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큰 물(1)
커트 실링의 공 중에서 슬라이더는 머리에서 지워도 괜찮았다. 다른 손 타자를 상대로 슬라이더를 쓰는 위험을 무릅쓸 만큼 그의 레퍼토리는 적지 않았다. 아마 몸쪽 빠른 공, 혹은 스플리터가 들어올 가능성이 컸다.
마운드의 커트 실링이 세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사납고 격렬하게 움직이는 그의 몸. 머리 뒤로 희끄무레하게 보이던 누런 공이 순식간에 튀어나온다. 빠른 공이었다. 나의 배트가 세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예상하는 것은 앞서 한차례 경험했던 포심패스트볼이었다. 1-1의 볼카운트. 저렇게 격렬하게 투쟁심을 드러내는 커트 실링이 유인구를 던질 것 같지는 않았다.
‘예상하는 것보다 한 개 정도 높은 코스로.’
의식적으로 더 높은 곳을 지정해 배트를 움직였다.
따악!!
찌르르. 손끝에서 시작된 묵직한 울림이 온몸으로 퍼진다. 공 한 개 정도 더 높은 곳을 노리겠다 의식했더니, 진짜 더 높은 곳으로 배트가 돌아갔다. 배트가 공의 상단을 강하게 후려쳤다. 한번 강하게 바닥을 찍고 삼루수와 유격수의 경계지점을 향해 굴러가는 타구. 커트 실링이 다급히 달려 나온다.
1루를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1루 베이스를 밟은 채 몸을 쭉 뻗어 미트를 치켜들고 있는 리코 브로그나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 1루 베이스까지 남은 거리는 상당하다. 브로그나의 몸이 움직인다. 설마 벌써 송구했다는 뜻일까? 이제는 정말 얼마 되지 않는 거리가 너무 멀다. 이대로라면 땅볼 아웃이다. 절망적인 상황. 하지만 1루 베이스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는다. 포기하기엔 이르다. 아직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의 눈에 들어온 브로그나의 움직임이 한층 더 크게 보였다.
‘떨어졌어.’
1루 베이스를 밟고 있던 브로그나의 발이 베이스에서 완전히 떨어졌다. 악송구. 너무 급하게 공을 던지려다 실수가 나온 게 틀림없었다. 가능하다. 브로그나는 이미 저 멀리 파울라인 밖을 달리고 있다. 나의 오른발이 1루 베이스를 밟았다. 속도는 늦추지 않았다. 왼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나의 몸이 2루를 향해 움직인다. 2루수인 마크 르위스가 자세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더 빨랐다. 나의 왼손이 2루 베이스에 닿았다.
“세이프!!”
[아, 메츠의 Kang이 2루를 밟습니다. 커트 실링 선수, 너무 무리한 송구였습니다. 차라리 자세를 가다듬고 침착하게 공을 던졌으면 어땠을까 아쉽습니다.]
[커트 실링 선수의 송구도 송구이지만 브로그나 선수의 반응도 너무 아쉽습니다. 이렇게 완벽하게 빠질 공은 아니었거든요. 침착하게 수습만 했어도 2루까지는 허용하지 않을 공이었어요.]
2루 베이스를 밟은 채 앞섶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운이 좋았다. 달릴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등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최소한 집중하는 순간만큼은 느끼지 못할 만큼 미약한 통증이라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경기가 이어졌다. 마운드의 커트 실링의 얼굴에서 투쟁심이 사라졌다. 자신의 송구 미스를 자책하는 것이었을까? 아니 그럴 리 없었다. 투수라는 종족 대부분은 근본적으로 에고이스트들이다. 선발 투수는 더욱 그러하며, 성공한 선발 투수 대부분은 에고이즘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저 커트 실링은 그중에서도 특히 대단한 에고이즘을 갖고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 이가 자신의 잘못으로 의기소침해질 리 없었다. 심지어 조금 전 플레이는 온전히 커트 실링의 실수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그렇다면 아마 저것은······.
‘투쟁심을 넘어 선 분노.’
흥분할수록 더 침착해지는 골치 아픈 성격. 어이없는 형태로 나를 2루에 보내버린 커트 실링의 피칭이 시작됐다. 한층 더 과격하고 한층 더 강렬해진 공들이 메츠의 타자들을 압박했다. 그리하여 나온 세 타자 연속 삼진. 분노를 먹이 삼아 한층 강해진 커트 실링이 마운드에서 포효했다.
