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70화 (70/210)

# 70화.

로키 산맥의 신령한 기운(2)

나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한 보하논이 침착하게 후속 타자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는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사용하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투수였다. 고작 홈런 한 방에 무너질 만큼 말랑말랑한 멘탈이 아니었다.

안타, 병살, 안타, 그리고 땅볼 아웃.

보하논이 추가실점 없이 무사히 이닝을 마무리했다. 보하논이 내려간 마운드를 우리의 선발인 옥타비오가 올라갔다. 올 시즌 지금까지 7경기에 출전, 그중 5경기에 선발로 등판한 옥타비오는 평균자책점 4.77이라는 기대보다 괜찮은 성적을 기록 중이었다.

따악!!

[큽니다!! 래리 워커!! 잘 잡아당긴 타구!! 우중간, 우중간!! 담장!! 넘어갑니다!!]

[옥타비오 도텔 선수, 크게 나쁜 공이 아니었어요. 아주 조금 몰려나왔을 뿐인데, 래리 워커 여지없이 넘겨버리네요.]

1회 말. 3점 홈런. 래리 워커가 승부를 뒤집었다. 홈런을 맞은 보하논이 침착하게 마음을 정돈했다면 옥타비오는 조금 달랐다. 한층 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그의 피칭이 격렬했다. 이글거리는 눈빛. 눈앞의 타자가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달려드는 그의 피칭이 콜로라도의 타자들을 압도했다.

삼진, 그리고 또 삼진. 옥타비오가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

2회 초 프레스톤이 타석에 섰다. 마운드의 투수 브라이언 보하논은 호락호락한 투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은 쿠어스 필드. 2할 8푼의 타자가 3할 2푼의 타자로 둔갑하는 곳이었다. 프레스톤이 방망이를 움켜쥔다.

초구. 바깥쪽 낮은 공.

앞서 여러 차례 지켜봤던 공이었다. 존 밖으로 빠져나가는 공이다. 프레스톤이 공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심판의 입에서는 그가 예상하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스트라잌!!”

‘이게 스트라이크라고?’

순간 짜증이 밀려든다. 잠시 손을 들어 타석에서 나와 고개를 휘휘 젓는 프레스톤. 스트라이크 판정은 이미 떨어졌다. 그리고 한 번 내려진 판정은 뒤바뀌지 않는다. 헬멧을 고쳐 쓴 프레스톤이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제2구. 몸쪽 낮은 코스 빠른 공. 같은 구속이지만 한층 더 빠르게 느껴지는 공이었다. 아슬아슬한 코스. 잠깐의 망설임. 프레스톤이 배트를 휘둘렀다.

딱!!

망설임이 길었던 탓일까? 배트가 늦었다. 밀린 타구가 3루 파울 라인을 벗어난다.

덕아웃.

프레스톤의 눈에 자신을 응원하는 진호의 모습이 들어왔다. 심장 한켠이 욱신거린다. 그의 잘난 친구 놈은 이번에도 역시 멋지게 홈런을 기록했다. 부러웠다.

‘젠장.’

프레스톤이 치밀어오르는 열등감을 내리누른다. 괜찮다. 아직 0-2. 기회는 남아 있다. 그가 스스로를 달래며 다시 타석에 섰다. 마운드의 보하논이 세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똑같은 자세, 똑같은 위치, 그리도 똑같은 타이밍. 보하논의 손에서 공이 출발했다.

체인지업이다.

신중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신중했기에 배트를 멈춰 세울 수 있었다. 바깥 코스, 슬쩍 빠지는 체인지업. 프레스톤이 세 번째 공을 흘려보냈다. 볼카운트 1-2. 실낱같던 생명줄이 조금은 두꺼워진다.

‘좋았어.’

최근 나타나는 기록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자신은 성장하고 있었다. 지금 이 체인지업을 흘려보낸 것이야말로 그 증거였다. 이전이었다면 분명 생각 없이 방망이를 휘둘러 삼진을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고양된 마음. 타석의 프레스톤이 네 번째 공과 마주할 준비를 끝냈다.

[볼카운트 0-2 상황에서 프레스톤 선수가 유인구를 잘 참아냈습니다. 최근 성적이 좋지 않은 프레스톤 선수입니다만 타격감이라는 게 원래 오락가락하는 거거든요.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습니다.]

[자, 브라이언 보하논. 제4구!!]

