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68화 (68/210)

# 68화.

큰 물(5)

다저스와의 3차전. 오늘 다저스의 선발은 대런 드라이포트. 90마일 중후반대의 뛰어난 속구와 고속 슬라이더를 장착한 우완투수로 올 시즌 전반적으로 부진한 다저스 투수 중에서 케빈 브라운과 함께 그나마 밥값을 하는 투수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대런 드라이포트의 슬라이더에 리키 헨더슨이 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커리어를 통틀어 경기당 삼진 숫자가 0.5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 헨더슨이었다. 타석에서 물러나는 헨더슨의 표정이 좋지 않다.

타석에 헨더슨의 뒤를 이어 에드가로드 알폰조가 올라갔다. 베네수엘라 출신의 유쾌한 삼루수가 대런 드라이포트의 공을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진다. 덕아웃보다 한층 가까운 대기타석에서 드라이포트의 공을 유심히 관찰했다.

빠르고 강하다. 구속과 구위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곳이 보이지 않았다. 훗날 다양한 부상으로 인해 먹튀의 대명사로 알려질 투수이기는 했지만, 건강한 드라이포트는 분명 일류의 투수였다.

‘괜찮아. 충분히 할 수 있어.’

덕아웃, 나를 바라보는 피아자의 시선이 따끔하다. 클럽하우스 리더. 공식적으로 주장에 지명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팀내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선수이자 이미 오랜 시간 리그 최정상급의 선수로 이름을 날려온 피아자는 실력과 명성 그리고 성격까지 클럽하우스 리더로 추대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클럽하우스 리더가 나와 프레스톤을 찍었다.

***

“피아자가 벼르더라고.”

“에? 대체 왜요?”

프레스톤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나 역시 헨더슨의 이야기가 뜻밖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오늘 조금 초췌한 모습으로 아슬아슬하게 미팅에 참여하기는 했다. 하지만 지각을 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팀에 나쁜 영향을 준 것도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가 우리를 벼를 이유는 없었다.

“뭐, 잘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잘못될지도 모르는 일을 애초에 단도리 치겠다는 의미겠지. 아무래도 어린 애들이 이름 좀 알려졌다고 함부로 굴다가 잘못되는 경우는 많으니까 말이야.”

“아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우리가 고등학생도 아니고. 우리도 프로라고요.”

프레스톤이 헨더슨에게 볼멘소리를 냈다. 헨더슨이 나에게 너도 같은 생각이냐는 듯한 눈빛을 건넸다.

“감독 의중인 건가요?”

“역시 예리하네. 솔직히 그것도 없다고 말하긴 힘든 것 같아. 미팅이 시작하기 전에 발렌타인이 피아자를 찾았었거든.”

빌어먹을 발렌타인 같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젯밤 나와 프레스톤이 논 것 정도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매일같이 그렇게 놀아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우리가 그렇게 논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아직 시합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은 상황이었다. 우리가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아닐진대 이정도 사생활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근데 발렌타인 감독이 아니더라도, 피아자도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일 거야. 어느 정도 연차가 있는 녀석이 함께했다면 모르겠는데, 재능 있는 어린 녀석 둘이서 그렇게 놀고 왔으니깐 말이야. 게다가 그 녀석이 다저스에 감정 있는 것도 잘 알잖아. 그런데 하필 다저스 원정을 와서 그렇게 놀아 재꼈으니 녀석 눈에 거슬릴 만도 하지.”

실제 좋은 클럽하우스 리더가 버티고 있는 팀일수록 유망주들이 딴 길로 빠지지 않고 올바르게 성장한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지금 피아자의 반응은 조금 이른 감이 있긴 하지만 좋은 클럽하우스 리더로서 적절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평생 야구를 하면서 살아온 선수가 한 번 유흥에 빠져들면 쉽게 헤어나오기 힘든 것도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대상이 하필 나라는 점이었다.

‘젠장, 발렌타인이 팀의 사소한 일들에 신경을 쏟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하루 놀았다고 이렇게까지 신경을 쓸 줄이야.’

좋게 생각해보자면 이것은 발렌타인이 그렇게 사소한 일들까지 신경 쓸 만큼 우리가 현재 팀에서 그렇게 대단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라인업에서 우리를 빼는 수준의 강한 대응은 아마 무리일 것이다. 하루 부진했다고 그렇게까지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을뿐더러 대체 선수와 우리의 실력 차는 상당했다. 다만 오늘 경기에서 부진한다면 이래저래 잔소리를 듣는 것 정도는 피하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술 마시고 논다고 몸을 엉망으로 만들어 나타나는 것은 변명하기 힘든 실수였다.

