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73화 (73/210)

# 73화.

평범한 메이저리거

AAA리그.

메이저 25인 로스터에 이름을 올리는 750명의 사람을 제외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이들이 모여있는 곳.

그렉 보어는 이곳이 마치 지옥과 같다고 느꼈다. 메이저라는 천국에서 내려온 실낱같은 희망 하나만을 바라보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지옥. 그리고 그런 지옥에서 고통받는 그렉 보어 자신의 죄는 감히 재능을 타고 나지 못한 인간이 빅리그라는 찬란한 무대를 꿈꾼 죄일 것이다.

36살. 이제는 슬슬 포기할 때도 된 나이였다. 23살 대졸 출신. 4라운드 전체 109픽. 17만달러의 계약금을 받고 프로야구에 뛰어들었던 그가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뛰었던 시기는 27살부터 29살까지의 단 3년에 불과했다. 그가 지난 13년간 메이저리그 생활을 하면서 수령한 총 수령액은 고작 51만 달러. 물론 일반인이 생각하기에는 상당히 큰돈이었다. 하지만 야구선수라는 직업의 특성상 들어가야 했던 이런저런 비용들은 컸고, 36살 그의 통장에 남은 잔고는 고작 7만 달러에 불과했고 자산이라고는 구매한 지 8년 된 낡은 픽업트럭 한 대가 전부다.

최초의 퍼블릭 아이비 중 하나로 꼽혔던 UT오스틴을 졸업한 그렉 보어였다. 평범한 회사를 들어갔더라면 지금쯤 괜찮은 집과 화목한 가족, 그리고 새끈한 신형 SUV를 몰고 다녔을 것이다.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36살은 많은 나이였지만, 그렉 보어에게는 충분히 무언가 다른 일을 시작할 재능과 끈기가 있었다.

‘니미럴.’

하지만 그는 오늘도 야구 방망이를 손에 쥐었다. 미약한 가능성이다. 하지만 보어는 그 미약한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에게 야구라는 것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딱!!

오늘은 타격감이 괜찮았다. 4타수 2안타. 요 며칠 까먹었던 스탯이 조금은 복구됐다. 0.297/0.324/0.498. 언제나처럼 투고타저의 경향이 짙은 인터내셔널 리그에서 눈에 띄는 성적이었다. 물론 안심하긴 일렀다. 36살의 3할 타자와 26살의 2할 7푼 타자 중 후자를 콜업시키기도 하는 것이 이 바닥이었으니 말이다.

그렉 보어가 되뇌었다.

‘기회는 올 거야.’

시범경기 막판, 오렐 허샤이저의 합류로 인해 외야수 한 자리가 줄어들긴 했다. 하지만 메츠의 외야에는 오렐 허샤이저와 나이가 같은 리키 헨더슨이 있다. 언제까지 저런 식으로 선수단을 운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희망적인 관측이라는 사실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메이저리그의 신은 변덕쟁이다. 내일 당장 마이너의 유망주가 기량을 만개할 수도 있고, 혹은 복잡한 트레이드로 어제 싸웠던 팀의 유니폼을 입게 될 수도 있다.

“그렉, 사무실에서 존이 찾더라.”

“존이?”

홈 경기를 끝내고 아직 샤워도 하지 않은 상황. 노포크 타이즈의 매니저인 존 깁슨의 부름이었다. 더러운 유니폼을 대충 손으로 털어내며 존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렉, 짐 챙겨. 콜 업이다.”

그리고 오늘 그 변덕스러운 메이저리그의 신이 그렉 보어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렉 보어가 생각하던 것처럼 투수의 숫자가 하나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주루플레이 중 발생한 리키 헨더슨의 부상. 그렉 보어가 또 한 번 메이저리그의 그라운드를 밟았다.

***

야구에서 가장 위험한 플레이는 도루다. 실제로 팀들은 고액연봉자에게 도루를 자제해 달라고 공공연하게 요구한다. 하지만 현재 리키 헨더슨의 경우는 조금 미묘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리드오프 리키 헨더슨. 그가 그런 평가를 받았던 것은 단순히 그의 출루 능력이 비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성기 리키 헨더슨은 괴물이었다. 3할의 타율. 4할의 출루율. 연평균 20개의 홈런과 100개에 달하는 도루. 정면으로 승부하면 넘겨버리고, 피해가면 출루해서 득점권까지 나가는 이 괴물은 정말 혼자 야구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줬다.

