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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69화 (69/210)

# 69화.

로키 산맥의 신령한 기운(1)

다저스와의 3연전으로 시작된 17일 15원정이라는 지옥 같은 일정도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남은 시리즈는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3연전뿐.

요란한 알람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전 11시 40분.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당연한 일이었다. 경기를 끝낸 지 이제 고작 10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일어나서 다음 시합을 준비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오늘 경기가 있는 곳은 덴버 시티. 해발 1,600미터의 높은 고도는 몸의 피로를 한층 더 가중한다.

‘빌어먹을 시차 같으니라고.’

서부에서 밤 11시 30분에 경기를 끝내고 비행기를 타고 4시간 정도 이동했을 뿐인데 이곳 콜로라도는 무려 오전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꼼꼼하게 몸을 풀었다. 혹사당한 근육과 관절이 통증이라는 이름의 비명을 질러댔다. 14일 동안 무려 12경기를 뛰었다. 몸에 피로가 쌓이는 것은 당연했다. 다행인 것은 원정 초반 나를 괴롭히던 등의 타박상은 이제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읔.”

그리고 대신이라기엔 뭐 하지만 오른쪽 허벅지에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피멍이 생겼다. 이틀 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댄 미셀리라는 멍청한 투수 놈이 만들어 준 피멍이었다. 제구도 안 되는 놈이 던진 94마일짜리 투심패스트볼이 남긴 흔적. 8회 상당히 지친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몸쪽으로 파고 들어온 통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그래도 위험한 부위가 아닌 허벅지에 맞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일찍 일어났네.”

“나도 방금 내려온 거야.”

식당으로 내려가 늦은 아침을 먹는 사이, 프레스톤이 슬금슬금 걸어 내려왔다. 피곤함이 가득한 표정. 하지만 그런 피곤함과 무관하게 녀석의 접시에 쌓인 음식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실로 부러운 식성이었다.

한참 음식을 흡입하던 프레스톤이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쿠어스가 그렇게 장타가 잘 나온다며.”

“응? 뭐 아무래도 그렇지. 근데 장타도 장타인데 애초에 투수들 공 자체도 많이 밋밋해져서, 성적 세탁하기에 딱 좋지.”

실제로 작년 나는 쿠어스에서 6경기 26타석 23타수 10안타(2루타 4개, 3루타 1개, 홈런 1개) 2볼넷 14타점 9득점 1희생 플라이. 0.435/0.480/0.783이라는 새미 소사 부럽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런 성적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고지대의 희박한 공기가 타구를 한층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희박한 공기 덕분에 회전하는 공의 마찰이 줄어들고, 마찰이 줄어드는 만큼 역학적인 움직임 역시 줄어든다는 점이 더 컸다. 물론 마찰이 줄어든다는 말은 공의 구속이 증가한다는 말과 동일 했다. 하지만 일류 투수의 공이 무서운 것은 구속도 구속이지만 살아 움직이는 볼 끝의 움직임이었다.

프레스톤의 표정이 좋아졌다. 다저스와의 3차전에서 조금 죽을 쑨 이후 피아자가 얼마나 갈궜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던 녀석이었다. 그리고 의기소침해진 만큼 성적 역시 영 좋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의기소침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성적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이 녀석이 본인답지 않은 욕심을 부린다는 점이 더 컸다.

기본적으로 프레스톤은 아무 공에나 호쾌하게 배트를 휘두르는 녀석이었다. 삼진율은 높지만 그만큼 질 좋은 타구를 많이 만들어내는 전형적인 배드볼 히터 타입의 슬러거. 하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최근 이런저런 공들을 골라내며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애초에 선구안도 부족한 놈이 공을 골라내며 최상의 스윙을 하지 못하는데 좋은 타구가 나올 리 만무했다. 하지만 멍청한 짓이라 생각된다고 해서 내가 이래라저래라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녀석도 한 명의 당당한 메이저리거였으니 말이다.

‘뭐, 로키산맥의 정기를 받아서 좀 좋아졌으면 좋겠네.’

***

프레스톤이 두꺼운 베이컨을 세 줄째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아직이었다. 결국, 길게 놓고 봤을 때 야구는 체력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부분이야말로 프레스톤 자신이 눈앞의 진호를 이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능성이었다.

