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66화 (66/210)

# 66화.

큰 물(3)

“수고하셨습니다.”

중간 갑자기 난입한 파멜라 앤더슨은 탑클래스 연예인 다운 포스를 뽐내며 토크쇼를 휘어잡았다. 순식간에 바뀌어버린 분위기. 그녀의 작은 동작 하나하나에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진다. 비록 베이 워치에 출연하던 때보다는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그녀는 지금도 VIP라는 드라마의 단독주인공 롤을 담당하고 있는 인기 연예인이었다.

사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아무리 내가 요즘 화젯거리라고 해도 전국으로 송출되는 토크쇼의 게스트가 되기에는 상당히 부족했다. 어쩌면 방송국에서는 애초에 파멜라 앤더슨과 이렇게 하기로 미리 이야기를 끝내 놓은 상황이 아니었을까?

‘보리스씨는 이걸 몰랐던 걸까?’

개인적으로 몰랐을 확률이 더 높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프 보리스가 잘나가는 스포츠에이전트이기는 하지만 연예계 쪽은 좀 이야기가 달랐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리 기분 나쁜 만남은 아니었다. 농락당한 기분이라기보다는 깜짝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확실히 나한테 관심이 있어 보이기는 했어.’

하지만 아쉽게도 따로 약속을 잡거나 전화번호를 받아내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인터뷰 내내 이어진 분위기를 봤을 땐 내가 가볍게 한잔하자고 유혹하면 충분히 넘어올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아쉬움은 컸다.

하지만 스튜디오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총각이 처녀를 꼬시는 게 뭐가 문제인가 싶긴 했지만, 파멜라의 경우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이끄는 슈퍼스타였다. 이런 사소한 일들도 세간에는 크게 오르내릴 것이 분명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이 잘 풀려서 그녀와 데이트를 하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데이트와는 그 궤를 달리할 만큼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을 것이다.

조금?, 아니 많이, 그래 어쩌면 세계에서 제일 섹시한 여자라고는 하지만 시즌 중에 고작 여자를 만나는 일에 그렇게 많은 힘을 소모하고 싶지는 않았다. 데이트와 배트는 가벼울수록 좋은 법이었다.

시합을 끝내고 연달아 녹화까지 했던 탓일까? 호텔로 가는 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Kang. 도착했습니다.”

“으응? 고마워요.”

정신없이 잠들 수 있도록 훌륭하게 운전을 해낸 기사에게 이십 달러짜리 팁을 한 장 건넸다. 팁을 받아 든 기사가 누런 금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는다.

“오늘 운이 참 좋네요.”

응? 이십 달러면 분명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 차를 모는 기사에게는 큰 팁도 아닐 터인데 운이라니. 하지만 그런 나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

“응? 이게 뭡니까?”

“글쎄요, 파멜라씨의 스텝이라는 분이 전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그것은 잘 봉인된 작은 봉투였다. 운전기사의 표정이 밝은 걸 보니 이걸 전해주는 대가로 제법 두둑한 팁을 챙긴 모양이었다.

봉투 안에는 초대장이 들어있었다. 날짜는 내일 저녁. 숙소 근처 다른 호텔의 연회장에서 열리는 자선 파티의 초대장이었다.

‘흐음, 생각보다 더 적극적이네.’

***

찬화 선배는 96년 메이저 데뷔, 그리고 97년 첫 선발 풀타임 데뷔 이후 꾸준히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작년 같은 경우 7월 이달의 투수까지 수상할 만큼 대단한 활약을 보였기에 사람들은 올해 그가 얼마나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것은 다저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작년의 성적을 바탕으로 올해야말로 달려나갈 적절한 타이밍이라 확신했다. 또한 구단주 그룹인 오말리 가문이 루퍼드 머독에게 다저스를 매각한 것 역시 다저스구단으로서는 호재였다. FOX의 지배주주인 언론재벌 루퍼드 머독은 자신의 어마어마한 자금력을 이용하여 케빈 브라운이라는 리그 에이스급 투수를 영입한다. 그를 영입하기 위해 다저스가 사용한 금액은 무려 7년 1억 500만 달러. 메이저 사상 최초로 총액 1억을 돌파하는 금액이었다. 다저스의 화려한 돈잔치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명예의 전당급 외야수로 평가받는 37세의 노장 드본 화이트에게 무려 3년 1240만 달러를, 기존의 불펜인 제프 쇼와 카를로스 페레즈 등에게도 다년계약을 선물했다.

