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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77화 (77/210)

# 77화.

291점의 사나이(4)

바로 직전 경기까지 화끈한 타격을 자랑했던 메츠를 침묵시키는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무서운 활약이 계속됐다. 그리고 그것은 리키 헨더슨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7회 말.

벌써 두 번의 타석을 모두 삼진으로 물러난 리키 헨더슨. 그가 되뇌었다.

‘나는 아직 괜찮아. 저 녀석 대단한 녀석인 건 맞지만 그래 봐야 Dr. K 이상은 아니야.’

지금은 영락해버린 그 찬란했던 드와이트 구든을 떠올린다. 젊은 시절 그가 보여줬던 퍼포먼스는 헨더슨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투수의 그것이었다.

79년 자신이 데뷔한 이후 벌써 21시즌째였다. 셀 수 없이 많은 투수를 경험했지만, 헨더슨은 아직 그 이상의 투수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눈앞의 저 젊은 투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방망이를 들고 자세를 낮춘다. 아마 젊은 시절이었다면 저 긴장감 없는 녀석의 공을 그대로 담장 밖으로 날려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헨더슨은 너무 늙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장에게는 노장만의 생존법이 있는 법.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하는 것이 스트라이크 존이라지만, 헨더슨이 쌓아 올린 역사는 그 스트라이크 존을 판단하는 심판조차도 압박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것이었다.

뻐엉!!

존에 살짝 걸치는 아슬아슬하게 높은 공이다. 자세를 한껏 낮춘 헨더슨을 기준으로 본다면 높게 보일수도 있는 공. 심판의 판정이 한 박자 늦었다.

[볼!! 볼입니다. 페드로 마르티네즈 초구 볼!! 리키 헨더슨이 잘 참아내는군요.]

[헨더슨 선수, 21년간 2652 경기. 11729타석에서 삼진아웃은 1406개. 볼넷은 1952개입니다. 작년 커리어 최초로 3자리 수 삼진을 당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볼넷이 더 많습니다. 선구안이 굉장한 선수예요.]

[리키 헨더슨. 과연 여기서 7회까지 이어진 페드로의 그것을 깨트릴 수 있을까요.]

마운드의 페드로가 고개를 갸웃한다. 하지만 그 갸웃거림에 짜증은 없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여전히 가벼운 여유뿐이다.

‘이걸 안 잡아준다고? 그러면 뭐······.’

존의 복판으로 빠른 공이 파고 들어온다. 좋은 공이다. 헨더슨의 눈이 빛난다. 아무리 그의 기량이 쇠퇴했어도 이렇게 몰린 공을 놓칠 정도는 아니다. 헨더슨의 배트가 세차게 움직였다.

하지만

[빗맞은 타구, 파울, 파울입니다.]

배트의 하단을 스친 공이 홈플레이트 옆 파울존을 강하게 내려찍는다.

‘큭.’

마지막 순간 헨더슨의 몸쪽으로 훅 파고드는 움직임. 투심패스트볼이었다. 미묘한 박자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몰려 들어오는 공이 너무 반가웠기 때문일까. 헨더슨은 자신의 시야가 좁았다는 점을 통감했다.

볼카운트 1-1

세 번째 공이 날아들었다. 바깥쪽 코스 빠른 공이다. 아슬아슬한 코스. 하지만 지금까지 페드로가 보여준 포심의 움직임이라면 충분히 존에 걸치는 공이었다. 헨더슨이 배트를 돌렸다.

딱!!

타구가 3루 파울 라인을 벗어났다. 1-2.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전 그 공의 코스는 너무 절묘했다. 운이 조금 더 좋았더라면, 혹은 배트를 끝까지 잡아당기는 힘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지 몰랐다. 리키 헨더슨이 잠시 타석에서 벗어나 고개를 젓는다.

괜찮다. 자신이 늙고 노쇠했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헨더슨은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런 공을 계속 던지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노리고 또 노리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공이 올 수밖에 없다. 야구란 본래 그런 게임이다.

헨더슨이 타석에서 네 번째 공을 기다렸다. 바깥쪽 아슬아슬한 낮은 코스로 들어오는 98마일의 빠른 공.

파울.

몸쪽 높은 코스 투심 패스트볼

파울.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는 커브를 골라냈고, 또다시 들어오는 빠른 공을 커트해낸다. 볼카운트는 2-2. 슬슬 마운드에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얼굴에서도 여유가 사라진다. 여유가 사라진 자리에 나타난 것은 약간의 짜증. 헨더슨의 혓바닥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리키 헨더슨이 페드로 마르티네즈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집니다.]

