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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78화 (78/210)

# 78화.

네번째 에이스(1)

보리스와의 대화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 파멜라가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진호씨, 대체 왜 메츠에 남겠다고 한 거야? 어차피 자기가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해준다고 해서 메츠에서 자기를 계속 데리고 있는 다는 보장도 없는 거잖아.”

맞는 말이었다. 내가 의리를 지킨다고 메츠가 의리를 지키리라는 보장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메츠가 내민 계약은 FA 계약이 아니었다.

서비스 타임을 포함한 연장계약.

나 같은 경우 작년과 올해 거의 풀타임으로 시즌을 치뤘던 만큼 슈퍼2의 대상에 포함될 것은 확실했다. 그것은 3년 차에도 최저연봉을 받고 뛰어야 하는 일반적인 선수들과 달리 총 4번의 연봉협상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 4번의 연봉협상은 말 그대로 연봉협상이다. FA처럼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3년 차, 4년 차, 5년 차, 6년 차 각각 역대급 기록을 써 내려 간다고 해도 최대 3천만 달러 정도? 그리고 이후 FA에서 올 시즌 이후 있을 알렉스 로드리게스급의 역대 최고 FA계약을 맺는다면 연 2천만 달러 수준의 수입이 가능할 것이다.

즉 서비스 타임 5년을 포함한 7년 동안에 내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은 약 7천만 달러였다. 그리고 메츠가 제안한 금액은 4천만 달러. 뭐 이후에 있을 클럽옵션까지 포함하게 될경우 금액은 9천만 달러와 5.200만 달러로 한층 더 차이가 나게 된다. 약 3천만 달러에서 3,800만 달러에 달하는 커다란 금액 차이. 큰 돈이었다.

하지만 보리스의 말처럼 2억 달러와 5천200만 달러라는 극단적인 차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메츠가 내민 제안이 나쁜 제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니 지금 시점에서는 어마어마하게 훌륭한 조건이자, 뉴욕 메츠라는 팀으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이전 생애을 떠올리면 알 수 있듯이 야구선수의 미래라는 것은 확정하기 힘들었다. 갑작스러운 부상 하나에도 훅하고 꺼질 수 있는 것이 선수 생명이다. 그런데 메츠는 그런 위험을 다 끌어안고 나라는 선수에게 확정적으로 7년간 4천만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물론 이후 클럽옵션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조건이긴 하지만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리스크를 끌어안았다는 점에서 영 이해하지 못할 조건은 아니었다.

“물론 그런 보장이 없기는 하지. 그런데 사실 서비스 타임이 6년이나 남은 선수한테 고액 다년계약을 제시했다는 것 자체가, 구단에서 손을 내민 거나 마찬가지거든. 메츠가 저런 금액을 제시한다는 건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내 미래의 가치가 그것보다 클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실제로 메츠의 기대 대로 성장한다면 어지간한 일이 아닌 이상에서야 프랜차이즈인 나를 팔아넘길 수는 없지. 심지어 팀이 리빌딩에 들어간다고 해도 젊은 코어 프랜차이즈를 파는 건 정말 미친 짓이니깐.”

“흐음, 그러니깐 이제 막 단역을 벗어나려는 배우한테 조금 낮은 개런티로 7시즌짜리 드라마 주연을 맡기는 셈인거네. 그걸 거절하게 되면 5시즌 더 단역으로 뛰어야 하는 상황인 거고.”

“뭐, 그것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그리고 또 연장계약을 맺게 될 경우 좋은 점은 메츠에서 나를 어지간해서는 절대 마이너로 내려보내거나 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7년 4천만 달러의 계약은 설사 내가 FA자격을 얻지 못하더라도 유효하다. 즉 그들 입장에서 나는 7년간 최대한 써먹어야 하는 자원이 되는 셈이다.