‘젠장.’

마이너 시절부터 엎치락뒤치락하며 함께 올라오던 녀석이 어느 순간 손에 닿기 힘들 만큼 성큼 앞서나갔다. 하지만 프레스톤은 자신의 재능 역시 진호에 못지않다고 확신했고, 자신이 진호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비록 4개월이나 늦게 콜업 됐고, 주전 자리가 거의 예약된 진호와 달리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빡세게 경쟁했지만, 그 역시 25인 로스터, 주전 우익수 자리를 확보했다.

약간의 여유.

녀석이 놀러 나가는 자리에 함께 나가 함께 놀았다. 야구에 집중하느라 잊고 지내던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이 괴물 같은 녀석은 4타수 2안타 1도루를 기록했다. 심지어 안타 중 하나는 무려 2루타였다.

반면 프레스톤 본인은 그날 4타수 무안타. 3삼진을 기록했다. 처참했다.

경기가 끝나고 클럽하우스 리더인 피아자가 프레스톤을 찾아왔다. 피아자는 프레스톤의 일그러진 표정에 그저 어깨를 두들겼다. 그 격려는 비난보다 더 아프게 프레스톤의 심장을 할퀴었다.

부족한 것은 선구안이었다. 그가 생각했을 때 자신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무 공에나 배트를 휘두르는 버릇을 고칠 필요가 있었다. 테드 윌리엄스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40번의 타석에 들어서서 안타를 열 개 치는 2할 5푼의 타자가 나쁜 공을 버리기로 하고 5개의 볼넷을 얻어낸다면 2할 8푼 6리의 타자가 될 수 있다고.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힘들었다. 하지만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때로 어려운 길을 감수해야 하는 법이다. 실제로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 이후 삼진율은 크게 줄어들었다. 프레스톤은 자신이 점점 발전하고 있다고 강하게 믿고 있었다.

***

오늘 콜로라도의 선발투수는 브라이언 보하논. 텍사스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이후 몇 년간 마이너와 메이저를 오가는 전형적인 AAAA급 투수였던 그는 97년 메츠에서 각성하여 98년 다저스에서 매우 훌륭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2년간의 활약을 바탕으로 올 시즌 콜로라도와 3년 1,000만 달러라는 훌륭한 계약을 체결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작 2년 반짝한 투수에게 무리한 투자라 떠들었다. 실제 그가 올 시즌 9경기 57.2이닝 동안 기록한 자책점은 37점. 평균자책점은 5.78로 연 333만 불짜리 선발투수의 성적이라기엔 초라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뛰는 곳이 쿠어스 필드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작년을 기준으로 콜로라도 로키스의 파크팩터는 무려 127. 브라이언 보하논의 성적에 이 파크팩터를 넣어 계산할 경우 그는 3년 1,000만 달러가 아까운 투수에서 1년 1,000만 달러의 가치를 하는 투수로 탈바꿈했다.

“으, 역시 무겁네.”

고지대 특유의 갑갑함이 피곤한 몸을 한층 무겁게 만들었다. 쿠어스 필드가 위치한 덴버 시티의 고도는 해발 1,600미터. 설악산이 1700미터 정도였으니 거의 설악산 정상에서 야구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마운드의 브라이언 보하논이 공을 뿌리기 시작했다. 대기 타석. 한쪽 무릎을 꿇고 공을 관찰했다. 전광판에는 95라는 숫자가 찍혔다. 쿠어스 필드가 보통 1~3마일 정도 구속이 잘 나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 빠른 공은 아니었다.

타석에는 어제 경기에서 휴식을 취했던 헨더슨이 서 있었다. 볼, 스트라이크, 파울, 볼, 그리고 또 볼. 헨더슨이 지극히 자신다운 플레이로 보하논에게 맞섰다.

‘땅볼을 유도하겠다 이거네.’

헨더슨이 잘 상대하고 있기는 했지만, 보하논 역시 나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낮게 잘 깔려 들어오는 공들. 이곳 쿠어스가 살짝 뜬 공조차 장타로 둔갑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땅볼을 유도하기 위한 그의 피칭은 현명했다. 까다로운 코스로 찔러 들어오는 공들. 섣불리 배트를 휘둘렀다가는 그대로 내야 땅볼로 끝날 만한 공들이 연신 헨더슨을 유혹했다.

