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291점의 사나이(2)
“으음, 자기. 벌써 일어났어?”
“어, 깼어?”
나와 가리비아가 생활하는 퀸스 아파트의 3배쯤 되는 크기의 맨해튼 아파트. 슈퍼 킹사이즈 침대에서 파멜라 앤더슨이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스르륵 내려가는 얇은 이불. 중력의 힘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는 그녀의 흉부가 눈에 들어온다.
“왜 벌써 일어났어? 오늘 쉬는 날이잖아.”
“약속이 생겨서.”
“약속?”
“어, 보리스 씨가 상의할 게 있다고 그러더라고.”
“보리스? 자기 에이전트? 그 사람 LA에 있는 거 아니야?”
“원래라면 그렇기는 한데, 최근에는 헨더슨 씨 부상 때문인지 뉴욕 쪽에 자주 오더라고.”
“무슨 일인데?”
졸음으로 가득하던 파멜라의 눈망울에 호기심이 감돌기 시작한다. 이제 막 잠에서 깼음에도 빛나는 미모. 현대 의학과 자본의 힘이 만들어낸 티끌 없는 피부가 눈부시다.
“글쎄, 선물이 있다고 하던데. 뭐 대충 광고나 그런 게 오퍼 들어온 게 아닐까?”
“광고? 잠깐만 기다려봐. 나도 같이 나가자.”
“같이 나가겠다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룸으로 향하는 파멜라. 갑작스러운 그녀의 의욕이 당황스럽다. 하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나와 그녀가 만나는 사실은 저기 물 건너 한국에 있는 우리 부모님까지 다 아실 만큼 널리 알려졌다. 애 딸린 이혼녀와 만난다는 이야기에 당장에라도 내 머리채를 뽑을 것 같았던 부모님이지만, 딱히 결혼을 생각하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 그리고 그녀가 마릴린 먼로의 뒤를 잇는 미국의 아이콘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를 내 편으로 돌릴 수 있었고, 지금은 그럭저럭 내가 알아서 잘 하겠지. 정도로 넘어가고 있었다.
문자를 통해 미리 조정한 약속 장소. 먼저 와있던 보리스가 우리를 환영한다.
“이쪽으로.”
파멜라를 바라보는 보리스의 미소가 환하다. 당대 최고의 섹시스타를 바라보는 37살 노총각의 잇몸 미소. 살아생전 보리스가 저렇게 순수하게 기쁨으로 가득 찬 미소를 짓는 광경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단 여기 이걸 보시죠.”
보리스가 두툼한 자료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선물이라는 말에 광고, 협찬 정도를 생각하던 상황에서 들어온 뜻밖의 자료집. 그것은 메이저 리그 30개 구단의 향후 5년 치 운영에 관한 제법 디테일한 전망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해하기 힘든 선물. 진지한 표정의 보리스가 입을 열었다.
“장기계약에 대한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장기계약이요?”
“아, 물론 오피셜은 아닙니다. 하지만 메츠 쪽에서 은연중에 그런 의사를 전달해오더군요.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었다. 이제 고작 2년 차. 물론 작년 5월부터 리그에서 뛰었던 만큼 슈퍼2 조항의 대상으로 내후년부터 연봉조정 1년 차에 들어가는 만큼 평범한 2년 차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아직 이번 시즌조차 끝나기까지 두 달이 넘는 시간이 남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런 식의 서비스 타임에 FA 초반을 묶어서 팀에 주저앉히는 장기계약은 2000년대 후반이나 돼야 유행하는 스타일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이런 제의를 했다는 것은 분명 놀랄만한 일이었다.
“뭐야? 좋은 소식인 거야?”
“뭐, 좋다면 좋은 소식이지. 구단에서 나를 높게 평가한다는 의미니깐 말이야.”
“높게 평가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솔직히 지금 메츠에서 자기가 제일 멋있잖아.”
보리스가 말을 이어갔다.
“7년 4천만 달러. 팀 옵션으로 1,200만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와우, 자기 올해 20만 달러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 7년 4천만 달러면 대체 몇 배가 오르는 거야?”
탑 급의 연예인인 파멜라 앤더슨에게도 4천만 달러 혹은 5천2백만 달러라는 돈은 매우 큰 금액이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리스가 생각하기에는 부족하군요.”
“맞습니다. 지금 진호 씨의 페이스로 볼 때 그 금액은 좀 부족하죠.”