게다가 메츠는 향후 몇 년간 팀에 꾸준하게 상당한 투자를 넣는 팀이었다. 물론 그 투자들이 대부분 이름 있는 노장들을 불러오는 데 사용하는 멍청한 짓으로 이어지는 점은 문제였지만 그것은 본래 역사에서 올 시즌 헨더슨과 허샤이저의 활약이 스티브 필립스 단장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 역사는 조금 뒤틀렸다. 올 시즌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높은 효율을 보인 것은 팀에서 육성한 신인인 나와 프레스톤이었다. 본래라면 다른 팀으로 가서 올스타급의 활약을 보일 두 명의 선수가 메츠의 코어로 남는다? 그것만으로도 향후 몇 년간 뉴욕 메츠는 컨텐더급의 전력을 보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메츠의 소재지가 뉴욕이라는 점 역시 매력적이었다. 뉴욕이라는 대도시는 야구를 가장 사랑하는 도시였고, 그렇기에 야구 선수를 전국구 스타로 발돋음시켜줄 수 있는 아주 튼튼한 발판이었다. 또한, 메츠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톰 시버라는 걸출한 투수를 제외하고는 변변한 프랜차이즈가 없다. 불멸의 명성을 얻기에 이보다 좋은 조건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팀 옵션을 삭제, 혹은 금액 조정만 조금 가능하다면 최고의 조건이야.’

마지막으로 금전적인 부분에서도 이 연장계약은 사실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에게는 지금 당장의 천만 달러가, 7년 후의 1억 달러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제 슬슬 오르기 시작하는 애플, 구글, 아마존 등의 주식을 사서 10년을 묵혀두더라도 20배 이상으로 성장한다. 특별히 주식에 대해 자세히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닷컴버블에서 살아남을 세계적인 대기업들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향후 몇 년은 FA선수들의 계약금이 상승하는 시점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폭으로 그 기업들의 주식이 크게 뻥튀기되는 시점이었다.

모든 조건을 고려할 때 지금의 연장계약을 거절할 이유따윈 없었다. 그렇기에 이제 남은 것은 스티브의 조건에서 얼마나 더 좋은 조건을 끌어내는가였다. 그리고 그것은 보리스의 협상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남은 시즌 나의 활약이 어떻게 지속하느냐에 달려있었다.

올 시즌 더 화려한 활약을 해야 할 훌륭한 요인이 하나 더 만들어진 셈이었다.

***

오늘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타석에 섰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대포처럼 거대한 카메라들이 나를 응시한다. 평소와 조금 다른 점이라면 나와 투수에게 양분됐어야 할 카메라들중 상당수가 내 등 뒤의 관중석을 향하고 있다는 차이 정도였다.

“진호 씨!! 한 방 날려버려!!”

배꼽이 보이도록 질끈 묶은 붉은 티셔츠. 그리고 짧은 숏팬츠. 조금은 요란한 복장의 파멜라가 그 요란함 이상으로 요란하게 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KBO에서 뛰어본 적은 없었지만, 그곳에서 뛰는 선수들이 치어리더의 응원을 받을 때 심정을 체감하게 해준다랄까? 차이점이라면 그 치어리더의 몸값이 이 경기장에서 가장 높다는 차이 정도일 것이다.

마운드에 선 투수의 표정이 사납다. 다만 그것이 투쟁심인지, 아니면 질투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 사나운 표정의 투수가 표정만큼이나 사나운 기세를 담아 공을 뿌렸다.

딱!!

[넘어갔습니다!! 시즌 27호 홈런!! Kang 지난 몬트리올과의 1차전 이후 네 경기만의 홈런포입니다.]

[하반기, 무서운 기세로 달려나가고 있는 Kang. 작년 같은 경우 5월부터 시즌을 시작했음에도 시즌 막판 체력적으로 지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만, 올해는 오히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네요.]

[이제 남은 경기는 37경기. 큰 변수가 없다면 30홈런은 무난하게 달성할 것 같군요. 게다가 그렇게 되면 Kang의 올 시즌 도루 개수는 이미 42개로 30-30 기록을 달성하게 됩니다. 현재 메이저 리그에 30-30 기록은 총 서른다섯 번. 달성한 선수의 숫자는 스물둘에 불과합니다.]

[저는 Kang의 최근 홈런 페이스를 본다면 어쩌면 40홈런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작년 알렉스 로드리게스 이후 4번째 40-40클럽 멤버가 탄생하는 셈이 되겠군요.]