“게다가 내가 얼핏 듣기로는 그 여자 소문도 별로 안 좋다고 하던데. 괜찮겠어?”

“소문이요?”

“어, 뭐 전 남자친구들이나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떠돌더라고.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썩 기분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리키 헨더슨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개인주의의 극치를 달리는 사람인지를 생각해본다면, 그가 이런 말을 해주는 것에 마냥 기분 나빠할 수만도 없었다. 그가 이런 말을 굳이 나서서 한다는 것은 나에게 그만큼 큰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고, 또한 파멜라 앤더슨과 만나는 것에 그만큼 커다란 걱정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고마워요. 뭐 그런 소문들은 저도 잘 알고 있고, 충분히 신경 쓰고 있어요.”

“그래, 뭐 네가 신경 쓴다면 된 거지. 어쨌거나 몸은 좀 괜찮아? 아까 보니깐 영 안 좋아 보이던데.”

***

솔직히 말해 몸은 그리 좋지 못했다. 최대로 친다고 해도 평소의 8할 정도? 어제 파티에서 마신 칵테일의 양이 만만치 않았다. 옆에 앉아있던 파멜라 앤더슨을 의식하느라 홀짝홀짝 마신 술이 상당한 숙취로 돌아왔다. 게다가 근 2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벌인 다채로운 방식의 격렬한 운동이 평소 내가 사용하지 않던 말단 근육들을 자극한 덕분인지 몸이 상당히 무거웠다. 그뿐만 아니라 등허리의 타박상은 여전히 중요한 순간마다 나에게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멍청하기는.’

이제 와 생각해보면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애초에 나는 내가 유흥에 빠져서 야구를 소홀히 할 가능성 따윈 없다고 생각했다. 유흥은 삶의 활력이자 휴식의 수단일 뿐,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단위의 섹시 스타와 로맨스를 벌인다는 것이 나의 시선을 흐려 놓았다.

타석의 에드가르도 알폰조가 내야 땅볼로 물러났다.

[1회 초, 투아웃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3번 타자인 Kang이 들어옵니다.]

[오늘 대런 드라이포트 선수의 공이 상당히 좋아요. 저 선수도 긁히는 날에는 정말 무서운 선수거든요.]

[자, 과연 다저스의 연패를 끊을 수 있을 것인지. 마운드의 대런 드라이포트 선수. 와인드업에 들어갔습니다.]

97마일의 빠른 공. 반쯤 돌아가던 나의 배트가 멈췄다.

뻐엉!!

[초구 몸쪽 높은 코스!! 아, 살짝 빠지는 공이었습니다.]

[저 선수, 정말 선구안이 대단합니다.]

다행이었다. 최상이 아닌 몸 상태는 눈에도 제법 크게 영향을 미쳤다. 평소와 비교했을 때 공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았다. 좋은 타구를 만들 자신이 없었기에 흘려보낸 공이 볼 판정을 받았다.

볼카운트 1-0

드라이포트의 두 번째 공이 들어왔다.

딱!!

조금 몰려 들어온 빠른 공. 나의 배트가 정확하게 돌아갔다.

‘젠장.’

하지만 드라이포트의 구위가 너무 좋았다. 마지막 순간 지저분하게 움직인 공이 스윗 스팟을 벗어났다. 1루 파울 라인을 따라 흐르던 공이 라인을 벗어났다. 만약 몸 상태가 최선이었다면 힘으로 밀어붙여 라인 안쪽으로 집어넣을 수 있을 만한 공이었다. 약간의 아쉬움이 머릿속을 채웠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가볍게 머리를 젓고 다시 타석에 섰다.

볼카운트는 1-1 드라이포트가 세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약간 높은 코스. 역회전. 드라이포트의 손을 떠나는 순간 느껴지는 이질적인 움직임. 확연하게 알 수 있는 커브였다.

‘거를까?’

볼카운트는 1-1 아직 여유는 있었다. 저 커브가 존 안에 들어올 확률은 높지 않았다. 게다가 커브는 구질을 알아냈다고 해도 가장 쳐내기 힘든 공이었다. 나의 배트가 멈췄다.

[제3구!! 바깥쪽 커브. 침착하게 골라냈습니다. 볼카운트는 2-1.]

[상당히 아슬아슬한 공이었는데, 참을성이 대단합니다.]

[이렇게 되면 초조해지는 쪽은 투수거든요.]

