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74화 (74/210)

# 74화.

291점의 사나이(1)

-강진호 메이저 13일 메이저 리그 올스타전 출전!! 안타깝게도 선발 출전은 불발돼······.-

-강진호 거침없는 질주!! 한국인 최초 메이저 리그 올스타 선발.-

-0.311/0.370/0.554, 17홈런으로 전반기 최고의 활약을 펼친 강진호. 그의 후반기를 예측해본다.-

민영의 속이 쓰리다. 설마 강진호가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이야.

‘젠장, 워싱턴을 선택했어야 했어.’

최근 몇 년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스포츠 신문인 스포츠 코리아의 골든 로드는 LA 특파원이었다. 코리아 특급 박찬화. 96년부터 시작된 그의 활약은 국민들을 고무시켰고 그의 일 거수 일투족은 모든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그리고 작년. 두 명의 신예가 나타났다. LPGA 한국인 최초의 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비상한 골프 스타 박세라. 그리고 학창시절부터 역대 최고의 재능으로 주목받았었지만, 미국으로 건너와 무려 3년의 세월 동안 별다른 소식이 없었던 98년 내셔널리그 신인왕 강진호.

올해 초,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했었다. 뉴욕을 포함한 미국 동부와 LA를 포함한 미국 서부가 그것이었다. LPGA투어가 미국 전역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결국 박찬화인가 강진호인가를 놓고 고르는 선택지에 가까웠다. 너무 쉬운 선택이었다.

강진호가 비록 반짝 올라오긴 했지만, 여전히 최고의 선수는 박찬화였다. 게다가 선발투수와 타자다. 타자는 매일 매일 출전함으로써 기삿거리가 많아진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아무래도 야구 경기에서 선발투수가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한다면 고민할 이유 따윈 없었다.

그리고 상반기 박찬화는 데뷔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반면 강진호의 활약은 눈부셨다. 작년 5월부터 9월까지 다섯 달 동안 14개의 홈런을 기록했던 강진호는 4월부터 7월 초까지 불과 삼 개월 만에 17개의 홈런을 몰아쳤다. 이대로라면 30-30 클럽 가입은 당연하고, 작년처럼 시즌 막판에 홈런을 몰아친다면 메이저리그의 역사상 3명밖에 없었다는 40-40 클럽에 가입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전망까지 흘러나오는 상황이었다.

민영의 속은 타들어 갔다. 물론 취재원이 제대로 된 활약을 못 하는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윗대가리들이 언제 그런 것을 신경이나 썼던가. 중요한 것은 신문을 읽는 이들이 어떤 기사에 열광하느냐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속이 쓰린 사람이 민영 혼자가 아니라는 점과 그 속이 쓰린 다른 사람들 역시 민영만큼이나 자기 회사에서 어느 정도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박찬화의 활약을 부각했다. 물론 강진호의 활약이 훨씬 대단했지만 결국 그 소식을 알리는 것은 언론이었다. 기사의 논조를 통해 작은 것을 크게 만들고 큰 것을 작게 만드는 일 정도는 간단한 일이었다.

물론 없는 것을 있다고 거짓말하는 것은 아무리 만리타향 미국의 소식이라고 해도 힘들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박찬화가 강진호에 못지않은 활약을 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 한계였다. 따라서 메이저 리그 소식에 밝은 이들, 혹은 기사의 자구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읽는 이들은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 대중은 여전히 박찬화가 최고라고 생각했고,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더이상 그러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내셔널리그 올스타에 강진호가 선발된 것이다. 처음 강진호가 올스타 후보에 선발됐을 때만 하더라도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내셔널리그 외야 중견수 부문에는 현 메이저 리그의 아이콘 중 하나인 새미 소사가 버티고 있었기에 강진호가 선발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강진호의 활약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기존의 이름값 높은 메이저 리그의 선수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당장 타율만 보더라도 강진호보다 높은 타율을 기록 중인 외야수는 무려 다섯 명. 홈런 개수 역시 강진호보다 많은 홈런을 기록 중인 타자는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올해 내셔널리그 올스타팀의 감독을 맡은 브루스 보치는 그들의 예상을 뒤집고 강진호를 올스타로 선발했다.

***

“좋냐?”

“그러면 당연히 좋지 안 좋겠냐?”

프레스톤 녀석이 옆구리를 쿡쿡 찔러왔다. 하지만 짜증 따위는 나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일로 짜증을 내기에 지금 나는 너무 기뻤다.

