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65화 (65/210)

# 65화.

큰 물(2)

6회 말. 9번부터 시작되는 타순.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고민했다.

0:0 상황 6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에이스를 타석에 세울 것인가, 아니면 대타를 세우고 7회부터 불펜을 동원할 것인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에이스를 마운드에 세우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 알 라이터가 0점 필리스의 타선을 막아낸 것이 순수하게 그의 공 때문이라고 보긴 힘들다는 점이었다. 열여덟 개의 아웃 카운트 중에서 삼진은 고작 세 개뿐. 잔루율 역시 상당했다. 야수들의 호수비를 참작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터진 행운이 아니었더라면 3~4점 정도는 내줬어도 이상하지 않을 피칭이였다.

더욱이 그의 투구수는 벌써 109개. 상당히 아슬아슬한 숫자였다. 문제는 에이스의 자존심.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있는 에이스를 마운드에서 내리기에 알 라이터가 투수들 사이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팀의 분위기는 발렌타인 감독 본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좌우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눈앞의 승리였다. 발렌타인 감독이 입을 열었다.

“프랑코 준비시켜.”

***

6회 말, 투수인 알 라이터를 대신해 내야 전천후 유틸 맷 프랑코가 방망이를 들었다. 빠른 발과 뛰어난 수비 센스를 갖췄지만 타격은 그리 훌륭하지 못한 맷 프랑코였다. 차라리 지금은 배니 아그바야니를 내보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발렌타인 감독의 의도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저 양반 성격은 더럽지만 그래도 선수들을 파악하는 능력 하나 만큼은 확실한 양반이니 말이다.

[6회 말 메츠의 공격. 알 라이터를 대신해 대타자 맷 프랑코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19경기에 출전해서 27타수 6안타를 기록한 맷 프랑코 선수입니다. 주로 대수비로 출전하곤 했는데 0:0 상황에서 대타자라니 조금 의외의 선택이로군요.]

6회 말. 이미 90개에 가까운 공을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커트 실링의 공은 여전히 빨랐다. 95마일을 넘나드는 빠른 공. 맷 프랑코의 왼손이 배트의 끄트머리로 향했다.

[기습 번트!!]

1루로 달려나갈 자세로 볼 끝에 슬쩍 배트를 가져다 대는 드래그 번트였다. 설마 투수타자를 내리고 올린 대타자에게 번트를 지시할 줄이야. 그러고보니 맷 프랑코는 팀에서 세 번째로 발이 빠른 타자임과 동시에 가장 번트를 잘 대는 타자였다. 반쯤 무너진 자세로 가져다 댄 배트였음에도 완벽하게 기세가 죽은 공이 바닥을 굴렀다.

“세이프!!”

서둘러 달려 나온 마이크 리버달이 공을 주워들었지만 늦었다. 이미 맷 프랑코의 발은 1루 베이스를 밟고 있었다.

노아웃 주자 1루. 나의 타석이 돌아왔다.

1루를 힐끔 바라보는 커트 실링. 기습 번트를 통해 맷 프랑코가 보여 준 주루 능력을 경계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투수가 주자를 신경 쓴다는 것은 타자로서는 매우 좋은 일이었다.

마운드의 커트 실링의 양손이 글러브에 들어갔다. 잠깐의 정지 동작. 1루의 맷 프랑코가 몸이 2루로 기울었다. 한 박자 빠르게 튀어나오는 커트 실링의 빠른 공. 이번에도 역시 높은 코스였다. 구속 자체는 조금 부족하지만 빠른 피칭 모션을 통해 부족한 구속이 보충됐다. 하지만 높았다.

‘빠질 것 같은데.’

돌아가던 나의 배트가 멈춰섰다.

“스트라잌!!”

스트라이크? 고개를 돌려 심판을 바라봤다. 심판의 표정이 단호하다. 잠시 손을 들어 타석에서 걸어나왔다.

‘왜 갑자기 이걸 잡아주는 거지?’

머릿속이 혼란했다. 오늘 주심인 베티슨은 27년 경력의 베테랑이자 공정한 판정으로 유명한 심판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번 경기 내내 그 명성에 걸맞은 훌륭한 판정을 내려왔다. 물론 그도 사람인 만큼 실수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런 뻔한 속구에 실수라니. 심지어 무사 1루의 제법 중요한 상황에서의 초구였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

‘아!!’

