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72화 (72/210)

# 72화.

로키 산맥의 신령한 기운(4)

뜻밖의 출전. 하지만 당황은 없었다. 선발 라인업에서 이름이 빠지긴 했지만, 경기 전 훈련 자체를 빼먹은 것은 아니었다. 프레스톤이 그대로 2루로 향했다.

마운드에는 2미터의 투수가. 그리고 그 너머 타석에는 강진호의 모습이 보였다. 프레스톤을 향해 가볍게 미소짓는 진호. 자신의 타석에서조차 여유로운 그의 모습에 프레스톤의 가슴 한구석이 시큰하다.

프레스톤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2루 베이스에서 슬쩍 발을 뗀다. 단독 도루는 거의 불가능한 프레스톤이었지만 그래도 주루 플레이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당장 팀에서 그보다 주루가 좋은 선수를 대라고 한다면 헨더슨과 진호 그리고 배니 아그바야니 정도밖에는 없다. 타석의 강진호가 적당한 안타만 만들어 준다면 홈까지 쇄도할 능력은 충분하다.

부웅!!

데릴 카일의 초구. 강진호의 배트가 세차게 허공을 갈랐다. 평소 공을 오래 지켜보는 진호답지 않은 과감한 스윙이다.

“스트라잌!!”

존 밖으로 빠져나가는 커브였다. 프레스톤이 판단하기에 만약 자신이었다면 끝까지 공을 지켜보고 충분히 골라낼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역시 지친 걸까?’

평소의 강진호답지 않은 플레이. 아무래도 역시 16일의 원정 기간 동안 무려 14경기에 참가한 피로가 몰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도루 중 부상. 흔히 있는 일이었다. 몸값 비싼 선수들에게 도루를 자제시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헨더슨의 가장 큰 가치는 그 주루플레이였다. 뛰지 않는 헨더슨은 헨더슨이 아니다. 그저 어쩔 수 없는 세금 정도로 넘기는 수밖에.

‘그래도 헨더슨인데 알아서 잘 했겠지.’

헨더슨을 대신해 2루에 나간 프레스톤의 표정이 진지했다. 오늘 선발명단에서 빠진 것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이렇게 출전하고도 여전히 기분이 풀린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인마, 표정 풀어.’

저렇게 진지하게 긴장해선 될 일도 되지 않는 법이다. 프레스톤 녀석을 향해 슬쩍 웃어줬다. 다행히 내 의도가 잘 통한 것 같다. 고개를 두어 번 가로저은 녀석의 얼굴이 편안하다.

헛스윙.

바로 직전 타석에서 보여줬던 커브들을 생각하고 방망이를 거세게 휘둘러봤지만, 존 밖으로 완벽하게 떨어지는 공이었다. 하지만 스윙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바람 소리가 웅웅 거릴 만큼 강력한 스윙이다. 마운드의 데릴 카일이 보내는 눈빛이 달라진다. 볼카운트는 1-1. 그의 자세가 한결 신중하다.

볼, 파울, 그리고 볼.

이미 한차례 안타를 허용한 카일이 좋은 코스로 공을 넣지 않는다. 어차피 1루는 비었으니 볼넷으로 내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좋은 공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내 뒤가 피아자인데 진짜 그럴 거야?’

눈빛으로 건네는 나의 질문에 데릴 카일이 공으로 답했다.

뻐엉!!

[아, 볼넷. 볼넷입니다. Kang 첫 번째 타석 안타에 이어 두 번째 타석 볼넷으로 출루. 오늘도 멀티 출루를 이어갑니다.]

[1아웃 1,2루 상황이군요. 데릴 카일로써는 이제 땅볼을 유도해서 병살을 만드는 것이 최선이겠습니다만, 타석에 들어오는 타자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1회 초, 투런 홈런을 때려냈던 마이크 피아자 선수가 타석에 들어옵니다.]

안타 그리고 희생플라이. 프레스톤과 내가 각각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3회 초 2점의 추가 득점. 전광판의 숫자에 2점이 보태졌다. 4:1. 아직 경기는 초반에 불과했다.

***

5회 초. 프레스톤의 첫 번째 타석이 찾아왔다. 노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마운드에는 지난 4이닝 내내 눈이 빠져라, 관찰한 데릴 카일이 서 있었다.

