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로키 산맥의 신령한 기운(3)
프레스톤 녀석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몸 상태가 좋지 않더라도 경기에 빠지고 싶어 하는 선수는 없는 법이다. 나 역시 굉장히 고된 상황이었지만 경기를 빠지고 싶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뭐 직전 경기에서 홈런을 두 개나 쳤으니 명단에서 빼기도 뭐했겠지.’
시합을 끝내고 이미 마무리 훈련을 꼼꼼하게 한 상황. 당장에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자고 싶었지만 자기 전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 번 더 해준다. 평소처럼 코어 근육의 단련을 겸하는 필라테스 쪽 동작이 아닌 관절과 근육만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용도의 스트레칭. 지친 근육과 관절들이 비명을 지른다. 특히 관절 부위가 영 좋지 않다. 이전에 왔을 때는 느끼지 못했었는데, 몸이 지쳐보니 고산지대가 얼마나 사람의 몸에 무리를 주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시즌 막판에 비행기만 타도 무릎이 쑤신다던 헨더슨 씨의 엄살이 단순히 엄살은 아니었네.’
둘째 날 10시 40분. 적절한 운동, 그리고 충분한 숙면 덕분인지 몸이 한결 가볍다. 어제보다는 훨씬 좋아진 몸.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과를 끝내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2차전. 마운드에는 나의 메이저리그 데뷔전 상대 투수, 데릴 카일이 올라왔다.
***
원정 일정이 고된 것은 선수들만이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하는 프런트와 코치진 역시 고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떤 의미로 본다면 코치진은 선수들보다 더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선수들이 휴식을 취할 시간에도 그들은 상대 팀을 파악하고 선수들을 관리해야 했으니 말이다.
“흠, 프레스톤 녀석 요즘 너무 안 좋은데?”
“아무래도 이런 원정은 처음이다 보니 지친 게 아닐까요?”
“글쎄, 그렇게 생각하기엔 또 프리 배팅에서 보여주는 건 이상하게 좋단 말이지.”
“심리적인 요인 아닐까요?”
“심리?”
“네, 낯선 환경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다 보니 심리적으로 위축돼서 방망이를 자신 있게 휘두르지 못하는 탓에 성적은 더 안 좋게 나오는 일의 악순환일 확률이 높은 것 같습니다.”
“심리적 문제라······.”
“이번 시리즈를 끝으로 홈에 돌아가니, 구단 전용 상담사에게 맡겨보는 게 어떨까요.”
94년 메이저리그의 대파업 이후 도입된 복지혜택 중 하나인 심리상담사. 새로운 야구를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인 감독 중 하나인 바비 발렌타인은 이 심리상담사라는 것이 선수들의 복지뿐만 아니라 팀을 이끌어 나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 지도자였다.
하지만 지금 프레스톤이 보여주는 문제는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거는 없었다. 단지 30년 가깝게 야구판에서 굴러먹은 노련한 지도자의 직감이었다.
“이봐 탐, 자네가 보기에도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라고 보이나?”
타격 코치인 탐 롭슨이 입을 열었다.
“일단 타격 자세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다만?”
“이상하게 타구 질이 너무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그런데 또 프리배팅에서는 아주 펄펄 날아다니니 미칠 노릇입니다.”
“본인이랑 이야기는 해봤고?”
“네, 프레스톤 말로는 그냥 운이 없는 것 같다고 하는데······.”
수석코치인 브루스 베네딕이 말을 이어받는다.
“단순히 운의 문제라고 보기에는 너무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이건 오히려 지금이 실력이고 이전이 운이 좋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말이야.”
“연습 때 보여주는 모습도 그렇고,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러면 일단 내일 경기 하루 휴식을 주는 방향으로 하자고. 혹시 모르니깐 롭슨 자네는 시간을 내서 조금 더 심도 깊게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네, 알겠습니다.”
***
“그러니깐 별문제 없다 이거지?”
“네, 몸 상태도 괜찮고, 어제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냥 타구 방향이 운이 없는 겁니다.”
요즘 상태에 관해 묻는 탐 롭슨의 질문에 프레스톤이 어깨를 으쓱했다. 볼삼비는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테드 윌리엄스의 이야기처럼 그는 40번 휘둘러 10번의 안타를 만드는 타자에서 40번 중 좋은 공이 들어오는 35번에만 휘두르는 타자로 진화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일시적으로 운이 없을 뿐이다. 필요한 것은 기회뿐. 프레스톤이 탐에게 강하게 어필했다.
“보면 아시겠지만, 저 몸 상태 진짜 좋습니다. 그러니깐 자꾸 벤치에 앉혀두지 마시고 좀 내 보내주세요.”
“크흠, 그거야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다 감독님이 결정하는 일이지. 하여간 문제 없다 이거지?”
“넵!!”
사실 탐이 보기에도 프레스톤의 타격폼은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Pitch/FX(투구 추적 시스템)조차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99년이었다. 그보다 수준 높은 Hit Tracking System(타구 추적 시스템)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 프레스톤의 타구 질이 전체적으로 나빠진 것을 눈치채기에 10번의 원정 경기는 너무 적었다.