[자 페드로 마르티네즈 선수. 이제 8번째입니다.]

마운드의 페드로가 여덟 번째 공을 뿌렸다. 그리고 타석에 선 헨더슨의 눈이 빛을 발한다.

‘지금이다!!’

페드로의 결정구 서클 체인지업. 앞선 타석 헨더슨을 스윙 삼진으로 물러나게 했던 바로 그 공이었다. 페드로의 머릿속에 공의 궤적이 그려진다.

딱!!!

83마일 체인지업을 향해 헨더슨의 배트가 아름다운 호를 그렸다. 하지만 그라운드에 웃고 있는 것은 리키 헨더슨이 아닌 페드로 마르티네즈였다. 빗맞은 타구가 2루수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간다. 내아 팝플라이. 마운드의 페드로가 다시 웃었다. 그의 퍼펙트는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리키 헨더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 투수가 그 Dr.K에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대단한 투수라는 사실을 말이다.

***

헨더슨이 내야 팝플라이로 물러났다. 헨더슨이 마지막까지 들러붙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망할 서클체인지업 같으니.

[7회 말 1아웃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Kang이 들어옵니다.]

[1회 말, 삼진, 그리고 4회 말에는 잘 맞은 타구가 외야수의 호수비에 막혔던 Kang입니다.]

[4회의 그 타구는 정말 아쉬웠습니다.]

[뭐, 아무리 잘 맞은 타구라도 10번 중 3번은 잡히는 것이 야구니깐요.]

[어쨋거나 오늘 유일하게 외야로 나갔던 공을 쳐낸 타자인 만큼 마운드의 마르티네즈 선수도 충분히 경계하고 있을겁니다. 사실 이쯤 되면 그걸 의식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하긴, 7회 1아웃까지 그게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죠. 아마 오늘 경기의 최대 고비가 되지 않을까 싶군요.]

‘커브, 포심, 투심, 체인지업.’

머릿속에 그의 선택지들을 단단히 새겨넣는다. 앞선 이닝 그 보여줬던 특유의 궤적들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마운드의 페드로가 크게 와인드업했다. 이제는 알 것 같은 타이밍. 그의 손에서 빠르게 공이 흘러나왔다.

바깥쪽 높은 코스 빠른 공. 아슬아슬한 코스, 상당히 어려운 공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페드로가 던지는 공 특유의 테일링이 이 공을 지금보다 반개 이상 바깥쪽으로 빠져나가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뻐엉!!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1-0 좋은 출발이다. 마운드에 선 마르티네즈의 얼굴에는 여전히 지금 자신이 퍼펙트 게임을 앞두고 있다는 긴장감을 찾기 힘들다. 투수 일생일대의 대기록조차도 저 투수를 긴장하게 만들 수 없다니. 배트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어디 기록이 깨지고도 그렇게 태평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마운드의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두 번째 공을 뿌렸다. 몸쪽 낮은 코스 빠른 공. 세차게 돌아간 배트가 공의 윗면을 때렸다. 파울이었다.

‘쳇, 투심이라니.’

홈플레이트 바로 앞에서 급변하는 듯한 움직임. 투심 패스트볼이었다. 두 번의 타석에서 몇 번을 경험했건만 여전히 그의 포심과 투심을 구분하기는 힘들었다.

바로 이어지는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투구. 존 밖으로 빠지는 몸쪽 높은 공을 흘려보낸다. 이어지는 커브를 쳐냈지만 1루 파울라인 너머 내야석 깊은 곳으로 공이 떨어졌다.

볼카운트 2-2

다섯 번째 페드로가 와인드업했다.

‘서클체인지업, 혹은 커브.’

전가의 보도인 서클체인지업. 혹은 허를 찌르는 커브가 나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몸의 타이머를 반 박자 늦춘다. 기습적으로 빠른 공이 들어온다면 위험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오늘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패턴대로라면 그는 결정적인 순간 빠른 공이 아닌 서클체인지업을 선택했다.

채찍처럼 쏘아지는 그의 팔. 하지만 거기서 튀어나오는 공은 느렸다. 나의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 서클 체인지업이다. 하지만 페드로의 체인지업은 예상했다고 무조건 쳐낼 수 있는 공이 아니었다. 그 공이 그리는 궤적은 좌타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살짝 들린 오른발이 지면을 밟는다. 그에 맞춰 전진하는 나의 몸. 그 와중에 머리와 상체는 못으로 박은 듯 흔들리지 않는다. 부드러운 힘의 이동. 전신의 힘이 모인 배트의 끝에 페드로가 던진 누런 공이 명중했다.