딱!!

하지만 헨더슨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들어오는 공을 정확하게 커트해낸 헨더슨이 씨익 웃는다. 삼진은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그의 모습. 보하논의 일곱 번째 공이 그의 손을 출발했다.

뻐엉!!

가볍게 배트를 내려놓는 헨더슨. 제법 아슬아슬한 공이었다. 심판에 따라서는 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릴지도 모르는 공. 하지만 지금 타석에 선 것은 헨더슨이다.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1회 초, 리키 헨더슨이 볼넷을 얻어냅니다. 선두타자 출루!!]

[리키 헨더슨의 뒤를 이어 Kang이 타석에 들어옵니다.]

헨더슨 덕분에 심판의 존을 거의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심판 외곽 쪽으로 제법 후하다. 나의 몸이 홈플레이트로 바짝 다가갔다. 타자가 홈플레이트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을 좋아하는 투수는 없었다. 마운드의 보하논이 인상을 찌푸린다.

‘그래서 어쩔 건데.’

타석에서 방망이를 곧추세웠다. 1루를 한번 노려본 보하논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브라이언 보하논은 기본적으로 커맨드가 괜찮은 투수였다. 이곳 쿠어스 필드의 특성상 무빙 패스트볼의 위력이 극도로 저하됨에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땅볼을 양산한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몸쪽 높은 코스. 마치 나의 머리통을 두들길 것처럼 달려드는 초구. 나의 몸이 뒤로 슬쩍 물러났다. 사실 좌완 사이드 투수였던 탓에 위협적으로 보였을 뿐 뒤로 물러나지 않더라도 몸에 맞을 만한 공은 아니었다.

마운드의 보하논이 위협적인 척 사납게 웃는다.

허세다.

진짜 미친놈들은 정말 머리통을 맞춰도 상관없다는 자세로 공을 뿌린다. 사납게 웃는 보하논을 마주 보고 웃었다. 여전히 홈플레이트에 나의 몸이 바짝 다가갔다.

볼카운트는 1-0 보하논이 두 번째 공을 뿌렸다. 중앙으로 조금 몰려 날아오는 공.

‘슬라이더다.’

너무나도 뻔한 유인구. 하지만 매력적이었다. 지금 위치라면 충분히 쳐낼 수 있다. 나도 모르게 배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야.’

안 좋은 공을 굳이 쳐 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상황은 나에게 유리했다. 두 번째 공을 흘려보냈다. 볼카운트 2-0. 그 어떤 타자라도 3할로 만들어 주는 마법의 카운트가 완성됐다.

1루의 헨더슨이 슬금슬금 리드폭을 넓힌다. 그리고 제3구.

볼넷을 각오했다는 듯 아슬아슬한 코스로 들어오는 바깥쪽 낮은 공. 앞서 리키 헨더슨조차 제대로 쳐내지 못하고 몇 차례나 커트해야 했던 바로 그 공이었다.

하지만 나는 리키 헨더슨이 아니었다.

살짝 들려있던 오른발이 강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전신의 체중이 온전하게 실린 무게이동. 시뻘건 피멍으로 물든 허벅지가 고통을 호소한다. 하지만 고통은 고통일 뿐. 단련된 나의 하체는 무너지지 않는다. 바짝 당겨진 왼팔의 상박. 단단하게 조여진 손아귀. 비스듬하게 치켜 올라가는 나의 배트가 낮게 바짝 깔려 오는 보하논의 빠른 공을 그대로 후려쳤다.

‘큭.’

지치고 상처 입은 몸이다. 완벽하진 못했다. 하지만 해발 1,600미터의 가벼운 공기가, 그 완벽하지 못한 부분을 메워준다. 높게 떠오른 타구. 32도의 발사각으로 날아오른 공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커리어 총합 3개의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뛰어난 우익수답게 래리 워커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외야수라 해도 외야 복판에 떨어지는 홈런을 훔칠 수는 없었다.

[호, 홈런!! 담장을 훌쩍 넘는 큼지막한 홈런포!! 1회 초 메츠의 Kang이 선제 2점 포를 쏘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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