커트 실링은 빠질만한 코스로 공을 던졌고, 심판의 판정은 틀리지 않았다. 모순되는 이야기였지만 지금이 6회이고 1루에 주자가 나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설명이 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커트 실링의 구위가 떨어졌다.’

다른 투수들보다 공 하나 가깝게 높은 코스로 들어오는 커트 실링의 포심. 그 비결은 강한 악력으로 만들어내는 고회전, 그리고 90도에 가까운 오버핸드스로우였다. 하지만 90개에 가까운 투구 수와 주자를 의식하는 슬라이드 스텝이 그 궤적을 틀어놓았다. 덕분에 본래라면 아슬아슬하게 존을 빠져나가야 할 공이 존에 걸친 채 들어온 것이다.

‘반개? 아니면 반의 반개?’

미세한 차이. 어찌 됐건 중요한 점은 커트 실링의 구위가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타석에 섰다.

제2구.

마찬가지로 한 박자 빠른 동작이었다. 94마일의 빠른 공. 하지만 밋밋하다. 가장 익숙한 자세,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한점 망설임 없는 스윙에 커트 실링이 던진 속구가 제대로 걸렸다.

따악!!

1루의 맷 프랑코가 달리기 시작했다. 우중간을 가르는 강한 타구. 필리스의 우익수 바비 아브레유가 달렸지만 늦었다. 워닝트랙까지 날아간 공이 데구르르 바닥을 굴렀다.

전력을 다한 질주. 1루를 지나 2루로. 2루 베이스를 밟기까지 다섯 걸음. 3루의 주루코치와 눈이 마주친다.

‘달려!!’

3루 코치의 손이 세차게 돌아간다. 나의 몸이 왼쪽으로 기울었다. 오른발이 2루 베이스를 밟았다. 90도에 가까운 선회. 하지만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2루 베이스를 지나 3루까지. 미끄러지듯 들어가는 벤트 레그 슬라이딩. 마침내 나의 발끝이 3루 베이스에 닿았다.

“세이프!!”

거추장스러운 암 가드와 풋 가드를 벗는 사이, 3루 코치가 나의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주었다.

[6회 말, 노아웃 1루 상황에서 Kang의 적시 3루타!! 메츠가 1:0으로 경기를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제대로 받아놓고 쳤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깔끔한 스윙이었습니다.]

선수들이 달려 나와 맷 프랑코를 두들긴다. 그 뒤편 덕아웃에는 ‘역시 나는 명장이야.’라는 표정으로 바비 발렌타인이 앉아있다. 뭐, 그 지랄 맞은 성격을 생각한다면 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확실히 이번 대타는 적절한 한 수였다.

-뉴욕 메츠 강진호의 대활약으로 1:0 신승!!-

-강진호 적시 3루타!! 오늘 경기 메츠의 유일한 타점으로 기록!!-

-강진호 소포모어 징크스 따윈 없다!! 5월 식지 않는 불방망이.-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적절한 용병술에 답하는 강진호.-

-Kang. ‘마지막 순간 손목 힘이 부족했다. 파워를 더 기르고 싶다.’-

-커트 실링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특히 1회 말 수비에서의 에러가 치명적이었다.’-

***

야구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아무리 잘 하더라도 3게임을 하면 1게임은 지기 마련이고, 아무리 못하더라도 3게임을 하면 1게임은 이기기 마련이다. 순위를 가르는 것은 나머지 1게임이다.’

저것은 대체로 맞는 이야기였다. 만약 그 지구에 90년대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없다면 말이다.

필리스와의 3연전을 2승 1패로 마무리하고 LA로 떠나는 우리에게 날아든 것은 1경기 차이로 뒤지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역전 소식이었다. 물론 우리의 이동일에 브레이브스가 한 경기 더 치른 상황이었던 만큼 완전하게 역전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개막 이후 꾸준히 1위 자리를 지켜오던 상황에서 한순간이나마 그 자리를 뺏기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LA로 날아간 직후 시작된 원정 1차전. 다저스의 선발은 이즈마엘 발데즈. 95년 이후 매년 두 자릿수의 승리를 만들어 주는 제법 괜찮은 투수였다.