올스타.

KBO의 올스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조금 이해하기 힘들지도 몰랐다. 하지만 MLB의 올스타는 KBO의 올스타와는 그 위상부터가 달랐다. 당장 올스타전에서 뛴다는 것은 거의 월드시리즈에서 뛰는 것과 맞먹는 영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메이저 리그의 올스타전은 말 그대로 현재 리그에서 뛰는 가장 뛰어난 선수들을 뽑아 리그의 자존심을 걸고 맞붙는 경기였다. 그리고 여기에 선출된다는 것은 내가 리그 전체를 통틀어서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한 외야수라고 공인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올해 올스타전이 벌어지는 장소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 작년 아직 불안한 입지로 찾았던 구장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고풍스러운, 냉정하게 말하자면 낡을 대로 낡은 펜웨이 파크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섰다. 나를 따라온 프레스톤은 미리 준비해놓은 좌석으로 찾아간 지 오래. 덕아웃에는 일 년간 꾸준히 적으로 만났던, 하지만 오늘만큼은 동료인 선수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마운드에는 그가 서 있었다.

페드로 마르티네즈.

작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피를 끓게 했던 메이저 리그 최고의 투수. 180에 80kg이 채 되지 못하는 작은 사이즈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 작은 사이즈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공만큼은 작년 그 이상이었다.

뻐엉!!

하지만 오늘 타석에 선 타자들은 만만치 않았다. 내셔널리그 16개 팀에서 고르고 골라낸 가장 뛰어난 선수들. 1번 타자인 유격수 배리 라킨이 침착하게 페드로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볼, 스윙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그리고 파울, 파울, 파울, 파울. 무작정 존 안으로 욱여넣는 페드로의 강력한 공을 거듭 쳐 내는 배리 라킨. 95년의 MVP이자 통산 8개의 유격수 실버슬러거를 달성한 강력한 그였지만 페드로의 공을 걷어내는 것이 한계였다.

그리고 아홉 번째. 페드로의 공이 날아들었다. 종전보다 한층 강한 공.

틱!!

배리 라킨의 배트가 공 끝을 스친다. 홈플레이트에서 살짝 틀어진 98마일의 빠른 공이었다. 하지만 홈플레이트 뒤편에 앉아있던 이반 로드리게스가 너무 쉽게 공을 잡아냈다. 파울팁. 배리 라킨이 삼진으로 물러났다.

뒤를 이어 타석에 오른 이는 래리 워커. 내셔널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외야수 중 하나였다. 올 시즌 매우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있는 나였지만, 저 래리 워커의 기록에 비교하자면 아직 한 수 뒤지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래리 워커를 페드로가 공 세 개로 잡아낸다. 루킹 삼진이었다.

“스트라잌!! 아웃!!”

3번 타자. 1999년을 기준으로 양대리그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방망이를 휘두르는 사나이. 새미 소사가 타석에 올라왔다. 페드로 역시 그를 잡아내는 데에는 래리 워커보다 조금 더 많은 고생을 필요로 했다. 공 4개. 중간에 볼 하나를 섞은 스윙 삼진. 총 16개의 공. 내셔널리그 최고의 타자들이 모조리 삼진으로 물러났다.

‘대단해.’

피가 끓는 느낌이었다. 작년 덕 아웃에서 지켜보던 때 이상으로 강력해진 페드로 마르티네즈다. 지금이라도 당장 방망이를 들고 나가 타석에 서서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스타팅 라인업은 인기투표에서 1위를 거둔 선수들이었다.

오늘 우리의 선발투수는 커트 실링. 신계의 투수가 내려간 마운드에 인간계 최고의 투수가 올라왔다. 투쟁심으로 불타는 커트 실링은 대단한 투수였다. 하지만 아메리칸리그의 올스타들은 만만치 않았다. 1번 타자인 케니 로프튼의 내야안타. 후속 타자인 노마 가르시아파라는 삼진으로 돌려세웠지만 이어지는 켄 그리피 주니어가 큼지막한 2루타를 기록하며 첫 타점을 올렸다. 뒤를 잇는 쟁쟁한 타자들. 매니 라미레즈, 짐 토미, 칼 립켄 주니어. 하나 같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만한 능력의 타자들이 커트 실링을 두들겼다.

