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네번째 에이스(2)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역시 자신들의 지구 우승을 위한 마지막 장애물이 우리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중간 선발 로테이션에 땜빵을 집어넣는 강수까지 둬가며 우리와의 3연전을 준비했다.
톰 글래빈, 케빈 밀우드, 그렉 매덕스로 이어지는 최강의 선발라인. 1차전, 첫 번째 관문인 톰 글래빈이 마운드에 섰다. 작년 생에 두 번째 사이 영을 수상하며 커리어 하이의 성적을 기록했던 톰 글래빈은 올 시즌 초반, 작년의 활약이 무색할 만큼 크게 부진했었다. 하지만 시즌 중반을 넘어 이제 끄트머리에 달한 지금, 그의 피칭은 그 부진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본래의 강력한 사이영 컨텐더로 돌아와 있었다.
메이저 리그 흑마구의 대명사 톰 글래빈. 느린 구속에도 불구하고 리그에이스급 투수로 활약한다는 점에서 같은 팀의 그렉 매덕스와 닮은꼴이라 불리는 그였지만, 실제 그와 매덕스의 플레이는 완전히 달랐다.
뻐엉!!
헨더슨의 배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심판의 손 역시 올라오지 않았다. 초구 볼. 리키 헨더슨이 다시 타격 자세를 잡는다. 올 시즌 0.312의 타율에 0.419의 출루율을 기록 중인 헨더슨이었다. 게다가 장타율 역시 4할 중반에 9개나 되는 홈런을 기록하며 한방의 파괴력 역시 만만치 않음을 증명했다. 제아무리 리그에이스급 투수인 톰 글래빈이라고 해도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긴 인터벌 타임. 마운드의 톰 글래빈이 느긋하게 두 번째 공을 뿌렸다.
뻐엉!!
멈춰선 배트. 이번에도 역시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는다. 2구 연속 볼. 타석의 헨더슨이 재촉이라도 하듯 타격 자세를 풀지 않는다. 하지만 마운드의 톰 글래빈은 여유롭다. 마운드 아래로 내려가 로진백을 한번 두드리고 손가락도 한번 훅 불어 준다. 그리고 왼손 검지와 중지에 침을 바르고 유니폼에 스윽 닦아내는 동작까지 끝낸 뒤 다시 마운드 위로 올라왔다.
제3구. 부드러운 동작으로 시작된 피칭의 마지막. 그의 왼손이 무언가를 낚아채듯 번개처럼 움직인다. 빠른 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느린 속구였다.
헨더슨이 또 다시 공을 흘려보냈다.
“스트라잌!!”
하지만 판정은 스트라이크. 마운드의 톰 글래빈이 처음으로 웃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여전히 긴 인터벌. 20초에 가까운 시간을 마운드 밖에서 보낸 톰 글래빈이 마운드로 올라온다.
“잠깐만요.”
헨더슨이 적절하게 글래빈의 호흡을 끊어줬다. 타석 밖에서 몸을 풀어주는 헨더슨. 그가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지루한 승부.
파울, 볼, 파울. 그리고 제7구.
딱!!
빗맞은 타구가 일루수 정면으로 흐른다. 내야 땅볼 아웃.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헨더슨의 표정이 좋지 않다.
‘젠장.’
대기 타석에서 그들의 승부를 지켜본 나 역시 헨더슨의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를 잘 알 수 있었다.
[내야 땅볼로 물러난 헨더슨의 뒤를 이어 타석에 Kang이 들어옵니다.]
[현재까지 27홈런 42도루 0.313의 타율을 기록 중인 Kang. 과연 오늘 톰 글래빈을 상대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마운드의 톰 글래빈이 느긋하게 움직인다. 나의 타이밍을 교란하고 자신의 타이밍을 가지고 오기 위한 의도적인 느긋함. 애초에 공을 던져야 성립되는 타자와 투수의 승부에서 타자는 어디까지나 수동적으로 대비하는 역할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피칭을 기다리며 긴장의 끈을 최대한 팽팽하게 잡아당겨야 했다.
마침내 초구, 와인드 업이 시작된다. 부드러운 피칭 폼의 마지막, 마치 물고기를 낚아채듯 재빨리 움직이는 톰 글래빈의 왼손에서 누런 공이 날아오른다.