보하논이 천천히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프레스톤이 움켜쥔 방망이에 힘을 더했다. 보하논의 오른 다리가 크게 올라오고 그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의 귀 뒤에서 번개처럼 튀어나오는 왼손. 누런 야구공이 강한 회전을 품고 날아든다.

‘빠른 공!!’

존 안으로 들어오는 몸쪽 빠른 공이다. 프레스톤의 배트가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틱!!

늦었다. 바깥쪽 체인지업에 맞춰진 프레스톤의 타이밍을 파고드는 몸쪽 빠른 공. 게다가 마지막 순간까지 공을 지켜보던 프레스톤의 신중함 덕분이었다. 빗맞은 타구가 내야를 구른다.

‘살 수 있어!!’

프레스톤의 거구가 1루로 향했다. 비록 강진호에게 밀려 코너 외야수로 전환하긴 했지만 본래 중견수를 보던 프레스톤이었다. 그때에 비해 몸이 많이 커지긴 했어도 그 속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00kg을 상회 하는 거구가 민첩하게 달려나갔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사용하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투수들은 최대한 땅볼을 유도하기 위해 애를 쓰는 이들이었다. 그것은 쿠어스 필드라는 기형적인 타자구장에서 적응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그리고 로키스의 프런트 역시 자기 팀의 상황이 그렇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로키스의 내야진은 그 어느 팀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수비 실력을 자랑했다. 게다가 바깥쪽 체인지업 이후 몸쪽 빠른 공을 통한 땅볼 유도는 보하논이 즐겨 쓰는 레퍼토리였다. 프레스톤의 타구가 땅에 도달하는 순간, 일루수인 토드 헬튼의 몸은 이미 공을 향하고 있었다.

[내야 땅볼!! 토드 헬튼 공을 잡아 1루에. 1루에는 이미 브라이언 보하논이 커버를 들어와 있습니다.]

“아웃!!”

내야 땅볼 아웃.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프레스톤의 발걸음이 무겁다.

‘젠장, 몸쪽 공인 걸 알아챘는데, 배트가 늦었어. 게다가 재수도 없지. 하필 타구 방향이 일루수 정면이라니.’

덕아웃, 프레스톤이 난간에 기대 보하논의 피칭을 관찰했다. 그의 눈에 비친 보하논은 똑같은 투구 자세와 간결한 자세. 3년 천만 달러의 투수라는 이름에 걸맞은 피칭을 선보이고 있었다.

‘괜찮아. 아직 두 번 남았어.’

덕아웃의 프레스톤이 의지를 불태웠다.

***

격렬한 난타전. 오르락내리락하는 시소처럼 우리와 콜로라도는 상대의 투수를 마음껏 두들겼다. 아직 5회가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7:5

나의 세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원 아웃 주자 1, 2루. 2루에는 레이 오도네즈가 1루에는 헨더슨이 각각 자리하고 있었다. 잘못해서 내야 땅볼이라도 나오면 병살로 게임을 끝내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마운드의 보하논이 조금 지쳐 보인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 그의 투구 수는 무려 104개. 아마 이번 이닝이 그의 마지막이 될 확률이 높았다.

[자 원 아웃 주자 1, 2루. 타석에 Kang이 들어왔습니다.]

[첫 타석에서 2점 홈런을 기록했던 Kang입니다. 두 번째 타석 역시 타구 자체는 나쁘지 않았었습니다만, 아쉽게도 우익수 정면으로 향하는 바람에 아웃으로 물러났었는데요, 오늘 전반적으로 컨디션이 굉장히 좋아 보입니다.]

몸은 여전히 좋지 않다. 이 고산지대라는 곳은 똑같은 활동으로도 사람을 몹시 지치게 만든다. 덕아웃의 옥타비오는 이미 비치된 산소호흡기를 물고 앉아있다. 혹사당한 관절들이 쑤셔온다. 전생의 늙은 몸을 떠오르게 만드는 통증들. 고개를 가볍게 젓고 타석에 섰다.

1루와 2루. 모두 발이 빠른 주자들이다. 어쩌면 더블 스틸이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 보하논의 시선이 그들을 길게 훑는다.

보하논의 양손이 글러브에 모여들었다. 자세를 낮추는 주자들. 좌완투수인 보하논의 시선이 집요하게 헨더슨에게 향했다.

뻐엉!!