1회 말 3:0 잔루 1, 2루. 커트 실링이 벌게진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또다시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원맨쇼가 시작됐다.

마크 맥과이어 4구째 루킹 삼진. 맷 윌리엄스 내야 안타. 그리고 제프 배그웰 병살타. 대기 타석에서 방망이를 휘두르던 피아자가 고개를 저었다. 2이닝 연속 삼자범퇴. 또 한 번 커트 실링이 마운드에 올랐고, 2회가 끝났을 때 점수는 5:0까지 벌어졌다.

오늘도 마르티네즈의 피칭이 나를 고양 시켰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째서 인사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한 투수의 피칭에 이토록 설레는 것인지. 3회 마운드를 올라오는 데이비드 콘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느꼈다.

올스타전에서 선발투수가 2이닝을 던지고 내려가는 일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익히 알고 있어 모를 수 없는 일. 하지만 데이비드 콘이 마운드에 올라오는 순간 오늘도 마르티네즈와 승부하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억울하게 느껴졌다.

올 한해만 반짝하는 선수들, 혹은 메이저 리그에 전설로 남는 선수들이 차례로 그라운드를 올라왔다. 그리고 마침내 7회 초. 보치 감독이 나를 호명했다.

“Kang. 준비하도록. 다음이 네 타석이다.”

마운드에 선 투수는 마이크 무시나. 볼티모어의 에이스 투수이자, 훗날 양키스로 건너가 Mr almost라 불리게 될 바로 그 남자였다.

188cm에 83kg이라는 프로필상의 기록보다 한층 날렵해 보이는 투수였다. 강력한 오버핸드스로우에서 나오는 90마일 중반대의 속구와 너클 커브, 그리고 체인지업을 보유한 정통파 파워 피쳐.

그의 초구가 날아들었다.

부웅!!

“스트라잌!!”

존 안으로 들어오는 빠른 공이었다. 하지만 늦었다.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98

올해 그가 기록한 최고구속은 96마일. 최근 3년으로 확대해도 그의 최고구속은 97마일이었다. 입맛이 썼다.

‘어차피 1이닝 던지는 거니깐 작정하고 던지겠다 이거네.’

배트를 단단하게 움켜쥔다. 마운드의 무시나가 두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제2구. 높은 코스로 날아드는 탑 스핀의 공. 커브였다. 거의 내 눈높이로 날아드는 공이었다. 움직이던 배트를 멈춰 세웠다.

뻐억!!

너클 커브 특유의 어마어마한 브레이킹. 거의 내 눈높이로 들어오던 공이 마법처럼 존 아래로 떨어졌다. 볼카운트 1-1. 무시나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새파랗게 어린 후배가 자신의 공을 골라낸 것이 제법이라는 뜻 같았다.

‘어디 새파랗게 어린 후배 방망이 좀 맛보시죠.’

세 번째. 바깥쪽 낮은 속구. 자신 있는 코스다. 나의 배트가 공을 후려쳤다.

딱!!

손끝이 묵직하다. 메이저 일류의 투수다운 더러운 볼 끝이 스윗스팟을 교묘하게 벗어났다. 하지만 나의 힘 역시 만만치 않았다. 마지막까지 밀어낸 나의 배트가 공을 외야로 떨어트렸다.

2루타.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온다. 평소였다면 뿌듯한 감정으로 충족될만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마이크 무시나는 물론 대단한 투수였다. 충분히 명예의 전당에 기록될만한 최고의 투수. 하지만 나를 안달 나게 만든 오늘의 그와 비교한다면 저 무시나조차도 그저 한 명의 메이저 리그 투수에 불과했다.

‘보스턴이랑 경기가 이달 말에 있었지?’

마음속으로 보스턴과의 경기를 헤아렸다. 앞으로 보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보스턴의 선발투수는 다섯 명. 그들과의 3연전 경기 중에 페드로가 선발로 나올 확률은 6할. 나의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내셔널리그 올스타. 아메리칸리그 올스타에게 8:2 완패. 리그 간의 수준차 심각.-

-내셔널리그의 타자들을 침묵시킨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압도적인 피칭.-

-강진호 7회 초 대타 출전. 마이크 무시나를 상대로 2루타!! 아쉽게도 후속타 불발로 득점에는 실패.-

-메이저 리그 올스타전 대타 출전 강진호. 1타석 1안타 기록. 타점과 득점 획득에는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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