커트 실링이 내려간 마운드. 작년 사이 영 6위. 메츠의 에이스 알 라이터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올 시즌 그가 보여주고 있는 퍼포먼스는 작년과 비교하면 조금 시들했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올해로 만 33세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에이징 커브에 따른 자연스러운 기량 하락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커트 실링과는 조금 다른 알 라이터의 피칭. 상대를 윽박지르기보다 살살 구슬리는 것 같은 알 라이터의 공들이 타자들을 막아섰다. 꽤 많은 안타가 나오기는 했지만, 점수로 이어지는 것은 많지 않았다. 특히 타석에서는 도움되지 않는 유격수 레이 오도네즈의 활약이 컸다.
팽팽하게 이어지는 경기.
사실 오늘 경기가 팽팽하게 이어진다는 것 자체가 커트 실링의 기량을 설명해주는 것이기는 했다. 세계 최초의 10,000패 구단 필리스와 우리 메츠 타선 간의 수준차는 꽤 컸다. 하지만 오늘 마운드의 커트 실링은 자신의 개인 기량으로 우리의 타선을 억제했다.
3회 말 1사 주자 없는 상황. 나의 타석이 돌아왔다.
[1사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는 1회 말, 원 히트 원 에러로 2루까지 진루했던 메츠의 Kang입니다.]
[정말 대단한 선수입니다. 물론 송구 에러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어지간한 선수라면 절대 2루까지 살아 나갈만한 공은 아니었거든요.]
[현재 리그에서 가장 뜨거운 선수 중 하나에요. 강력한 내셔널 리그 4월 이달의 선수 후보이기도 합니다.]
커트 실링의 얼굴에는 여전히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1회 말 투쟁심 넘치던 때보다 한층 더 살벌했다. 마치 나를 찢어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강렬한 시선. 그의 초구가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높은 코스로 날아드는 빠른 공.
‘빠졌어.’
일반적인 속구보다 공 한 개 가깝게 높게 들어오는 실링이었다.
뻐엉!!
역시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초구 볼. 좋은 시작이었다. 마운드의 실링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두 번째. 역시 빠른 공. 하지만 이번에도 존 밖으로 빠져나가는 공이었다.
‘이 구 연속 공을 뺀다고?’
바깥쪽으로 확실하게 빠지는 공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볼카운트 1-0 상황에서 유인구라니. 설마?
딱!!
늦었다. 들어온 것은 머릿속에서 지웠던 슬라이더.
타구가 1루 파울 라인을 크게 벗어났다. 여기서 설마 슬라이더라니. 기본적으로 슬라이더가 강력한 이유는 스트라이크인 척하는 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손 타자를 상대로 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다른 손 타자를 상대로 한 슬라이더는 볼인 척 하는 스트라이크. 일종의 블러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간파당했을 경우 그저 가운데로 몰린 느리고 밋밋한 공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도박 수였고 커트 실링 같은 다양한 레퍼토리를 갖춘 프런트라이너급 투수가 사용할 이유가 없는 공이었다.
‘진지하다. 이거네. 어지간히 기분이 상하셨나 봐.’
아마 단순히 안타를 허용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내가 자신의 송구 실수를 연상케 한다는 점이 더 클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지만 투수란 원래 그런 놈들이 하는 법이다. 그리고 커트 실링은 그중에서도 유별나게 특별한 돌아이였다.
볼카운트는 1-1. 커트 실링의 세 번째 공이 날아들었다. 바깥쪽 낮은 코스. 영 좋지 못한 공이었다. 나의 배트가 멈춰섰다.
‘제발.’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는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 그의 피칭이 흉폭했다.
‘이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체인지업이다. 평소보다 두 호흡 늦게 나의 몸이 움직였다. 맹렬히 돌아가는 야구 배트. 공을 뿌린 커트 실링의 눈빛이 흔들린다.
탁
‘망할!!’
구종은 맞췄다. 하지만 그것이 그대로 안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커트 실링의 서클 체인지업이 일으킨 더러운 변화가 스윗스팟을 피해갔다. 빗맞은 공이 3루 파울 라인을 넘어갔다. 볼카운트는 2-2. 커트 실링에게는 아직 한 번이, 그리고 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마운드의 커트 실링이 보이는 눈빛은 한 번의 여유를 가진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1회 말 체인지업을 흘려보냈던 내가 이번에는 아예 자신의 체인지업에 타이밍을 맞췄다는 것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다섯 번째. 커트 실링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스플리터.’