따악!!
탐이 던져주는 공을 후려치는 프레스톤의 스윙이 시원했다. 좌, 중, 우 가리지 않고 쭉쭉 뻗어 나가는 타구. 당연했다. 프레스톤의 문제는 공을 오래 지켜본다는 점이었고, 그것은 이런 식의 훈련으로는 절대 드러나지 않는 문제였다.
‘확실히 몸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단 말이지.’
***
작년의 이맘때 홈에서 데릴 카일과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3타수 1안타. 나쁘지 않은 기록이었다. 그 1안타가 정말 아슬아슬한 내야안타였고, 당시 유격수가 지금 내야에 서 있는 네이피 페레즈였다면 안타는커녕 깔끔한 내야 땅볼 아웃이었을 거라는 점과 이후 두 번의 타석이 모두 삼진이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완봉패였지, 아마?’
그 당시 우리 팀의 타자들은 저 데릴 카일의 공에 속수무책이었고 단 1점도 내지 못한 채 깔끔하게 완봉패를 경험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다를 것이다. 현재 메츠의 타선은 당시에는 없던 헨더슨, 올러루드, 피아자, 로빈 벤츄라 등의 우수한 타자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이곳은 투수들의 무덤 쿠어스 필드였다.
부웅!!
“스트라잌!!”
각이 큰 커브에 헨더슨의 배트가 허공을 휘저었다.
‘커브는 여전하네.’
어쩌면 현시점에서 메이저리그 최고일지도 모르는 커브볼러.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순간순간의 반응이 떨어지는 헨더슨이었다. 커브의 낙차를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그의 공이 헨더슨을 농락한다.
“스트라잌!! 아웃!!”
올해로 쿠어스 필드에서 2년 차. 작년 홈과 원정에서 극과 극의 성적을 보여주던 데릴 카일이 쿠어스 필드에 어느 정도 적응한 모습을 보여주며 불과 다섯 개의 공으로 헨더슨을 돌려세웠다.
[루킹삼진입니다. 와우, 리키 헨더슨의 루킹삼진이라니. 이거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로군요.]
[올 시즌 두 번째 루킹삼진일겁니다. 헨더슨 선수 같은 경우 이런 식의 삼진은 거의 당하는 일이 없거든요. 데릴 카일 선수의 커브가 보기 드문 광경을 만들어내네요.]
[자 타석에는 2번 타자 Kang. 어제 멀티 홈런을 기록했죠?]
[네, 멀티 홈런 포함 3안타. 대단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제 메이저 2년 차에 불과한 선수인데, 정말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워나가고 있어요. 데뷔 초에 제가 최대 켄 그리피 주니어급의 포텐셜을 지닌 선수라고 칭찬했었는데, 많이 이르기는 합니다만 이대로 계속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쎄요, 제가 봤을 땐 여전히 너무 이른 말씀인 것 같긴 합니다만, 어쨌든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은 소포모어 징크스 따윈 없는 완벽한 2년 차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대단한 것이 장타력입니다. 작년보다 한층 몸을 키워왔을 때부터 예상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마이너 시절부터 그러니까 95년 이후 지난 3년간 꾸준히 유일한 단점으로 지적돼왔던 장타력이 올해는 가장 눈에 띄는 능력이 돼버렸어요.]
[작년 이 선수가 일 년간 총 14개의 홈런을 기록했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시즌의 1/4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벌써 홈런만 9개입니다. 이대로라면 정말 40홈런도 가능할 것 같은 상황입니다.]
[게다가 도루 쪽도 여전히 만만치 않거든요. 만약 Kang이 40홈런을 기록한다면 40-40도 무난히 달성 가능할 겁니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그가 지금과 같은 페이스로 시즌 막판까지 달려나갈 수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지난겨울 그가 국제대회에 참석했었다는 점이 조금 걸리는군요. 아무래도 2년 차의 어린 선수인 만큼 체력안배에서 조금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덕아웃으로 돌아간 헨더슨의 뒤를 이어 타석에 섰다. 마운드의 데릴 카일은 여전했다. 2미터에 가까운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묘한 박력. 날카롭게 떨어지는 커브볼이 나를 향한다. 강하게 돌아가는 배트. 하지만 공의 움직임이 내 예상을 뛰어넘는다. 물론 80마일도 되지 않는 느린 구속인 만큼 억지로라도 가져다 대려면 댈 수 있다.
부웅!!
“스트라잌!!”
초구 스트라이크. 잠시 손을 들어 타석에서 물러났다. 생각보다 공 두 개 이상 더 떨어진 커브볼. 여전히 만만치 않다. 하지만 지금 타석에 있는 것은 1년 전의 그 루키가 아니었다. 아마 작년의 나였다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배트를 휘둘러 억지로 공에 배트를 가져다 댔을 것이다.