하지만 그도 이제는 만으로 40세. 그에게 남은 것은 꽤 괜찮은 출루율, 그리고 여전한 주루 센스. 그리고 그럭저럭 쓸만한 스피드였다. 그야말로 1번 말고는 써먹을 래야 써먹을 곳이 없어진 셈이었다.

“일단 15일짜리 DL이라더라. 근데 엄지 손가락 염좌가 좀 심한건가봐. 정밀 검사 들어간다고 하던데.”

“헨더슨씨도 이제 나이 먹어서 회복이 예전 같지 않을 텐데.”

“너도 조심해. 솔직히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 하게 되면 손가락 염좌는 진짜 자주 일어나잖아.”

프레스톤의 걱정 어린 이야기. 확실히 도루는 위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의 가장 큰 장점인 주루 플레이를 자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나의 뇌리를 스쳤다.

‘잠깐만. 그게 있었잖아?’

***

덕아웃. 그렉 보어가 침착하게 상대 투수를 관찰하고 있었다. 상대 투수는 밀워키의 히데오 노모. 과거 신인왕 출신의 일본인 투수. 한 때 사이 영 컨텐더급으로 주목받았던 이답게 메츠에서 방출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밀워키 브루어스의 선발투수로 무난하게 자리잡았다.

7경기에 선발로 등판하여 2승 3패. 4.81의 평균자책점.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그가 밀워키에서 받고있는 250만 달러의 연봉을 고려한다면 만족스러운 성적 또한 아니었다.

타석에 선 타자는 강진호. 올해 고작 23살밖에 되지 않는 이 어린 타자는 나이에 걸맞은 운동능력과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노련함을 함께 갖춘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메이저리그라는 괴물들의 세상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괴물.

‘내가 저 나이대에는 싱글A에서 쩔쩔매고 있었지.’

그렉 보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언제나 느끼는 일이었지만 정말이지 불공평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익숙한 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저 강진호에게 집중할 시간이 아니었다. 그렉 보어의 시선이 히데오 노모에게 집중된다.

과거 노모가 리그를 평정했던 95년 당시, 32살의 그렉 보어는 약 60일 정도 메이저에서 활동했었다. 그리고 그 60일간의 활동 중에 우연히 노모 히데오를 직접 상대해본 적도 있었다.

날아오던 공이 갑자기 사라졌다. 배트는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고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외쳤다.

언터쳐블

그가 기억하는 노모 히데오는 감히 상대할 수 없는 투수였다. 그리고 4년. 32살의 그렉 보어가 36살이 되는 사이, 메이저를 평정했던 위대한 투수 노모 히데오는 그 과거의 영광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메이저리그의 투수로 영락했다.

평범한 메이저리그의 투수. 모순적인 이야기였다. 평범한 괴물이라고 해도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는 여전히 괴물이다. 그렉 보어의 눈에 히데오 노모는 여전히 괴물이었다.

그라운드 위에서 괴물과 괴물이 맞부딪힌다. 분간하기 힘든 뚝 떨어지는 포크볼. 하지만 타석에 선 괴물은 그런 포크볼을 완벽하게 골라낸다. 마운드의 히데오가 땀을 닦는다. 6월의 뉴욕. 기온은 고작 25도 안팎에 불과했다. 히데오가 흘리는 땀은 더위가 아닌 긴장이 만들어낸 땀이다.

히데오의 공이 존 구석구석을 노리고 달려든다. 아슬아슬한 공을 툭 걷어내는 배트. 그리고 벗어나는 공을 내버려두는 선구안. 그리고 다섯 번째. 실투.

흔히 실투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공부는 예습 복습이 중요하다는 말처럼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그 중요한 예습 복습을 제대로 해내는 사람이 드물 듯 실투를 놓치지 않는 타자는 드물다. 그렇기에 그런 타자를 우리는 좋은 타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운드의 강진호는 그 좋은 타자 중에서도 특별히 더 좋은 타자였다.

가운데로 살짝 몰린 공에 강진호의 배트가 어김없이 돌아갔다.

딱!!