이전이라면 가장 상대하기 껄끄러운 유형의 변화구 투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천천히 공을 관찰하고 배트를 휘두른다. 빠지는 공을 골라내고 제대로 들어오는 공만을 공략한다. 상대가 승부하지 않는다면 걸어 나가는 것이고, 좋은 공이 들어온다면 안타로 만든다.

지난 몇 주간의 노력을 지금 이 자리에서 증명할 찬스였다.

덩치에 걸맞은 박력있는 움직임. 프레스톤의 시선이 감춰진 그의 오른손을 쫓았다. 교묘하게 가려진 각도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손바닥. 밖에서 보던 것과는 조금 다른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얼마든지 예상하고 있었다.

‘커브야.’

부웅 떠오른 느낌의 공. 탑스핀 구질의 커브였다. 메이저 일류의 투수가 던지는 변화구를 감각적으로 체크 해냈다. 프레스톤의 가슴에 자신감이 부푼다. 움직이기 시작하는 배트. 홈플레이트를 얼마 남기지 않은 위치에서 데릴 카일의 공이 휙 하고 떨어진다.

하지만 이미 대비는 되어있다. 프레스톤이 전신을 틀어가며 떨어지는 공에 배트를 가져다 댄다.

틱!!

배트를 스친 공을 포수가 잡아냈다. 파울팁이다.

‘젠장, 조금 모자랐어.’

프레스톤이 잠시 타석을 벗어나 고개를 흔든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대기 타석에는 진호가 대기 중이었다. 여유롭게 연습 스윙을 하고있는 강진호. 프레스톤의 심장이 또 욱신거린다.

다시 타석에 들어왔다. 데릴 카일의 공이 공격적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타구는 나오지 않는다. 파울 그리고 또 파울. 다시 한번 프레스톤이 타석에서 내려왔다.

‘젠장. 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왜 타구가 제대로 안 뻗는 거냐고!!’

여전히 대기 타석의 진호는 허공을 향해 배트를 휘두른다. 격렬한 스윙. 대기를 가르는 배트의 파공음이 날카롭다. 망설임 따위는 한점도 담겨있지 않은 강력한 스윙이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프레스톤이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본다. 그리고 되뇐다. 지금 자신의 스윙은 어떠한지를. 과연 타구들이 야수를 뚫지 못하는 것이, 라인 드라이브가 아닌 땅볼이 늘어나는 것이 그저 운이 없었기 때문인가?

이것은 일순간의 깨달음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프레스톤은 바보가 아니었다. 비록 절대적인 지식의 양은 부족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지식을 쌓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그가 멍청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 운이 없었던 것이라 자위를 하면서도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스스로 감지하고 있었다. 지난 몇 주간 프레스톤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의문이 꾸준하게 축적되고 있었다.

하지만 프레스톤은 그 이상함을 감히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했었다. 그것은 그가 무의식적으로 지금처럼 행동하는 것이 단순한 향상심이 아닌 진호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심의 폭발이었다는 것을 외면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높은 자긍심은 그의 행동에 깔린 기저 심리가 질투심과 열패감이라는 사실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행동을 남에게 툭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고,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솔직할 수도 없었다.

‘나쁜 공을 골라내는 능력은 타자가 꼭 갖춰야 할 능력이다.’

‘삼진이 줄어들고 볼넷이 늘어나는 것은 더 훌륭한 타자로 가는 길이다.’

맞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비겁한 변명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이 정당하다고 설명할 수 있는 너무 편안한 변명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마치 자신을 꾸짖기라도 하는 것처럼 배트를 휘두르는 진호를 보는 순간 그는 저 말들이 거짓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최근 몇 주간 해왔던 것은 타자로서 더 성장하는 길이 아니었다.

‘아니다. 그것은 그저 강진호라는 타자의 장점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이 순간 그 쌓일 대로 쌓인 마음의 앙금이 폭발했다. 대기 타석의 강진호는 여전히 방망이를 돌리고 있었다. 가슴은 여전히 시큰했다. 하지만 프레스톤은 이것이 질투이고 열등감임을 그리고 자신은 결코 강진호처럼 플레이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나는 프레스톤 윌슨이다. 나는 강진호와 다른 타자다.’

드높은 자긍심, 그리고 그 자긍심에 어울리는 재능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 인간이 자신의 실수와 약점, 그리고 열패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성장하는 법이다.

방망이를 움켜쥔 프레스톤이 다시 타석에 올라섰다.