덕분에97년 겨울까지만 하더라도 메이저 전체에서 중간 정도에 머무르던 다저스의 페이롤은 98년 겨울 전체 5위로, 그리고 99 시즌이 시작할 무렵에는 4위로 뛰어올랐다.

FOX그룹, 그리고 다저스의 팬들은 모두 확신했다. 이번 시즌이야 말로 다저스는 비상할 것이다. 실제 시범경기 시즌 다저스는 다른 팀들을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며 돈질의 위대함을 증명했다. 하지만 4월 한 달의 정규 시즌이 지난 지금. 찬화 선배와 다저스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뻐엉!!

96마일 포심 패스트볼이 굉음을 내며 포수의 미트에 틀어박혔다. 타석에 선 리키 헨더슨이 가볍게 배트를 내려놓았다.

[제6구!! 빠른공!! 아, 리키 헨더슨이 침착하게 공을 골라내며 볼넷을 얻어냅니다.]

[오늘 Park의 제구가 좀 날리는 느낌이에요. 이럴 때일수록 조금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타석에 2번 타자. Kang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작년 내셔널 리그 신인왕이죠? 지금 마운드에 선 Park과는 같은 나라인 한국에서 온 선수입니다.]

마운드에 선 찬화 선배의 표정이 어둡다.

스프링트레이닝 때만 하더라도 새로 장착한 체인지업을 앞세워 승승장구했던 선배였지만 정작 정규 시즌에 들어온 이후 성적은 썩 좋지 못했다. 특히 지난 23일 있었던 세인트 루이스와의 경기에서 기록한 한 이닝 같은 선수에게 두 개의 만루홈런을 허용한 것은 메이저 역사에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확률이 매우 높은 대참사였다. 상식적으로 만루 홈런을 허용한 선발투수가 다시 만루를 채울 때까지 투수를 교체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6경기 26.1이닝 23실점 18자책 ERA 6.15.

찬화 선배의 초구가 그의 손을 출발했다.

따악!!

호쾌하게 돌아간 배트. 찬화 선배가 화급히 등을 돌렸다. 등에 적힌 61이라는 숫자가 선명하다. 1루에 서 있던 헨더슨이 천천히 2루로 달리기 시작했다. 깔끔한 우월홈런. 다저 스타디움 1층 외야의 중앙을 직격하는 홈런이었다. 다저 스타디움이 공기저항 때문에 비거리에서 손해를 본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메이저 데뷔 이래 내가 기록한 홈런 중 가장 큰 홈런이 아닌가 싶었다.

[Kang이 Park의 초구를 그대로 받아쳐 홈런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2점 홈런!! 1회 초 메츠가 다저스를 2:0으로 앞서 나갑니다.]

[바로 직전에 볼넷을 준 걸 의식한건지, 초구부터 공이 좀 몰렸어요. 이건 실투라고 봐야될 것 같습니다.]

오늘 마운드에 선 찬화선배의 공에서는 작년 우리를 압도하던 그 구위와 구속을 찾아볼 수 없었다. 최고 96마일의 공은 분명 메이저 평균보다 빠른 공이었지만, 단순히 빠르기만 한 저런 공은 마이너의 투수 중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오늘 마운드에 선 투수는 결코 메이저 레벨의 투수가 아니었다.

“저 녀석, 지쳤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작년에 220이닝이나 던진 녀석인데, 12월에 또 시합했으니 지치는 게 당연하지. 저 녀석 지금 공을 던질만한 상태가 아닌 것 같은데. 저러다 큰일 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로군.”

안타로 출루해 올러루드의 2루타에 홈을 밟은 피아자가 투덜거렸다. 다저스라면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는 피아자였지만 그가 싫어하는 것은 다저스의 운영진 쪽이었지 선수들이 아니었다.

