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76화 (76/210)

# 76화.

291점의 사나이(3)

진호와 파멜라가 떠난 자리. 보리스가 진호의 대답을 곱씹었다.

사실 메츠의 단장 스티브 필립스의 제안은 보리스 자신에게는 크게 나쁠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당장 진호가 그들과 연장계약을 체결한다면 보리스 자신에게 떨어지는 수익은 320만 달러, 아니 협상에 따라 400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거둘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생각하기에 진호는 그보다 큰 계약을 얻어낼 잠재력이 충분했다. 하지만 어디 야구라는 것이 잠재된 재능만 가지고 되는 일이던가. 당장 신인왕을 차지하고 미래의 MVP 소리를 듣던 선수 중 제대로 된 FA 계약 한 번 하지 못한 채 사라진 이들이 수십이다.

그렇기에 보리스의 제안은 보리스 자신이 아닌 진호를 위한 제안이었다. 이제 막 변호사 자격을 따고 당장 학자금 대출을 걱정하던 애송이 시절, 덜커덕 자신을 믿어줬던 리키 헨더슨이 진호를 각별하게 생각했기에 베푼 특별한 호의였다.

“그렇게 진행해 달라니······.”

하지만 진호의 선택은 메츠였다. 그것은 보리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선택이었다. 연봉의 일부분만을 분배받는 보리스에게는 320만 달러와 최대 1,500만 달러였다. 하지만 당사자인 진호에게는 5,200만 달러와 2억 달러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2억 달러라는 돈은 겁쟁이조차 사자의 심장을 가진 전사로 만들기 충분한 금액이었다.

동양인들은 의리를 중요시한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런 이유였을까? 아니면 보리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었을까. 보리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뭐 어차피 이유가 중요한 건 아니지.”

중요한 것은 클라이언트인 진호의 의지였다. 물론 진호의 선택이 터무니없는 것이었다면 어떻게든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모험이 아닌 안정을 택하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이제 보리스가 해야 할 일은 그 선택 내에서 진호가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보리스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야구라는 종목이 만들어졌고, 최초의 프로리그인 메이저 리그가 탄생했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흘렀다. 그 기나긴 세월 속에서 사람들은 최고의 선수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 뻔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베이브 루스.

투수로서는 프론트 라이너. 그리고 타자로서는 유일무이. 실로 야구의 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최고의 선수는 정해진 상수였다. 하지만 야구의 신은 훌륭한 투수였으되 최고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종종 묻곤 했다. 최고의 투수는 누구인가. 과연 누가 최고였으며 어떤 것이 투수의 이상향인가.

많은 이들이 그 질문에 각기 다르게 답했다. 어떤 이들은 삼진을, 어떤 이들은 승수를, 어떤 이들은 평균 자책점을, 그리고 어떤 이들은 피홈런을. 각기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지표를 토대로 수많은 스탯을 창조했다. 하지만 그러한 이들이라 해도 결코 부정하지 않는 가장 강력한 투수의 이상은 존재했다.

‘매덕스처럼 던지는 랜디 존슨.’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를 풍미했던 통칭 4대 투수. 기나긴 메이저 리그의 역사 속에서도 이토록 돌출된 아웃 라이너가 거의 동시에 넷이나 존재했던 적은 매우 드물었다. 하나하나가 단순한 시대의 지배자를 넘어 역대 최고를 논할만한 투수들.

그들 중 그렉 매덕스는 최고의 컨트롤을 지녔고, 랜디 존슨은 최고의 강속구를 지녔다. 그렇다면 그들과 이름을 나란히 했던 저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지닌 것은 무엇이었을까?

마운드의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부드럽지만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동작. 그의 머리 뒤에 가려져 있던 오른손이 별안간에 튀어나온다. 최대 98마일의 빠른 공을 던지는 페드로다. 번개처럼 달려드는 공. 나의 배트가 빠르게 돌아갔다.

부웅!!

“스트라잌!!”

하지만 페드로의 포심이 마치 춤이라도 추듯이 나의 배트를 피해갔다.

몸쪽 높은 코스.

빠른 공의 위력이 가장 극대화되는 곳을 정확하게 공략하는 포심이었다.