간단한 추론이었다. 만약 적절한 금액이라 생각했다면 그는 각 구단의 자료 대신 메츠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자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최근 리그 분위기를 보면 뭔가 심상치 않습니다. 지금 당장에야 4천만 달러에 1,200만 달러의 대우가 리그 최고 수준입니다만 양키스 엔터테인먼트 앤 스포츠 네트워크가 거둔 성공이 방송사들을 자극하고 있어요. 돌아오는 중계권 재계약 금액은 지금까지의 상상을 초월한 금액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보리스가 놀라우리만큼 정확하게 미래를 예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지금의 고액 FA는 더이상 고액이라고 부르기 부끄러운 수준이 될 겁니다.”
“의외로군요.”
“뭐가 말입니까?”
“보리스 씨는 제가 저들과 계약을 맺는 쪽이 더 유리한 거 아닌가요? 미래에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는 조금 더 큰 돈보다는 지금 당장의 이익을 얻는 쪽이 낫잖아요.”
20만 달러를 받는 서비스 타임 2년 차의 선수에게 FA 기간 2년을 커버하는 7년+1년 4천만 달러+1,200만 달러를 안기는 것은 에이전트로서 결코 부끄러운 계약이 아니었다. 그대로 계약이 성사되도록 나를 설득한다고 해도 그로서는 충분히 자랑할만한 성과였다. 심지어 현재로서는 내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그리고 과연 그때까지 보리스 자신의 고용을 유지할지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는 상황이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바꿔 말한다면 320만 달러가 아니라 1,500만 달러를 벌 기회일 수도 있지요. 전 제 눈을 믿습니다.”
현재 내가 보리스에게 지급하는 수수료는 8%. 1,500만 달러라면 1억9천만 달러. 즉 그는 내가 2억 달러짜리 계약도 가능한 선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진호 씨가 메츠와의 장기계약에 관심이 있다면 최대한 더 좋은 조건을 받아내는 방향으로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 지금 같은 성적만 유지해주신다면 7년을 기준으로는 5천만 달러. 그리고 팀 옵션 삭제 정도까지는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고민할 이유 따윈 없다. 나는 이미 다가올 미래를 알고 있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보리스에게 답했다.
***
7월 말. 그토록 기다리던 보스턴과의 시리즈가 시작됐다. 1차전 보스턴의 선발투수는 페드로 마르티네즈. 내가 그토록 원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뉴욕 메츠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인터리그 시리즈 1차전. 양 팀 모두 조금은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비슷하다니 어떤 점이 비슷한가요?]
[두 팀 모두 다른 지구였다면 충분히 지구 1위를 할만한 성적을 몇 차례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지구의 터무니 없는 팀들에게 밀려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는 점을 일단 공통점으로 꼽고 싶군요.]
[아, 그렇군요.]
[물론 올 시즌은 다릅니다. 뉴욕 양키스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역시 역대 최고 수준으로 달려나가고 있기는 합니다만, 뉴욕 메츠와 보스턴 레드삭스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뉴욕 메츠의 경우 현재 1경기 차이로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1위를 사수 중이고, 보스턴 레드삭스 역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1위인 뉴욕 양키스와 불과 2경기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상황입니다.]
[양 팀 모두 박빙의 경쟁을 하는 상황. 그래서 이번 시리즈의 승리가 모두 간절할 겁니다.]
[아, 마운드에 메츠의 에이스 알 라이터 선수가 올라오는군요.]
[올 시즌에도 여전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알 라이터 선수.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전략이 통하는 모습입니다.]
[발렌타인 감독의 전략이요?]
[네, 내야와 외야 모두 커버 가능한 전천후 유틸리티 루이스 로페즈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로스터에 투수 자리를 한 자리 더 만들고, 선발 일정을 상당히 여유롭게 돌렸어요. 오렐 허샤이저부터 알 라이터까지. 메츠의 선발진이 기량은 충분하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체력적으로 조금 힘든 점이 있었는데, 그걸 아주 훌륭하게 극복했습니다.]
[물론 야수들에게 상대적으로 부담이 실리기는 했습니다만 Kang, 프레스톤, 벤츄라, 에드가르도 등의 야수들이 훌륭하게 그 부담을 이겨냈어요.]
보스턴의 덕아웃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작년까지 프레스톤과 주전 우익수를 놓고 경쟁했던 부치 허스키였다. 시애틀로 트레이드됐었는데, 어느새 보스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늘 허스키는 라인업에 없나 보네.”
