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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67화 (67/210)

# 67화.

큰 물(4)

특급 호텔에서 벌어지는 파티는 화려했다. 아프리카의 난민들을 위한 모금 행사라고 들었는데 당장 이 파티를 위해 사용되는 돈만 추렴하더라도 어지간한 아프리카의 마을 하나를 1년은 먹여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애초에 지갑을 열 수 있을 만큼 부유한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선 꼭 필요한 행위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여기 모이는 모든 이들이 단순히 돈을 기부하기 위해서만 모이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여기요.”

데스크에 오천 달러짜리 수표를 내밀었다. 함께 온 프레스톤 녀석이 상당히 놀란 눈치다. 잠깐 주저하던 녀석도 수표에 삼천 달러를 써서 내민다. 이제 막 메이저 풀타임 1년 차. 앞으로 몇 년은 더 최저연봉을 받아야 하는 녀석에게는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물론 나도 이제 고작 2년 차, 메이저리그 최저연봉자라고는 하지만 이런저런 추가수입이 상당한 나의 수입은 절대로 적지 않았다.

“괜찮겠어?”

“뭐 아직 계약금 받은 것도 좀 남아 있으니깐. 그보다. 야, 저기 좀 봐봐. 셰릴 크로우야!!”

“아 좀 촌스럽게 굴지 말자.”

프레스톤이 나를 붙잡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연예계 셀러브리티로 가득한 연회장의 풍경은 제법 유명한 메이저리거 아버지를 둔 프레스톤에게도 생소한 풍경일 것이다. 애초에 메이저리거라고 해도 아무나 이런 곳을 드나들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파멜라 앤더슨이 나에게 준 초대장은 1인을 동반할 수 있는 형식의 초대장이었다. 원래는 혼자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프레스톤 녀석이 어떻게 알았는지 가고 싶다고 나서는지라 함께 왔다. 뭐 계획대로라면 파멜라와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겠지만 만일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경우 혼자 뻘쭘하게 파티를 떠돌 가능성도 있었던 만큼 나쁜 선택은 아니라 생각했었다.

“야, 저기!! 미셸, 미셸 파이퍼다. 와우!!”

멀리 샴페인 잔을 들고 있는 미셸 파이퍼의 모습이 보였다. 영화 배트맨에 캣우먼 역할로 등장했던 헐리웃 스타. 이제는 마흔이 다되어가는 나이였지만 유명 여배우답게 서른 초반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미모였다.

“야, 우리 동물원 온 거 아니거든. 좀 조용히 있자.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하지만 프레스톤 놈을 데리고 오는 것은 상당히 나쁜 선택이었던 것 같았다. 이 녀석 자기가 아는 연예인이 보일 때마다 호들갑을 떨어댄다. 게다가 나를 초대한 파멜라 앤더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음식이야 나쁘지 않았지만, 고작 음식 좀 집어 먹고 유명연예인 얼굴 구경하자고 5천 달러나 낸 건 아니었다.

“응? 저 사람은?”

“왜, 또 아는 연예인이야?”

파티장의 한복판,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한 노인이 있다. 그리고 머리가 훤하게 벗겨진 그의 곁에는 훤칠한 키의 아시아계 여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연예인이라기에는 영 좋지 않은 외모. 하지만 프레스톤은 그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누군데.”

“루퍼트 머독?”

루퍼트 머독이라······. 분명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었다.

“잠깐만, 루퍼트 머독이면 그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

“어.”

맙소사. 전 세계 언론계에서 가장 파워가 강한 인물이자 LA다저스의 구단주, 뉴스 코퍼레이션 그룹의 회장 루퍼트 머독이었다. 좋지 않았다. 조금 전 우리가 박살 내고 나온 팀의 구단주라니. 그러고 보니 현재 다저스는 오말리 가문이 아닌 뉴스 코퍼레이션 그룹 산하 폭스 코퍼레이션이 소유하고 있었다.

‘근데 잠깐만, 어차피 저 정도 인물이 다저스 경기를 일일이 관전할 리는 없잖아. 게다가 우린 저 사람 입장에서 보면 송사리에 불과할 테고 말이야.’