‘쿠어스가 넓긴 넓네.’

높은 고도를 의식해 일부러 넓게 지어진 외야였다. 지금까지 어디로 공을 날려도 야수들이 달려와 잡을 것 같게 느껴지던 외야가 이토록 광할 했다니. 이래서야 어디로 쳐내던 간에 안타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마운드의 데릴 카일이 와인드업에 들어간다. 여전히 위압감 넘치는 투구 동작이다. 훌륭한 딜리버리, 보이지 않던 곳에서 갑작스럽게 그의 오른 손이 튀어나왔다. 붕 날아오르는 공. 커브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공은 홈플레이트를 통과하던지, 아니면 홈플레이트 밖을 통과하던지 둘 중 하나다.’

프레스톤이 집중해야 하는 것은 투수가 던지는 공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었다. 프레스톤이 집중해야 하는 것은 날아드는 공을 쳐내는 일 자체였다. 잘 짜여진 자세. 프리 배팅에서 치는 족족 담장을 넘겨 버리던 프레스톤의 스윙이 온전하게 이뤄졌다.

따악!!

존을 살짝 벗어나는 커브. 약간 늦은 타이밍. 하지만 빠르고 강했다. 쿠어스 필드의 희박한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타구가 드넓은 외야의 먼 구석에 내리 꽂혔다. 좌중간 워닝트랙에 쳐박히는 강한 타구. 좌익수 단테 비체트가 달렸다.

[잘 맞은 타구!! 좌중간 담장 앞까지 날아갑니다!!]

[프레스톤 빠른 질주!! 1루 지나 2루로!! 멈추지 않습니다. 2루 지나 3루까지!!]

흑인 특유의 탄력적인 근육이 빠르게 달리는 프레스톤의 몸에 힘을 더해주었다. 주루 센스라는 측면에서는 부족했다. 30미터 달리기도 부족했다. 하지만 30미터가 60미터가 되고 60미터가 90미터가 됐을 때의 프레스톤은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1루를 막 지날 때와 다르지 않은 속도. 프레스톤의 오른발이 3루 베이스에 닿았다.

“세이프!!!”

프레스톤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기 타석의 친구가 엄지를 내미는 것이 보인다. 여전히 가슴은 시큰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이 시큰함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 질투심은 결코 저열한 감정이 아니었다. 이것은 부족한 자신을 채찍질하는 성장동력이었다. 3루 베이스를 밟고 선 프레스톤이 진호를 향해 씨익 웃었다.

***

‘짜식이 3루타 하나 쳤다고 웃기는’

최근 인상을 찡그리고 다니던 프레스톤 녀석이 드디어 웃는다. 쓸데없는 고민 따윈 하지 않는 프레스톤답다면 프레스톤 다운 시원한 스윙이었다. 그러고 보니 본래 프레스톤이 미친 듯이 날뛰어야 하는 무대가 바로 이곳 쿠어스 필드였다. 이 드넓은 쿠어스 필드의 중앙을 홀로 책임지던 올스타급 중견수. 이미 바뀌어버린 현실에서도 여전히 로키산맥은 저 잘생긴 녀석을 사랑하고 있었다.

데릴 카일의 공은 여전히 강력하고 까다로웠다. 그리고 지금 3루에 서 있는 저 잘생긴 녀석은 이 더러운 공을, 심지어 존에서 벗어나는 공을 힘과 감각만으로 담장까지 날려버렸다.

유감스럽게도 나에겐 아직 그런 파워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평생 그런 파워는 가질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뭐.’

괜찮다. 설사 저 컨트롤의 제왕 그렉 매덕스라 할지라도 가장 많이 던지는 공은 가운데 몰리는 공이다. 모든 공을 잘 칠 필요는 없었다.

딱!!

광활한 로키 산맥을 향해 누런 공이 날아들었다.

-뉴욕 메츠. 로키스와의 시리즈 스윕 달성!!-

-강진호 괴력의 홈런 쇼!! 3경기 동안 무려 4개의 홈런을 몰아치다.-

-뉴욕 메츠의 핵타선. 시즌 40홈런 페이스의 선수가 무려 3명!!-

-셰이 스타디움에 모습을 드러낸 파멜라 앤더슨. 메츠의 신예 Kang과 공공연한 애정 과시.-

-메츠, 마침내 브레이브스를 누르고 동부지구 1위 재탈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