배트를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존에서 확실히 떨어진 공. 지친 몸, 안정적이지 못한 슬라이드 스텝. 어처구니없는 폭투였다. 포수인 헨리 블랑코가 블로킹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주자들의 진루를 허용했을 만한 폭투.

보하논의 얼굴에 억지 미소가 감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힘들 때일수록 힘든 티를 내지 않는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저 보하논은 삼류는 아니다.

보하논의 가슴에 양손이 모였다. 헨더슨을 바라보는 시간은 길지 않다. 자신의 실수가 무엇이었는지를 바로 캐치하는 능력. 역시 나쁘지 않다. 부드러운 딜리버리. 그의 손끝에서 누런 공이 날아들었다.

뻐엉!!

“스트라잌!!”

몸쪽 높은 곳, 볼 반개 정도 걸친 아슬아슬한 코스. 보하논의 빠른 공이 들어왔다. 아쉽게도 판정은 스트라이크.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코스가 좋지 못했다. 억지로 배트를 가져다 댔다면 아마 높은 확률로 병살이 됐을 것이다. 아직 카운트에는 여유가 있었다. 굳이 어려운 공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

볼카운트 1-1.

보하논이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잠깐의 준비 자세. 그리고 부드럽게 올라가는 오른쪽 다리.

‘걸렸어.’

호흡이, 박자가, 손의 높이가 다르다. 경기 초반에는 눈치채기 힘들었던 약점이었다. 하지만 지쳤기 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세트 포지션에 약점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유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점은 나는 그가 던지는 체인지업을 미리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한 박자 느린 움직임. 그의 손을 떠난 공이 바깥 코스로 흐른다. 아슬아슬한 코스다. 아마 그대로 둔다면 볼이 될지도 모르는 공. 하지만 나의 몸은 이미 홈플레이트에 바짝 다가와 있다. 세차게 돌아가는 배트.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그의 체인지업이 약간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괜찮았다. 고작 이정도 변화 따위. 이겨낼 힘은 충분하다.

따악!!

쿠어스 필드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었던 1회 때 와는 달랐다. 이번 타구는 설사 이곳이 최악의 투수구장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AT&T파크라고 해도 충분히 담장을 넘길 수 있을 타구였다. 높게 뜬 공이 쿠어스 필드 우측 외야석 3층, 해발 1,600미터를 상징하는 푸른 선을 넘어갔다.

3점 홈런.

전광판에 3점이 더해졌다. 10:5.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도는 동안에도 여전히 무릎 관절은 쑤셨고 허벅지는 아팠다. 하지만 홈플레이트를 밟고 나를 마중 나온 동료들의 환호를 받는 동안만큼은 그런 통증 따위는 느낄 수 없었다. 물론 기쁨 때문만은 아니었다.

“으, 이 인간들 진짜 손 엄청 맵네.”

-강진호 콜로라도전 5타수 3안타 2홈런. 6타점 2득점 대활약!!-

-팀 점수의 절반을 책임진 강진호의 대활약. 4월 이달의 선수에 이어 5월 이달의 선수도 유력?-

-미국의 유명 캐스터 카트리나 에반스 ‘현재 내셔널리그에서 가장 유력한 MVP후보는 강진호.’

***

모두 간발의 차이였다.

4타석 3타수 무안타 0삼진 1 희생 플라이 1타점.

삼진은 없었다. 침착하게 공을 잘 골랐고, 좋은 공을 쳐 냈다.

‘운이 없었어.’

그저 운이 없을 뿐이다. 프레스톤이 되뇌었다. 괜찮은 타구가 야수들에게 잡혔다. 조금만 더 뻗어 나갔더라면, 혹은 야수들의 위치가 조금만 달랐더라면 얼마든지 안타로 기록될 수 있는 타구들이었다. 바비 발렌타인 감독 역시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적응하고, 조금만 더 운이 좋아진다면 자신은 한층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이, 프레스톤. 너 내일 쉬더라.”

“뭐라고?”

늦은 저녁 식사 자리. 옆에 앉은 강진호가 건네오는 이야기에 프레스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물론 한 경기 정도 휴식을 줄 때가 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팀 내에서 가장 힘든 것은 저 강진호였다. 이번 원정 내내 녀석은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반면 자신은 불과 닷새 전에 하루 휴식이 주어졌었다.

조금 전까지 다채로운 맛을 자랑하던 음식들이 모래알처럼 까끌했다. 프레스톤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만 먹으려고? 벌써?”

“어, 좀 피곤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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