페드로 마르티네즈와의 승부 이후 나의 타격감은 도무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시 체력이었다.

시즌 초반 빡빡한 원정 경기들로 가득했던 일정이 지금에 와서는 상당한 이점으로 돌아왔다.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원정 일정. 그리고 길게 이어지는 홈 시리즈. 체력적으로 퍼지기 쉬운 가장 무더운 8월의 일정이 널널하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물론 체력적인 부분에서 혜택을 받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우리 메츠의 선수들은 전반적으로 8월 기록이 괜찮은 편이었다. 프레스톤만 하더라도 8월 무려 7개의 홈런을 몰아치며 26홈런을 기록했다.

안 그래도 올 시즌 내셔널리그의 신인들 상태가 작년과 비교하면 전반적으로 그리 좋지 못한 덕분에 신시내티의 마무리 스콧 윌리엄슨과 피츠버그의 이루수 워렌 모리스 정도만이 신인왕 경쟁에서 프레스톤에게 비교될만했는데 이번 달 폭풍 같은 홈런 기록 덕분에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나나 프레스톤 정도는 아니어도 다른 선수들 역시 타격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마찬가지였다.

홈런을 치고 돌아온 덕아웃. 선수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환영한다. 어차피 이기고 있는 경기였기에 나의 솔로홈런이 경기에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홈런은 홈런이었다.

“이대로 오늘 경기 끝내면 이제 1경기 차이인가?”

“애틀랜타 놈들이 오늘 경기에서 진다면 그렇겠지.”

“휴스턴이 힘을 좀 내줘야 할 텐데 말이야.”

8월 한 달. 우리가 거둔 성적은 16승 9패. 6할4푼의 승률이었다. 하지만 91년 이후 단 한번도 지구 우승을 놓치지 않았던 애틀랜타 놈들 역시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남들은 한 명도 가지기 힘든 리그 에이스급 투수를 셋이나 보유했던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그에 못지않은 투수 하나가 더 튀어나왔다. 1,2,3,4 선발이 모두 리그에이스급이라는 터무니없는 위용. 시즌 종료까지 37경기를 남긴 시점에서 벌써 80승. 녀석들은 시즌 세자릿수의 승리 페이스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

올 시즌, 내셔널 리그 최고의 투수는 고작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애리조나에 4년 5340만 달러를 받고 들어간 랜디 존슨이었다. 본래 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하나였던 그는 자신은 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하나가 아니라 최고의 투수 그 자체라는 것을 여실하게 증명했다. 만으로 35세. 이제는 슬슬 기량이 쇠퇴해야할 시기의 랜디 존슨은 1995년 자신의 커리어 하이에 필적하는 피칭을 선보이며 리그를 초토화시켰다.

내셔널리그의 사이영을 사이좋게 나눠 먹던 애틀랜타의 3인방을 압도하는 피칭. 하지만 애틀랜타는 역시 애틀랜타였다.

케빈 밀우드.

이제 메이저 3년 차. 24살의 어린 투수. 빠른 구속, 나이에 걸맞지 않은 완성도 높은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그리고 매 경기 7이닝 이상을 뛸 수 있는 내구력과 리그에서 가장 낮은 피안타율까지. 1999년의 케빈 밀우드는 랜디 존슨이라는 메이저 역대급 투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런 빌어먹을 괴물이 하필 애틀랜타의 선발 투수라 이거네.’

선발진에 사이영 컨텐더급의 리그 에이스 투수만 4명. 터무니없어도 너무 터무니없는 투수력이다. 물론 그들이 보기에는 우리 팀 역시 터무니 없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2번부터 7번까지 6명의 타자가 20홈런 이상. 그중 2명의 타자는 이미 30홈런을 넘겼고 추가로 3명이 30홈런 페이스로 달리고 있다. 게다가 OPS로만 살펴본다면 1번부터 7번까지 모조리 0.85를 넘기는 괴물 같은 타선.

덕분에 한국 언론에서는 이번 시리즈를 일컬어 이렇게 표현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대 뉴욕 메츠. 뚫리지 않는 방패와, 모든 것을 뚫는 창의 대결. 내셔널 리그 동부지구의 승자를 가리는 최후의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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