‘젠장.’

제대로 맞는다면 장타를 허용할 수밖에 없는, 게다가 제구가 조금만 틀어져도 빈볼이 되버리는 위험한 코스였다. 다른 투수처럼 ‘설사 맞더라도 어쩔 수 없지.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선 네 잘못이야.’라는 마음으로 던진 공이 아니었다. 당연히 자신이 노린 곳으로 공이 들어갈 것이라는 자신 아래 나온 피칭.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그렉 매덕스처럼 정교한 제구를 갖추지도, 랜디 존슨처럼 100마일이 넘는 구속을 갖추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렉 매덕스에 버금가는 제구와 랜디 존슨에 버금가는 구속을 동시에 갖춘 투수였다.

‘그렉 매덕스처럼 던지는 랜디 존슨.’

99년의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역사상 그 어떤 투수보다 그 문장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투수였다.

[페드로 선수의 몸쪽 높은 공. Kang의 배트가 헛돌았습니다.]

홈플레이트 뒤, 포수 제이슨 베리텍이 페드로에게 빠르게 공을 던진다. 공을 받아든 페드로. 좋지 않은 기세, 좋지 않은 리듬감이다. 손을 들어 타임을 요청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때때로 이렇게 투수의 좋은 기세를 끊어주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옷깃을 털고 장갑을 조여 맨다. 마운드, 페드로의 표정은 여전히 가볍다. 문득 저 가벼운 얼굴에 긴장감을 심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망이를 움켜쥐고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마운드의 페드로가 두 번째 공을 준비했다. 부드러운 딜리버리. 머리 뒤에 숨겨져 있던 그의 손이 튀어나온다. 영상으로는 수백 번이나 지켜봤다. 그리고 한차례 직접 경험까지 했다. 물론 여전히 까다로운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직접 경험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확실히 달랐다. 페드로의 타이밍에 맞춰 나의 몸이 움직였다.

바깥 코스로 조금 낮게 들어오는 공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코스의 공. 움직이는 배트에 힘을 더했다. 그리고 빠르게 날아오던 공이 미묘하게 움직인다. 존 바깥쪽으로 스르륵 움직이는 공. 투심패스트볼이었다.

‘큭!!’

배트의 끄트머리를 스친 공이 강하게 뒤로 빠진다. 파울팁. 순식간에 볼카운트 0-2로 몰렸다. 마운드의 페드로는 여전히 여유롭다. 망설임 없이 세 번째 공을 준비하는 페드로. 타임은 없었다. 타석에서 배트를 움켜쥐고 그를 바라본다.

[볼카운트 0-2. 제 3구!!]

여전히 똑같은 자세로 페드로가 공을 뿌렸다.

뻐엉!!

움직이지 않는 배트. 페드로의 서클 체인지업이 존을 벗어났다.

[페드로의 바깥쪽 서클체인지업!! Kang이 침착하게 잘 골라냅니다.]

[페드로 선수의 서클체인지업 같은 경우 리그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공인데 Kang이 이걸 참아내네요. 대단한 선구안입니다.]

[심지어 볼카운트 0-2였거든요. 자칫하면 루킹삼진이 되는 상황에서 정말 침착하게 잘 대응했습니다.]

[하지만 볼카운트는 1-2 여전히 Kang에게 불리한 상황입니다.]

또 한 번 손을 들어 타임을 요청한다.

‘진짜 터무니없네.’

하나 정도 유인구가 나오리라는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타석에서 직접 본 페드로의 서클체인지업은 대기 타석, 그리고 덕아웃에서 지켜볼 때와는 달랐다.

이런 공을 지켜보고 공략한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마지막 순간 나는 그대로 루킹삼진을 당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홈플레이트 바로 앞에서 페드로의 서클체인지업은 마치 슬라이더처럼 급격하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루틴을 실행하며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조금 전 서클체인지업의 궤적을 그렸다. 들어오는 공이 체인지업임을 미리 알고 있다면 쳐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투수가 ‘나 지금 체인지업 던집니다.’라고 말을 하고 공을 던질 리는 만무했다. 속구를 예상하는 상황에서 저 공이 들어온다면? 제대로 된 타구로 연결되는 이미지가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네 번째, 이제는 슬슬 알 것도 같은 타이밍이었다. 페드로의 손에서 공이 튀어나오는 순간에 맞춰 나의 몸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바깥쪽 낮은 코스 빠른 공. 존에 살짝 걸치는 투심을 적절하게 걷어냈다. 볼카운트는 여전히 1-2.