따악!!

[쳤습니다!! 마이크 피아자!! 강한 타구, 좌측 담장을!! 넘어갑니다. 시즌 12호 홈런!! 마이크 피아자가 또 다시 홈런을 기록합니다.]

[마이크 피아자의 연타석 홈런포. 대단합니다. 오늘 경기는 어떻게든 이기고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다저스에 이를 가는 마이크 피아자가 두 개의 큼지막한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홈런은 피아자로 그치지 않았다.

레이 오도네즈.

믿을거라고는 오직 수비뿐인 우리의 주전 유격수. 96년 데뷔 이후 0.242/0.276/0.289의 처참한 타격 성적을 기록 중인 그가 무려 홈런을 기록했다.

“오도네즈가 올해는 좀 일찍 쳤네?”

“그러게, 이거 어쩌면 기록 갱신 하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오도네즈가 매년 홈런을 1개씩 치는 건 과학이라고.”

시즌 1호 홈런이자 커리어 4호 홈런.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그를 모두가 진심으로 환영했다.

14:4 완승.

하지만 브레이브스 역시 승리를 기록했다. 여전히 0.5승의 승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지금 팀의 분위기를 생각해본다면 도저히 질 것 같지 않았다. 이대로 차근차근 승리해간다면 충분히 1위 자리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이다.

경기가 끝나고 간략한 인터뷰를 끝낸 후 차에 올라탔다.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는 아니었다. 나의 에이전트인 제프 보리스가 미리 준비해둔 승용차. 목적지는 LA에 있는 FOX TV의 스튜디오였다.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맷 헤질턴입니다. 오늘은 미리 예고드린 대로 아주 특별한 손님을 모셔볼까 합니다. 야구를 아는 분들에게는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소속 1998년도 신인왕 겸 골드글러브 수상자. 야구를 잘 모르는 분들에게는 파멜라 앤더슨의 그!! 아시아에서 온 섹시가이!! 뉴욕 메츠의 Jin-ho Kang입니다.”

스튜디오에 앉아있는 백여 개의 눈동자가 모여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긴장하기 충분한 상황. 하지만 평소 야구장에서 수만 명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나였다. 게다가 전국 방송과 지역 방송이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방송 경험 역시 처음은 아니었다. 긴장 따윈 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강진호입니다.”

당당하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푹신한 의자에 반쯤 파묻혀 잇던 맷 헤질턴이 일어나 나의 손을 잡으며 미소짓는다.

“어우, 이렇게 뵈니깐 왜 파멜라 앤더슨이 푹 빠졌는지 알 것 같군요. 겉모습만 봐도 섹시함이 뚝뚝 묻어나네요.”

“감사합니다.”

비록 심야방송이라고는 하지만 전국으로 중계되는 방송을 이끌어가는 사람다운 진행이 이어졌다. 야구를 잘 아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하지만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재미 없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그와의 대화를 통하는 순간 흥미롭고 신기한 이야기들로 탈바꿈했다.

한국에서의 이야기, 마이너 시절의 이야기. 그리고 메이저에 올라와 겪은 이야기들이 가볍게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에서 파멜라 앤더슨에 대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이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잘 알고 계시겠지만 최근 몇몇 매체를 통해 파멜라 앤더슨양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하고 있습니다. 혹시 파멜라씨가 직접 만나자고 한다면 만나 볼 의향은 있으신가요?”

“하하, 파멜라 앤더슨과의 만남이라니. 그런 미녀와 만나는 건 오히려 제 쪽에서 부탁드려야 되는 것 아닌가요?”

준비된 질문, 그리고 준비된 대답이었다. 하지만 맷 헤질턴의 반응은 약속된 그것과 조금 달랐다.

“오, 파멜라씨 들으셨나요?”

“네, 그런 부탁이라면 기꺼이 응해드려야죠.”

맙소사. 스튜디오 뒤에서 파멜라 앤더슨이 걸어 나왔다. 생글생글 미소 짓는 그녀. 평범한 복장에 평범한 걸음, 그리고 평범한 미소였지만 알 수 없는 색기가 뚝뚝 묻어나온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작은 꽃다발. 그녀가 나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방송 녹화 중이라 아직 못 들으셨죠? 4월 이달의 선수 수상 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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