딱!!

빠른 타구.

‘쳇.’

하지만 발사각이 좋지 않다. 너무 낮다. 게다가 타구의 속도는 너무 빨랐다. 1점이 아쉬운 상황이다. 2루타와 3루타의 차이는 컸다. 1루 베이스를 향한 나의 발걸음에 힘을 더한다.

[Kang!! 쳤습니다!! 강한 타구!! 좌중간으로 빠르게 날아갑니다.]

[큼지막한 타구!! 넘어가나요?]

[아!! 아쉽게 펜스 상단에 직격합니다. 힘은 충분한데 높이가 부족하네요.]

[보스턴 좌익수 트롯 닉슨 선수가 빠르게 커버에 들어갔습니다만 조금 늦습니다. 타구가 워낙 빨랐어요.]

[그사이 주자는 2루 지나 3루로.]

[곧바로 홈으로 송구하는 트롯 닉슨 선수.]

[Kang이 3루에서 멈춰섭니다. 3루타!! 7회 말, 1아웃. Kang이 마르티네즈 선수의 퍼펙트게임을 저지합니다.]

드디어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퍼펙트가 깨졌다. 이걸로 녀석도 어느 정도 흔들릴 터. 아직 우리에게는 8개의 아웃 카운트가 남아 있다. 역전의 가능성은 충분했다. 암 가드와 풋 가드를 벗어 넘기고 마운드를 응시했다.

‘응?’

마운드의 마르티네즈가 희미하게 웃는다. 7회 말 퍼펙트가 깨진 투수가 웃음이라니. 이해할 수 없는 웃음이었다. 7월 말 뜨거운 더위에도 불구하고 소름이 돋았다. 마운드의 괴물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조차도 그저 재밌어할 뿐이다.

타석에 피아자가 들어왔다. 올 시즌 대부분 경기에서 나의 후속 타자로 나오던 마이크 피아자. 리그를 통틀어 손에 꼽을만한 타격으로 언제나 나를 든든하게 만들어 주던 그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든든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현실로 이뤄졌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5구 째, 피아자가 마르티네즈의 커브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뒤를 이어 올라온 존 올러루드의 타구도 내야를 넘기지 못했다.

7회 말. 잔루 3루.

경기가 계속된다. 퍼펙트가 깨졌음에도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다른 투수에게 마운드를 넘기지 않았다. 8회가 끝난 시점에서 투구 수 109개.

하지만 9회에도 마운드에 오른 것은 도미니카에서 온 그 남자였다.

-보스턴 레드삭스 vs 뉴욕 메츠. 페드로 마르티네즈 2:0 완봉승.-

-페드로 17삼진 괴력투. 유일한 안타는 7회 말 강진호의 3루타 뿐.-

-7회 말,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퍼펙트 게임을 깨트리는 강진호의 3루타!!-

-페드로 마르티네즈 ‘퍼펙트? 경기가 끝날 때까지 퍼펙트가 진행 중이었던 것도, 그게 깨졌던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팀이 승리해서 기쁘고, 좋은 경기를 했다는 생각뿐이다.’-

-페드로 마르티네즈 ‘아쉽지 않다. 어차피 선수 생활은 앞으로 많이 남았고, 기회는 언젠가 또 올 것으로 생각한다. 최선을 다해 좋은 공을 던졌고, 그렇게 던진 좋은 공이 안타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잘 때린 타자를 칭찬할 수밖에.’-

3타수 1안타(3루타). 그리고 0득점 0타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안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우리는 저 페드로 마르티네즈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타석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 한 경기에서 선발 투수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젠장.’

그러나 한 경기에서 가장 막강한 것은 선발 투수이지만, 시리즈 전체 모든 경기에 영향을 발휘하는 것은 타자다. 지금 내가 느끼는 무력감은 이제 남은 두 경기, 덕아웃에서 껌이나 씹고 있을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느끼게 될 것이다.

아직 보스턴과의 시리즈는 두 경기나 남아 있었다.

-강진호 보스턴과의 2차전 4타수 3안타 1홈런 대활약!!-

-보스턴과의 3차전 승리를 결정짓는 피아자의 쐐기 3점 홈런.-

-뉴욕 메츠, 위닝 시리즈!! 2차전과 3차전 압도적 승리.-

-강진호 2경기 연속 홈런포 가동!! 3타수 1안타 1홈런.-

-Kang 17경기 연속 출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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