강하게 날아드는 타구. 강진호의 몸이 짐승처럼 1루를 향해 움직인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탄력. 뒤로 물러나 있던 우익수가 재빨리 공을 잡아내지만 늦었다. 이미 강진호의 발이 1루 베이스를 밟고 지나갔다.

“세이프!!”

그가 1루 베이스 위에서 풋가드와 암가드를 벗어 주루코치에게 넘겼다. 그리고 타석에는 최근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프레스톤 윌슨이 올라갔다. 풀타임 1년차. 25살. 비슷한 포지션에서 대활약 중인 강진호에게 묻혀 상대적으로 부각이 덜 되고 있긴 하지만 저 녀석도 괴물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고작 일주일 사이 4개의 홈런을 몰아치는 괴력. 250파운드(113.3kg)쯤 나가는 몸뚱이로 90야드(82.3m)를 10초에 주파하는 주력. 그야말로 운동을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었다.

“저게 뭐야?”

“푸하하하하!! 저 녀석 여기가 무슨 조리실이라고 착각 하는 거 아니야?”

“쿠키라도 구울 생각인 건가?”

그렉 보어가 프레스톤에게 집중하는 사이 그라운드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퍼져 나왔다.

‘무슨 일이지?’

그렉 보어의 시선이 1루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강진호가 양손에 장갑을 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와 크게 다를것이 없는 광경이었다. 그가 손에 끼고 있는 장갑이 지금껏 어디서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 기괴한 형태라는 것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벙어리장갑.

아니, 저것은 벙어리장갑조차도 아니었다. 벙어리장갑이라고 해도 엄지손가락은 따로 분리되어 있는 법이다. 1루 베이스의 강진호가 끼고 있는 것은 그런 것 조차 없는 통짜 장갑이었다. 게다가 두께 역시 범상치 않다. 사람들의 말처럼 오븐 장갑을 연상케 하는 두꺼움.

그것이 강진호가 내어놓은 해법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6년 뒤. 양키스에 입단하게 될 명 외야수 브렛 가드너가 고안해낸 주루 장갑. 연 평균 5, 60개의 도루를 해내는 그가 엄지손가락 골절 이후 만들어낸 이 장갑이 바로 그가 생각해낸 정답이었다.

물론 모양은 무척 볼품없었다. 두꺼운 네오프렌 재질에 손가락 구분 없이 통으로 만들어진 장갑. 하지만 적당한 신축성과 뛰어난 충격흡수능력을 갖췄다. 특히 통으로 되어있다는 점에서 꺾이고 상하기 쉬운 손가락 부상을 매우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장갑이다.

생소하게 생긴 장갑을 손에 낀 강진호의 리드가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노모는 언제나처럼 주자가 아닌 타자에게 집중했다. 노모 히데오의 초구가 프레스톤에게 향했다.

[1루 주자 달립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던 도루다. 포수인 데이브 닐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2루를 향해 공을 던졌다. 쭉 뻗어 나가는 송구. 바쁜 와중에 실밥을 제대로 채지 못했음에도 흔들림 없이 나가는 좋은 송구였다. 하지만 그 좋은 송구가 2루에 도착하는 시간보다 강진호의 우스꽝스러운 왼손이 베이스에 도착하는 시간이 더 빨랐다.

“세이프!!”

노아웃 주자 2루. 이어지는 프레스톤의 안타에 강진호가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1회 초 1:0.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이크 피아자, 존 올러루드, 로빈 벤츄라, 에드가르도 알폰조. 이어지는 메츠의 강타자들이 노모 히데오를 두들긴다.

그리고 그 광경 속에서 그렉 보어는 묵묵히 노모 히데오의 공을 관찰하고 또 관찰했다. 노모가 공을 던지는 동안 자신에게 기회가 돌아올지, 혹은 돌아오지 않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메이저에 콜업 되고 일주일이 넘는 시간. 그렉 보어에게 주어진 타석은 고작 4번에 불과했다.

기약할 수 없는 기다림.

하지만 그럼에도 그렉 보어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렉 보어에게 야구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에게 야구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표. 혹은 인생 그 자체였다.

괴물들이 치고 달리고 던지는 메이저 리그.

오늘도 그곳에서 평범한 메이저리거 그렉 보어는 다섯 번째 기회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