빠른 공이라면 어떻게든 쳐 낸다. 체인지업이라면 어떻게든 걷어낸다. 단단히 각오를 다진 채 전신의 감각을 예리하게 세워 모조리 마운드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다섯 번째 공이 그의 손을 출발했다.

그리고 미묘하게 이질적인 움직임이 느껴졌다. 집중된 감각이 지금 페드로의 손을 출발한 공이 탑스핀 구질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공, 커브였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나름대로 궤적을 예측하고 배트를 휘둘렀지만 타이밍도, 공의 궤적도 모두 어긋났다. 페드로의 공이 나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젠장!!’

나의 멍청함에 화가 났다. 그토록 그를 공부했거늘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커브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다니. 마운드에 선 페드로의 분위기는 여전히 가벼웠다. 속이 부글거렸다. 그가 보여주는 저 여유야말로 나의 배트가 그를 위협하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쾅!!

덕아웃에서 헬멧을 내팽개쳤다. 처음 보여주는 과격함에 선수들이 약간의 놀람을 담아 나를 바라봤다.

프레스톤이 말없이 이온 음료를 건넸다. 시원한 음료가 들어가자 가슴에 맺혔던 짜증이 조금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지금 내가 보여주는 반응은 너무 과민한 반응이었다. 경기는 이제 고작 1회였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타자란 3번의 기회 중 한 번만 성공하더라도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는 직업이었다.

‘삼진 한두 번 당해본 것도 아니고, 진정하자고.’

아직 기회는 많았다. 그리고 지금은 쓸데없이 씩씩거리고 있는 것보다 덕아웃에서나마 투수를 지켜보는 쪽이 그 기회를 살리는 데에는 더 보탬이 되는 일이었다.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덕아웃 난간에 몸을 기댔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피아자, 배트를 멈춰세웠습니다만, 스트라이크!! 루킹 삼진입니다.]

[페드로 선수의 체인지업에 피아자 선수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습니다.]

[피아자 선수는 순간적으로 빠지는 공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어?’

삼구삼진. 내가 덕아웃에서 씩씩거리는 그 짧은 시간. 피아자가 루킹삼진으로 타석에서 물러났다.

경기가 이어졌다. 우리의 에이스 알 라이터는 분명 대단한 투수였다. 하지만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서 양키스와 1위 경쟁을 펼치는 보스턴의 타자들 역시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시즌의 절반 이상을 지난 상황에서 여전히 OPS 1.0을 넘기고 있는 괴물 유격수 노마 가르시아파라.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함께 공격력에서 메이저 리그 유격수 1, 2위를 다투는 그의 배트가 매서웠다.

딱!!

[보스턴 레드삭스의 4번 타자 노마 가르시아파라가 2회 초 메츠의 에이스 알 라이터를 상대로 선제 솔로 홈런을 기록합니다. 경기 스코어 1:0. 레드 삭스가 한 걸음 앞서 나가는군요.]

2회 초 1:0. 추가점은 없었다. 하지만 마운드에 올라온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1점이면 충분하다는 표정으로 메츠의 타자들을 무섭게 돌려세웠다. 존 올러루드, 로빈 벤츄라, 에드가르도 알폰조. 올 시즌 OPS 0.85 이상을 기록 중인 메츠의 강타자들이 줄줄이 삼진과 땅볼로 물러났다. 3회가 끝날 때까지 페드로는 단 하나의 출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피칭을 자랑했다. 3이닝 동안 무려 6삼진.

올 시즌 화끈한 방망이를 자랑하는 메츠의 타자들을 상대로 한 타순을 완벽하게 막았음에도 기뻐하는 기색 따윈 전혀 없었다. 마운드의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마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것처럼 담담하고 여유롭게 마운드를 내려갔다.

‘마음에 안 드네. 진짜.’

4회 말, 1:0. 나의 두 번째 기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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