[아무래도 대런 드라이포트 선수의 주특기인 슬라이더가 좌타자를 상대로는 그리 재미를 보지 못하는 만큼 조금 갑갑한 상황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대런 드라이포트 선수 오늘 포심 패스트볼의 구위가 매우 좋습니다. Kang이라고해도 쉽게 정타를 만들긴 힘들 겁니다.]

대런 드라이포트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여기서 빠지는 공을 던질 가능성은 낮았다. 배트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높아.’

바깥쪽 아슬아슬하게 들어오는 높은 코스의 빠른 공.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의 무게를 실은 배트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젠장!!’

손목에 힘을 더한다. 스윙의 궤적이 확연하게 틀어졌다.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가장 위험한 순간에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논리로 쌓아 올린 이성이 아닌 한순간의 직감이었다.

따악!!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꺽여 들어오던 슬라이더를 나의 배트가 정확하게 때려냈다. 억지로 스윙궤적을 바꿨던 만큼 그리 강한 힘이 실리지는 못했다. 그래도 잘 맞은 타구였다. 1루를 향한 발걸음에 힘을 더한다.

‘멈춰!!’

1루 주루 코치의 신호가 보였다. 나의 눈이 다저스의 우익수를 찾았다.

‘젠장.’

아슬아슬한 타이밍. 평소였다면 충분히 2루까지 달려볼만한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지금 몸 상태를 자신할 수는 없었다. 나의 발이 1루에서 멈춰섰다.

[쳤습니다!! 대런 드라이포트의 백도어성 고속 슬라이더를 메츠의 Kang이 그대로 잡아 당겼습니다.]

[이루수의 키를 넘기는 타구!! 우익수 라울 멘도사 달려갑니다.]

[그 사이 Kang은 무사히 1루로. 내야를 넘기는 우전 안타. 메츠의 Kang이 1회 초 첫 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합니다.]

암 가드와 풋 가드를 넘기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여전히 좋지 않다. 세 걸음의 리드폭. 대런 드라이포트의 시선이 피아자에게 못 박혔다. 내가 기억하기로 작년 피아자는 드라이포트와 두 번 만나 2루타와 안타 하나씩을 기록했었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작년까지 같은 팀에서 함께 했던 만큼 그가 얼마나 무서운 타자인지, 그리고 본인을 얼마나 잘 두들길 수 있는 타자인지는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슬금슬금 반걸음 더 리드폭을 넓혔다. 여전히 나를 바라보지 않는 드라이포트. 그의 양 손이 글러브에 들어갔다. 슬쩍 올라가는 왼쪽 다리. 지면에 단단하게 박힌 그의 오른발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지금이다.

나의 몸이 2루를 향해 쇄도했다.

‘느려!!’

느리다. 내 머릿속 이미지보다 최소 한 걸음 이상 느린 나의 몸뚱아리. 심지어 고작 이런 속도로 달리고 있음에도 괴롭다 고통을 호소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이루수의 글러브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웅!!

타석의 피아자가 나를 도왔다. 포수의 송구를 막기 위한 의도적인 스윙. 낮게 날아오른 나의 몸이 지면을 휩쓴다. 이루수의 무릎이 굽혀진다. 쫙 벌어진 글러브. 누런 빛깔의 공이 쏜살처럼 날아와 박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나의 왼손 역시 2루 베이스를 휩쓸었다. 이루수와 나 너나 할 것 없이 심판을 바라봤다. 잠깐의 정적.

심판의 양손이 올라왔다.

“세이프!!”

성공이다.

[Kang의 시즌 11번째 도루!! 무난하게 성공합니다. 역시 빨라요.]

[Kang의 도루를 보고 있자면 속도도 속도지만, 정말 투수의 타이밍을 잘 읽어내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투수가 공을 던지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훔쳐냈어요.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11개나 되는 도루를 성공하는 동안 도루실패가 하나도 없는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2루 베이스를 밟고 유니폼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마운드 너머 홈플레이트 옆 방망이를 쥐고 선 피아자가 보인다. 마주치는 시선.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던 그의 눈빛은 어느새 종적을 감췄다. 괜히 웃음이 났다.

‘어때요?’

‘나쁘지는 않군.’

타석의 피아자 역시 한쪽 입가를 씰룩이며 나를 바라본다. 1회 말 2아웃 주자 2루. 피아자의 우전 안타에 내가 홈을 밟았다. 여전히 몸 상태는 온전치 않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10할이 아닌 상태에서도 나는 여전히 경쟁력 있는 메이저리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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