피아자의 말처럼 찬화 선배는 지쳐 있었다. 투수에 비해 체력부담이 덜한 나조차도 지난 12월 경기를 치르고, 시범경기 시즌을 거의 다 날려 먹을 만큼 쉬어야 했다. 심지어 그 아시안 게임은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는 터무니없는 경기였음에도 그러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몇 번이나 전력을 다했던 찬화 선배는 본래라면 제법 길게 쉬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연봉조정 2년 차이자 올해 새로운 연봉협상을 앞둔 찬화 선배는 휴식 대신 훈련을 택했다.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강철로 만든 기계조차도 한계를 넘어서게 움직이면 부서지는 법이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이렇다 할 휴식 없이 달려온 찬화 선배의 몸은 정상적으로 경기를 치를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체인지업이라는 새로운 구종을 장착한 것은 좋았다. 한결 노련해진 커브 역시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모든 것을 지탱해줄 찬화 선배 최고의 무기인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5회 초 찬화 선배가 결국 마운드에서 물러났다.

2타석 1타수 1안타 1홈런 1볼넷. 스코어는 7:3. 경기는 이미 우리 쪽으로 잔뜩 기울었다.

찬화선배의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오른 것은 카를로스 페레즈. 작년 몬트리올에서 다저스로 트레이드되어 온 도미니카 출신의 파이어볼러였다. 작년 그의 성적은 11승 14패 ERA 3.59. 다저스에서의 성적만 따진다면 4승 4패 ERA 3.40의 준수한 성적이었다. 3년 1,700만 달러. 메이저에서 보여준 것이라고는 고작 3년, 33승의 기록밖에 없는 투수에게 주어진 것 치고는 과도한 금액이었다.

“젠장, 저런 녀석한테 연 600만 달러씩 줄 돈이 있는데, 나한테 그따위로 했었다 이 말이지.”

타석의 피아자가 배트를 휘둘렀다. 담장을 훌쩍 넘는 대형 홈런. 강속구 투수들을 두들겨 패고 다니는 피아자다운 타격이었다. 이어지는 타자들 역시 ‘오늘이야말로 날이다.’라는 느낌으로 맹타를 휘둘렀다. 물론 그 와중에 어제 시즌 1호 홈런을 기록했던 우리의 유격수 레이 오도네즈는 삼진으로 물러났다.

13:6 대승리. 마침내 브레이브스와의 승차가 사라졌다.

***

경기가 끝나고 기자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한국인 기자와 현지 기자의 비율은 반반 정도. 한국인 기자들 중에서도 평소 보지 못한 얼굴들이 매우 많았다. 아마 찬화 선배를 담당하는 LA지역 기자들인 듯싶었다. 작년 시합이 끝나고 나를 찾아온 기자들의 숫자를 떠올려 본다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

“강진호 선수, 오늘 박찬화 선수를 상대로 홈런을 기록하셨는데, 소감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최근 박찬화 선수의 부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부 전문가들은 아시안 게임 참가의 여파가 나타나고 있다고 이야기 하는데, 같은 아시안 게임 참가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국 기자들의 질문은 역시 찬화 선배와의 맞대결에 집중되어 있었다.

“별 생각 없이 휘둘렀는데,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10월까지 시즌을 치르고 제대로 쉬지 못한 채 12월 경기를 하는 것은 좀 힘든 일정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찬화 선배의 기량이 기량이니만큼 조만간 다시 좋은 모습을 보여주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지 기자들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들 역시 오늘 경기에 대해 질문하는 기자들이 많긴 했지만 몇몇 기자들의 경우는 어제 녹화했던 방송, 그리고 파멜라 앤더슨에 관해 질문을 던져왔다.

‘뭐야, 다저스 이 자식들 기자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이런 애들을 구장에 출입시켜 주는 거지?’

경기에 대한 질문에는 나름대로 성실하게 답했고,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답할 것도 없었다. 그냥 나의 팬이고 나에게 호감이 있는 관계에 불과한 파멜라 앤더슨이었다. 기자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야릇한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박찬화를 상대로 한 초구 대형 홈런 ‘휙 하고 휘둘렀더니 툭 하고 넘어갔습니다.’-

-데뷔 2년 차. 강진호 시즌 37홈런 페이스로 메이저 정상급의 기량을 뽐내다!!-

-강진호 ‘아시안 게임 후유증? 나와는 상관없는 일.’-

-아시안 게임을 통해 병역 혜택을 받아낸 강진호. 프로 선수들의 국제 경기 참가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밝혀······.-

-Kang. 파멜라 앤더슨과의 관계에 입을 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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