옷깃을 가다듬고 장갑을 조여 맺는다. 가볍게 손목을 돌려준다. 몸 상태는 나쁘지 않다. 어제의 그 무겁던 몸과는 천양지차의 상태. 다시 타석에서 데릴 카일을 노려본다.
2미터의 큼지막한 몸이 시원하게 움직였다.
‘커브다.’
특유의 뚜렷한 역회전. 한눈에 봐도 커브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공이다. 하지만 데릴 카일이 보여주는 커브는 구종을 안다고 해도 쉽게 칠 수 없는 진짜 커브였다. 거의 내 눈높이에서 존 아래로 뚝 떨어지는 커브. 반쯤 돌아간 배트가 멈췄다.
볼카운트 1-1.
세 번째 공이 카일의 손을 출발한다. 구종은 역시 커브. 망설임은 없었다. 이번 공은 존을 들어오는 공일 것이다. 강한 확신 속에서 나의 배트가 빠르게 움직인다. 미묘한 움직임. 내 예상보다 공의 낙폭이 적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 정도 움직임은 얼마든지 손목의 힘으로 커버할 수 있다.
따악!!
[쳤습니다!! 깔끔한 안타.]
강하게 후려친 타구가 이루수 커트 애보트를 뚫고 외야에 떨어졌다. 우전안타. 우익수 래리 워커가 재빨리 커버를 들어왔다. 2루까지 가는 건 무리다. 나의 발이 1루에 멈춰섰다.
암 가드와 풋 가드를 벗어 1루 코치에게 넘기는 사이 타석에 마이크 피아자가 들어왔다. 방망이를 붕붕 돌리며 시원하게 웃는 피아자. 그의 미소가 서늘하다.
딱!!
언제든지 2루로 달려나갈 준비를 끝낸 나를 무색하게 만드는 대형 홈런. 몸 상태가 괜찮아진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하룻밤의 숙면은 지친 피아자의 몸에 활력을 안겨준 것 같았다.
2:0.
마치 어제의 경기를 연상케 하는 시작이었다.
***
3회 초, 1아웃 주자 없음. 헨더슨은 피아자, 혹은 강진호 등과는 달랐다. 한국 나이로 마흔두 살. 고작 하룻밤 숙면을 취했다고 그 지독한 피로가 해소되기에 헨더슨의 나이는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리키 헨더슨이었다. 메이저 역사상 최고의 리드오프 리키 헨더슨.
‘빠진다.’
리키 헨더슨의 배트가 멈춰섰다. 운인지, 아니면 그의 오랜 경험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감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강진호는 도저히 구분할 수 없었던 데릴 카일이 던지는 커브볼의 낙차. 헨더슨이 낙차 큰 커브볼을 골라내며 1루로 걸어 나갔다.
타석에 선 것은 강진호. 그가 특별히 좋아하는 어린 동료였다. 단순한 후배가 아니었다. 함께 우승을 위해 뛰는 싹수가 보이는 어린 동료. 하지만 최근 리키 헨더슨은 몇몇 부분에서 그 동료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세 걸음 반. 언제든지 2루를 훔칠 준비가 되어있는 리키 헨더슨이었다. 하지만 마운드의 데릴 카일은 그에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신경을 쏟는 것은 오직 타석의 강진호뿐. 언제나 주인공이고 싶어 하는 헨더슨의 기분이 상한다. 투수의 정지 동작. 가슴 위 글러브에 모여있던 그의 오른손이 귀 뒤로 넘어갔다.
‘지금!!’
시선을 끌지 못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어 주는 것이 리키 헨더슨이다. 그의 몸이 바람처럼 2루로 향했다. 홈플레이트의 포수가 벌떡 일어난다. 빠른 송구. 하지만 빠르지 않다. 리키 헨더슨은 언제나 포수의 송구보다 빠르다. 부드러운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 헨더슨의 왼손이 2루 베이스를 향한다.
그런데 그 순간.
‘어!!’
이루수의 발목이 2루 베이스를 가렸다. 평소였다면 부드럽게 팔을 움직여 이루수의 다리를 피해갔을 헨더슨이었다. 하지만 쌓여있는 피로가 그의 반응속도를 늦췄다.
뚜둑
“세이프!!!”
왼손 약지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통증. 헨더슨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메츠의 덕아웃이 분주해졌다. 잠깐의 멈춤. 2루로 향한 의료진이 고개를 젓는다.
“젠장!!”
바비 발렌타인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비록 나이는 많지만, 현재 팀에서 불가결한 전력인 헨더슨의 부상. 아직 얼마나 심각한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이번 경기에서 더 이상 헨더슨을 쓸 수 없다는 사실 뿐. 발렌타인의 머리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이스 로페즈? 프레스톤 윌슨?’
투수에 한 자리를 더 사용 중인 발렌타인이었다.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옵션은 두 가지뿐. 내외야를 가리지 않고 사용 가능한 유틸리티 루이스 로페즈인가, 주전 우익수인 프레스톤 윌슨인가. 고민은 짧았다.
“프레스톤 준비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