피칭 폼은 동일했다. 아직 손에서 공을 놓지도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커트 실링은 나에게서 삼진을 뽑아낼 작정이다. 그렇기에 지금 그가 던질 공은 스플리터이다. 앞서 피아자와 올러루드에게 삼진을 뽑아냈던 결정구였다. 마치 포심처럼 날아와 포크볼처럼 떨어지는 최악의 마구. 피아자와 올러루드에게 사용하는 것을 본 것 만으로는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보지도 못한 것 보다는 나았다. 커트 실링의 스플리터가 지나갈것이라 예상하는 궤적을 향해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배트에 힘이 실렸다. 깔끔한 팔로 스윙. 최소 내야를 넘어가는 좋은 타구가 터져 나왔다. 1루를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타구방향을 향해 등을 돌린 커트 실링의 자세에 다급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회 나를 향해 웃었던 행운의 여신이 얄궂게도 이번에는 커트 실링을 향해 미소지었다. 잘 맞은 타구가 좌익수 정면으로 향했다.
플라이 아웃.
1루 코치가 나의 엉덩이를 두들겼다.
‘젠장.’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타자라고 해도 잘 맞은 타구가 야수 손에 잡히는 것은 세금과도 같은 일이었다. 마운드의 커트 실링이 마치 완봉승이라도 한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두 번의 타석에서 1안타. 훌륭한 타자의 기준이 3할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두 번의 타석에서 안타 하나를 뽑아낸 나는 훌륭함이 넘치는 타자였다. 하지만 잘 맞은 타구가 이렇게 잡힌 것은 역시 찝찝했다. 그것도 나를 상대로 이상하게 의지를 불태우는 상대에게 당한 일이라 더욱 그러했다.
‘그래도 아직 최소 한 번은 남았어.’
덕아웃 난간에 기대서서 커트 실링의 공을 지켜봤다. 타순이 돌아갈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타자였다. 다양한 레퍼토리로 타자들을 농락하는 커트 실링이었지만 반대 손 타자인 나를 상대로 슬라이더가 봉인됐고, 내가 그의 체인지업을 본능적으로 알아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다음 타석 더 유리한 것은 나였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프레스톤이 멋지게 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어우, 젠장!!”
덕아웃으로 돌아온 프레스톤이 헬멧을 집어 던졌다. 벌써 두 타석 연속 스윙 삼진이었다. 그것도 마지막은 모두 체인지업에 당했다. 이해할만한 일이었다.
“야, 너 저 체인지업을 대체 어떻게 알아보는 거야?”
“말했잖아. 그냥 더 세게 던지는 것 같더라니깐.”
“아무리 봐도 똑같구만.”
프레스톤 녀석이 투덜거렸다. 이미 이전 타석에서 나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갔지만, 그로서는 도무지 알아볼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커트 실링의 체인지업을 구분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 이미 몇 차례 내가 덕아웃에서 그것을 구분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내 옆에 앉아있던 헨더슨 역시 나의 말을 알아들었다.
“둔한 놈은 어차피 못 알아보니깐, 그냥 정해놓고 휘두르라고 내가 말했잖아.”
“저 안 둔하거든요!!”
“아냐, 너 엄청 둔해.”
“이건 나도 헨더슨 씨 말에 동의.”
실제로 프레스톤은 선구안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가 훌륭한 타자로 남을 수 있는 것은 그의 타구가 매우 강하다는 점이었다. 강한 타구는 안타로, 그리고 장타로 연결될 확률이 높았다. 특정한 코스, 특정한 공을 정해두고 휘두르는 프레스톤의 배트는 분명 위협적이었다.
다만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구질, 그리고 완급조절과 강속구까지 모든 것을 메이저 일류 수준으로 갖춘 커트 실링은 프레스톤에게 영 맞지 않는 투수였다.
“그러길래 내가 이야기했잖아. 그냥 침착하게 끝까지 보고 빠르게 휘두르라니까.”
“그거야 피아자 씨니깐 가능한 이야기잖아요.”
팀 내에서 압도적인 스윙 스피드를 자랑하는 마이크 피아자가 대화에 참여했다. 그는 나나 헨더슨처럼 커트 실링의 체인지업을 구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커트 실링이 손에서 공을 놓는 그 순간까지 배트가 귀 뒤에 머무르는 그의 배트 스피드는 그 모든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물론 갑작스러운 스플리터까지 당해낼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만 떠들고 나갈 준비나 하라고. 오늘 점수도 못 내는 너희들 때문에 저기 알이 고생이 많잖아.”
헨더슨의 이야기에 등판일에도 예민함 대신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우리 에이스 알 라이터가 손을 휘휘 저었다.
타석의 에드가르도가 내야 팝플라이로 물러났다. 5회가 끝나는 시점까지 0:0. 타순은 벌써 두 바퀴를 회전 중이었다. 이번 공격을 잘 막아낸다. 그리고 3번째 타석에서 설욕한다. 그라운드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