잠깐의 당황. 하지만 생각해보니 루퍼트 머독 같은 거물이 우리 같은 1, 2년 차 선수들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더욱이 미국 내에서도 진보적인 캘리포니아 지역답게 파티에는 흑인과 황인의 숫자 역시 상당했다. 조용히 있다면 결코 눈에 띌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 연회장의 문이 열리고 선명한 붉은 빛 천으로 몸을 감싼 파멜라 앤더슨이 등장했다. 감춰진 부분만큼이나 드러난 부분이 많은 파격적인 드레스. 규격 외의 사이즈를 자랑하는 흉부를 감싼 천이 위태롭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시선을 잡아끌 그녀였다. 하물며 저런 드레스까지 걸쳤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Kang!! 일찍 와있었네.”

“안녕하세요.”

삽시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아, 쟤가 그 야구선수야? 파멜라가 최근 관심을 두고 있다는?’

‘뭐 생긴 건 괜찮네. 옆에 쟤도 꽤 괜찮은데? 쟤도 야구선수인가?’

‘글쎄, 아까 전부터 둘이서만 쑥덕거리고 있던데, 애인 아니야?’

‘파멜라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던데. 혹시 바이 섹슈얼인가?’

프레스톤 녀석의 시선이 파멜라의 흉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마치 눈으로 저 얇은 드레스의 아슬아슬한 가슴 부위를 벗겨내기라도 하겠다는 강렬한 시선. 슬쩍 녀석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녀석의 시선이 돌아온다.

“어머, 프레스톤 씨도 함께 왔네요.”

“헤헤, 네.”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는 것에 마냥 좋다고 웃어대는 프레스톤. 그때 누군가가 우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호, 파멜라 양 오늘도 여전히 아름답군요.”

“어머, 루퍼트 씨도 여전히 멋지시네요.”

“하하, 웬디 이 친구가 옷 보는 눈이 좀 괜찮아서 말이야.”

“회장님이 이런 류의 옷이랑 워낙 잘 어울리시는 덕분이죠,”

안 그래도 파멜라 앤더슨 덕분에 몰려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거에 우리에게 쏠린다.

“그런데 그쪽은?”

“어머, 제정신 좀 봐. 여기는 뉴스 코퍼레이션의 루퍼트 머독 회장님. 그리고 이쪽은 뉴욕 메츠의 Jin-ho Kang과 프레스톤 윌슨 씨에요. 지금은 LA에 원정을 와있답니다.”

“허, 야구 선수들이었구만. 반갑네. 루퍼트 머독이라고 하네.”

“진호 강입니다.”

“프레스톤 윌슨입니다.”

바로 조금 전 완벽하게 박살 낸 팀의 구단주와 만남이라니. 솔직히 말해 상당히 껄끄러웠다. 하지만 우리의 껄끄러움과 무관하게 그는 우리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루퍼트 머독은 파멜라와 가볍게 몇 마디를 나누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자리. 나와 프레스톤 둘이 있을 때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수많은 사람이 우리에게 몰려왔다.

누가 누군지 다 기억조차 하지 못할 만큼 많은 사람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나같이 야구에 관해서 관심이 있고, 우리의 이름을 들어봤다는 사람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 중에 야구에 관심이라도 있는 이는 한 줌에 불과하고, 나와 프레스톤을 알고 있던 이는 더더욱 얼마 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정신없이 칵테일을 마시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떠들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중간중간 나의 몸을 가볍게 터치하는 파멜라의 손길에 나의 분신이 슬금슬금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따로 나가서 한잔하자고 권유하고 싶었다. 문제는 상대가 어딜 가건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모으는 유명인이라는 점이었다. 상대방도 마음이 있는 것이 확실한데 진도를 나갈 수 없다니. 실로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파멜라와 함께 있었고, 프레스톤 녀석은 누구랑 눈이라도 맞은 것인지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잠시 일어나 호텔 로비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빈방이 없네요.”

“스위트룸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정말 남는 방이 전혀 없습니까?”

“네, 이미 최상층까지 전부 예약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죄송합니다.”

젠장, 설상가상의 상황이다. 과감하게 방으로 올라가 한잔 더 하자고 권하려 했건만 호텔에는 방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렇게 변죽만 올리다 끝날 모양인 것 같았다.