“오늘이 아니라 이번 시리즈 내내 안 나올걸.”
나의 중얼거림에 프레스톤이 답했다.
“응? 그걸 어떻게 알아?”
“쟤 저기서 지금 지명타자 하고 있잖아. 이번 시리즈는 우리 홈 경기라서 지명타자 없이 진행되는 시리즈고.”
“지명타자? 허스키 저 친구 수비 괜찮지 않았었나?”
“괜찮기는. 솔직히 중앙에 진호 네가 있으니깐 그나마 커버가 된 거지. 지금 허스키 상태로는 솔직히 글러브 끼고 그라운드에 나오는 것 자체가 민폐지.”
프레스톤이 독설을 쏟아냈다. 작년 자신이 훨씬 훌륭한 모습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밀려 그라운드에 서지 못했던 것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글러브를 끼고 그라운드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알 라이터가 우리를 향해 인사를 했다. 최선을 다해 외야를 지키지 않는 날은 없었다. 하지만 선발 날에도 저렇게 친절하게 웃어주는 알 라이터를 보고 있자면 최선 이상의 플레이로 답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생겨났다.
알 라이터의 피칭이 시작됐다. 7월 말까지 근 4개월. 평소였다면 20경기 130이닝 정도는 던졌을 알 라이터였지만, 적절한 6선발 로테이션으로 휴식일을 가졌던 결과 지금 시점에서 그가 소화한 경기는 17경기 114.1이닝. 그래서였을까? 무더위가 덮쳐오고, 시즌도 슬슬 막판으로 향하고 있었음에도 그의 구위는 시즌 초보다 오히려 더 강력했다.
뻐엉!!
94마일. 1회 초부터 강력한 속구가 보스턴의 타자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삼진, 볼넷, 그리고 병살타. 1회 초, 외야에 서 있던 나는 딱히 움직일 필요조차 없었다.
덕아웃으로 돌아와 곧바로 글러브와 모자를 벗었다. 단단한 헬멧. 그리고 암 가드와 풋 가드를 착용하고 나의 배트까지 뽑아 들었다. 오늘 나의 타순은 2번. 지난주 리햅을 끝내고 돌아온 헨더슨의 바로 뒤 타순이었다.
대기 타석. 자리에 앉아 마운드를 뚫어지라 바라본다. 그곳에는 그토록 바라던 라이브 볼 최강의 투수. 1999년의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천천히 몸을 풀고 있었다.
포수와 가볍게 주고받는 연습구도 절대 가볍지 않았다. inverted-W 계통의 역동적인 투구 동작. 마치 채찍을 휘두르듯 팔을 휘두르는 그 동작이야말로 180cm 투수치고는 작은 사이즈의 페드로가 90마일 후반대의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비결임이 틀림없었다.
어지간한 볼들은 커트해내고 아득바득 볼넷으로 누상에 나가는 헨더슨이었다. 40세 이제는 그야말로 야구 도사의 풍모를 풍기는 노장의 생존법. 로우 쓰리 쿼터로 뿌리는 페드로의 공들이 그런 헨더슨을 철저하게 분쇄한다.
부웅!!
“스트라잌!!”
자신 있게 한복판을 통과하는 97마일의 속구. 하지만 헨더슨의 배트는 그 공을 건드리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구위. 그리고 구속. 잠시 타석을 벗어난 헨더슨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부웅!!
“스트라잌!!”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헨더슨의 방망이를 피해 가는 빠른 공. 종전에 보여준 빠른 공과는 조금 다른 움직임이었다. 전광판의 숫자를 바라본다. 92마일. 투심이다.
헨더슨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마운드의 투수가 현 메이저 최강의 투수라면 헨더슨은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고의 리드 오프다. 단단하게 움켜쥔 배트가 매섭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삼구 삼진. 마지막 리키 헨더슨의 배트를 끌어낸 공은 다름 아닌 서클 체인지업이었다. 선구안만큼은 그야말로 귀신같은 헨더슨을 속인 공. 비록 부상으로 인한 4주간의 공백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리키 헨더슨은 결코 호락호락한 타자가 아니었다.
‘저기 서 있는 게 나였다면 칠 수 있었을까?’
장담하기 힘들었다. 타석의 헨더슨이 방망이를 움켜쥐고 성큼성큼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비어있는 타석. 나의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