바깥쪽 낮은 코스 빠른 공.
‘빠졌어.’
반쯤 돌아가던 배트를 멈춰 세운다. 공 반개 정도 빠지는 공이었다. 당연히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볼카운트 1-0.
또다시 세월을 낚아 올리는 어부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하는 톰 글래빈. 마운드에서 내려가 로진백을 두드리고, 침을 바르고, 침을 닦아내고, 공을 받아 꼼꼼하게 손으로 문지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끝낸 글래빈이 마운드에 올라온다.
잠깐의 정적.
그가 움직이기 직전 나의 손이 먼저 올라왔다.
‘좋았어.’
별것 아닌 신경전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그런 거로 자잘하게 이득을 보려고 하는 이상 나 역시 가만히 보고 있을 이유는 없다. 옷깃을 정돈하고 배팅 장갑을 조여 맨다. 다시 타석에서 그를 바라본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많은 위대한 투수들과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의 이질적인 투수다. 그 이질적인 투수가 두 번째 공을 던져왔다.
이번에도 역시 바깥쪽 낮은 코스 빠른 공이다. 종전과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공. 하지만 달랐다. 좋지 않은 코스. 하지만 그대로 둔다면 어차피 스트라이크가 될 공이다. 찰나의 망설임. 나의 배트가 세차게 돌아갔다.
딱!!
‘큭, 너무 멀어.’
배트의 끄트머리에 슬쩍 걸린 공. 몸통의 회전력을 최대한 살린 스윙으로 공을 최대한 당겨봤지만 역부족이었다. 타구가 1루 파울라인 밖으로 흘러나갔다. 하지만 쳐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선 타석. 헨더슨이 이미 보여주었다. 오늘 심판은 이정도 코스에 스트라이크 콜을 부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
톰 글래빈.
2번의 사이영 상과 10번의 올스타. 305승 203패의 기록으로 명예의 전당 첫 턴 91.9%를 기록한 위대한 투수. 그러나 지금 그가 보여주는 공의 위력은 그런 위대한 투수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90마일이 채 되지 못하는 느린 공. 밋밋한 변화구. 그리고 쪼잔하기까지 한 인터벌 타임.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같은 시기 메이저 리그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위대한 성적을 거둔 네 명의 투수들을 두 번이나 제치고 사이 영을 수상했다. 그렉 매덕스와는 달랐다. 매덕스의 공은 느렸지만, 강한 악력에서 나오는 높은 회전수로 인해 그 구위만큼은 리그에서 손꼽힐 만했다. 반면 톰 글래빈의 공은 말 그대로 똥볼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똥볼러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투수가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자신의 공이 매우 안 좋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AA시절 톰 글래빈은 내심 자신 있던 변화구를 마이너 유망주가 고작 몇 타석 만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홈런을 날려버리는 일을 경험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내 공은 재능있는 선수들에게는 통하지 않는구나.’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마 거기서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톰 글래빈은 달랐다.
‘그렇다면 나의 장점은 뭐지?’
그렇게 메이저리그에 바깥볼 성애자 좌완 흑마구 투수가 탄생했다. 물론 그 역시 단순히 노력만으로 두 번의 사이영을 타낸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투수의 재능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 역시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재능이 있었다. 정밀한 제구력. 그리고 뻔뻔하기까지 한 배짱과 멘탈. 집요하게 바깥쪽을 물고 늘어지는 그의 피칭은 공 반개 단위로 존 안팎을 오갈 수 있는 정밀한 제구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게다가 이 정밀하고 집요한 바깥쪽 승부는 의외의 효과를 발휘했는데, 그것은 그의 공이 타자 뿐 아니라 심판까지도 헷갈리게 만든다는 점이었다.
‘스트라이크인가? 볼인가?’
심판은 기계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고작 공 반개, 혹은 반의 반개 차이로 존을 오가는 그의 공을 모두 정밀하게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톰 글래빈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오늘 구심자리에 선 메이저 3년차 심판 월렛은 공을 판정하는 눈이 형편없었다.
