나 그렇듯 간단한 토크쇼입니다. 20분짜리 방송이고 야구에 관한 질문 약간, 그리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파멜라 앤더슨에 관한 이야기도 좀 나올 것 같습니다.”

“끙, 파멜라 앤더슨에 관한 이야기라니. 솔직히 전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얼마 전에 봤던 영화 한 편이 전부인데 괜찮을까요? 지금이라도 드라마를 좀 찾아봐야 하나?”

“아뇨,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가셔도 충분할 겁니다. 오히려 야구를 하느라 TV를 볼 시간도 없었다는 식의 어필이 더 신선할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알고 마음의 준비는 해두도록 하죠.”

***

필리스와의 시리즈 2차전. 마운드에 10,000패 팀의 불운한 에이스이자 인간계 최강의 투수. 커트 실링이 올라왔다. 나중에 가서는 SNS로 인생을 낭비하는 인물 정도로 여겨지는 커트 실링이었지만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의 커트 실링은 그야말로 승운 빼고는 모든 것을 갖춘 투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고 98마일의 속구와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 적절한 체인지업 그리고 쓸만한 커브와 슬라이더를 갖춘 전천후 선발 투수. 9이닝당 평균 8.5개의 삼진과 2.2개의 볼넷. 커리어 통산 SO/BB(스트라이크아웃/볼넷)4.38. 라이브 볼 시대 1위의 이 기록은 그의 컨트롤이 얼마나 훌륭했으며 그 컨트롤을 통해 얼마나 공격적으로 경기를 운영했는지, 그리고 그 공격성이 효과를 발휘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증거였다.

오늘 경기 리키 헨더슨은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본인은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이었지만, 어제 평소보다 열심히 그라운드를 뛰어다닌 것을 고려한다면 오늘은 휴식을 취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뉴욕 메츠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2차전 경기. 어제 결장했던 Kang 선수가 타석에 들어옵니다.]

[지난 휴스턴과의 3차전에서 얻은 타박상 때문에 한 경기를 결장했는데요. 뭐 최근 감이 좋은 선수이니만큼 가벼운 부상과 한 경기 결장 정도에 영향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뭐, 제가 보기에도 몸놀림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군요.]

마운드에선 커트 실링의 인상이 사나웠다. 애리조나 시절 빅유닛과 함께 묶인 이미지가 강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2미터에 가까운 키에 체중만 100kg이 훌쩍 넘는 거구의 남자였다. 10인치 높이 마운드에 선 커트 실링의 덩치가 한 층 더 거대해 보였다.

‘몸 상태는 괜찮아.’

며칠간 쉬어야 한다던 의사의 호들갑과 달리 등에서 느껴졌던 뻐근함은 하루 푹 자고 일어났을 때부터 이미 느껴지지 않았었다. 경기 전 있었던 프리 배팅 역시 나쁘지 않았다. 아무래도 하루를 통째로 쉬었던 만큼 처음에는 약간의 이질감은 있었지만, 평생을 해온 배팅이었다. 금세 본래의 감각으로 돌아왔다.

초구. 오버핸드 쓰로우에 가까운 자세로 커트 실링이 공을 뿌렸다.

맹렬하게 들어오는 빠른 공. 중앙으로 살짝 치우친 나쁘지 않은 코스였다. 나의 배트가 강하게 움직였다.

‘쳇.’

1루 내야 관중석으로 향하는 타구. 큼지막한 파울이었다. 전광판에 찍힌 숫자는 96. 하지만 내가 느낀 구속은 그 이상이었다.

‘구위가 굉장하네.’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대는 공이었다. 게다가 내가 예상한 것보다 공 반 개? 아니 공 한 개 가깝게 높게 들어왔다.

그렉 매덕스, 랜디 존슨, 페드로 마르티네즈, 로저 클레멘스라는 메이저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으로 꼽을만한 투수들이 동시에 존재했기에 상대적으로 가려진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만약 다른 시대에 활약했다면 저 커트 실링 역시 시대의 지배자라고 불리기에 부끄럽지 않을 기량을 갖춘 것은 틀림없었다.

[커트 실링, 제 2구!!]

마운드의 커트 실링이 다시 한번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여전히 사나운 표정. 비슷한 자세. 아니 똑같은 자세였다. 하지만 느낌이 달랐다. 한층 더 빠르고 위협적으로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오른발이 크게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나의 무게를 실은 배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야!!’

한층 더 빠르고 위협적으로 느껴진 것 자체가 속임수였다. 오프스피드 피치. 체인지업!! 체인지업이었다. 반쯤 끌려 나오던 방망이가 멈춰섰다.

뻐엉!!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볼카운트 1-1.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큭. 젠장. 이거 의사가 영 돌팔이는 아니었나 보네.’

급격한 제동을 걸었을 때 느껴지는 정상적인 욱신거림. 그리고 그 위에 타박상을 입었던 등허리의 욱신함이 더해졌다. 잠시 손을 들어 타임을 요청했다.

부웅!!

가벼운 스트레칭. 그리고 연습 스윙.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타석에서 물러날 만큼의 대단한 통증은 아니었다. 그저 약간 신경에 거슬리는 수준의 아픔. 이정도 통증은 시즌을 치르는 타자라면 누구나 몸에 달고 가야 하는 수준의 통증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젓고 다시 타석에 들어왔다.

감히 자신의 체인지업을 간파했냐는 듯, 마운드에 커트 실링이 사납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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