다시 돌아간 연회장. 자리에 앉은 나의 허벅지 위로 파멜라 앤더슨의 손이 슬쩍 올라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유혹이 확실하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호텔이라도 알아봐야 하는 건가? 잠깐 망설일 때 나의 허벅지 위에 올라와 있던 앤더슨의 손이 바지 주머니로 쑥 들어왔다.

‘읔!? 서, 설마 여기서?’

아쉽게도(?) 기대했던 그것은 없었다.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다른 이들과 대화를 이어나가는 파멜라 앤더슨. 나의 주머니로 들어왔던 그녀의 손이 금방 떠났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떠나간 자리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플라스틱 키.

그토록 애절하게 찾던 호텔 방의 키가 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여러분, 잠시만요. 일이 생긴 것 같네요.”

파멜라가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와 잠시 눈이 마주친다. 이건 천하의 멍청이라도 눈치챌 수밖에 없는 신호다. 미국 최고의 섹시 여배우가 대체 왜 평범하게 잘생긴 동양인 메이저리거에게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일 시합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이런 천금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기회를 걷어찰 수는 없었다.

41층

호텔에서 가장 좋은 프레지덴셜 스위트 룸은 아니었지만, 차상위 정도는 되는 커다란 방이 나를 맞이했다. 일박에 만 달러 가깝게 내야 하는 최고 수준의 방. 하지만 그런 방값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호화스러운 무언가가 방 안에 있었다.

어느새 갈아입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특별 주문된 것이 확실한 라지 킹사이즈 침대 위에 수영복을 입은 파멜라 앤더슨이 유혹적인 자세로 누워있다. 얼마 전 프레스톤이 보여 준 베이 워치에 나오는 바로 그 빨간 하이 레그 수영복. 드라마를 제대로 보지 않은 나였기에 그리 특별한 감흥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감흥이 없다고 해서 그 수영복의 섹시함과 그것을 걸친 파멜라 앤더슨의 색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몸이 내야 땅볼을 치고 1루로 달려갈 때 만큼이나 빠르게 침대로 향했다.

***

LA 다저스와의 3차전. 간신히 2시 미팅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까지 했음에도 거울에 비친 얼굴은 초췌해 보였다.

“여어.”

나보다 몇 분 늦게 프레스톤이 도착했다. 녀석의 잘생긴 얼굴에도 피곤함이 그득했다. 오늘 경기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가 오갔다. 이미 1, 2차전을 통해 다저스의 전력에 대해 충분히 숙지가 된 상황이었던 덕분에 회의는 길지 않았다.

‘밥은 먹었냐?’

‘아니. 이것도 간신히 맞춰 온 거야.’

‘끝나고 다저 스타디움으로 출발할 때까지 시간 좀 날 테니깐 간단하게 밥이나 먹자.’

다행히 호텔 식당의 런치 타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늦어도 매우 늦은 아침 식사. 어제의 즐겁고 격렬한 운동 덕분인지 평소보다 훨씬 많은 음식이 입안으로 들어갔다. 프레스톤 역시 어제 격렬하게 운동을 한 것인지 식사량이 범상치 않다.

“다 먹었냐?”

식사가 일단락되고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건넸다. 리키 헨더슨이었다.

“헨더슨 씨? 여긴 왜?”

“에휴, 다 안 먹었으면 천천히 더 먹고.”

“아뇨, 다 먹었습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헨더슨의 표정이 미묘하다. 원정을 나와 신나게 놀아 재낀 것을 탓하려는 것일까? 괜히 찔리는 마음이 들었다.

‘아냐, 찔릴 것도 없지. 여기가 무슨 고등학교 캠프도 아니고, 나랑 프레스톤도 프로고 사생활이 있는데. 게다가 일정에 지장을 준 것도 아니고, 뭐 법에 저촉되는 일을 한 것도 아니잖아.’

감정적으로 찔리기는 했지만, 딱히 잘못한 것은 없었다. 아무리 프로 선수라고 해도 시즌 중에 모두 금욕적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원정 기간 중이라는 것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특별히 일정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 이정도로 노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너 괜찮겠어?”

“네?”

하지만 헨더슨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질책이 아닌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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