***
반쯤 흘러나간 배트를 멈춰 세웠다. 체인지업이었다. 타이밍의 교란을 통해 재미를 보는 체인지업. 얼핏 생각하기에는 강속구 투수들의 전유물 같았지만, 마운드에 선 저 톰 글래빈의 체인지업은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빠른 공, 더 빠른 공, 미친 듯이 빠른 공을 구사하는 강속구 투수와 달리 느린 공, 더 느린 공, 환장하게 느린 공 구사하는 톰 글래빈. 마치 100마일짜리 강속구라도 던질 것 같이 날카로운 움직임으로 던지는 72마일짜리 체인지업은 결코 호락호락한 공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결같이 나를 유혹하는 꿋꿋한 바깥 코스 공들은 스스로 정해둔 나의 존을 헷갈리게 만들 만큼 정교했다. 하지만 톰 글래빈이 제구의 마법사라면 나 역시 선구안 만큼은 누구 못지 않게 자신이 있었다. 쳐낼만한 공은 쳐내고 빠지는 공은 철저하게 내버려 둔다면 결국 살아나가는 것은 내가 될 터였다.
‘빠진다!!’
바로 직전 1/4개 정도 존에 걸쳤던 볼보다 반개 이상 더 빠지는 공이었다. 확실한 볼. 나의 배트가 멈췄다.
뻐엉!!
‘어디 그런 똥볼로 나의 발을 얼마나 막을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아주 3루까지 훔쳐주겠어.’
톰 글래빈이 좌완투수라지만 충분히 단독 도루를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오늘 브레이브스의 포수는 자디 로페즈는 철저한 공격형 포수로 어깨는 리그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체인지업을 던지는 타이밍만 포착한다면 3루까지도 충분히 훔칠 수 있었다. 방망이를 던지고 1루를 향해 발걸음을 뗐다.
“스트라잌!! 아웃!!”
“엥?”
순간 내가 지금 잘못 들은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심판을 바라봤다. 이제 막 삼십대 중반 정도 됐을까? 마이너를 거쳐 메이저리그의 심판 마스크를 쓴 것 치고는 보송보송한 심판의 얼굴이 단호하다.
[스트라이크, 루킹 삼진입니다. 메츠의 Kang을 삼진으로 잡아내는 톰 글래빈.]
[Kang은 존 밖으로 빠진 공이라고 확신을 한 모양입니다. 방금 1루로 걸어 나가려는 것 같았죠?]
[사실 제가 보기에도 조금 전 판정은 조금 석연치 않긴 합니다. 거의 공 반개 이상 빠지는 볼이었거든요. 저런 공까지 잡아주면 타자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체 눈이 달리기는 한 것일까? 방금 이 공이 스트라이크라니. 하지만 이미 내려진 판정은 어쩔 수 없었다.
‘젠장, 이래서 존 판정은 기계가 해야 된다니깐.’
치밀어 오르는 짜증. 보통 삼진을 당했을 때 올라오는 분노가 그런 공을 놓친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면 지금 이것은 저딴 공에 스트라이크 콜을 한 심판에 대한 분노였다. 아니 대체 어떻게 저런 함량 미달의 심판이 마이너리그를 뚫고 메이저리그의 심판까지 오게 된 것인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덕아웃으로 돌아와 벤치에 털퍼덕 앉았을 때, 헨더슨이 시원한 이온 음료 하나를 건넸다.
“열 받냐?”
“아니, 대체 어떻게 저런 공에 스트라이크 콜을 하는 거죠? 진짜 눈이 달리기는 한 건가?”
“뭐, 심판도 속은 거지. 너무 열 받지 마. 어차피 오심이야 경기를 하다보면 종종 나오는 거고, 그런 거에 일일이 화내면 게임 못하지.”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저기 저 여우 놈이랑 경기할 때는 이정도는 각오해야 해. 오늘 심판이 평소보다 더 특별한 머저리인 건 맞지만 뭐 경기 하다보면, 저정도 판정은 다른 심판들도 종종 내리더라고.”
“아니, 애초에 저런 공까지 잡아주면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글쎄······.”
따악!!
“저기 피아자는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은데?”
타석의 피아자가 톰 글래빈의 초구를 잡아당겨 홈런으로 만들었다. 좌측 담장을 크게 넘어가는 대형 홈런.
‘아!!’
그 순간 나는 여우를 사냥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