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네번째 에이스(3)
5회 초 스코어는 2:1 우리가 한 점 앞서고 있었다. 첫 번째 득점을 만든 것은 마이크 피아자. 그리고 두 번째 득점을 만든 것은 프레스톤이었다.
노아웃 주자 1, 2루. 타석의 리키 헨더슨이 조금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방망이를 쥐고 있었다.
딱!!
4구째 바깥쪽 높은 코스로 들어오는 공에 배트를 휘두른 리키 헨더슨. 평소라면 참고 지켜봤을 공이었다. 하지만 집요하게 외곽을 파고드는 톰 글래빈의 공과 심판의 이상한 스트라이크 판정을 고려한다면 휘두를 수밖에 없는 공이었다. 결과는 뻔했다. 빗맞은 타구가 높게 떠올라 이루수 정면으로 향했다.
내야 뜬공.
리키 헨더슨이 타석에서 물러났다.
1아웃 주자 1, 2루 상황에서 나의 두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2루 주자는 유격수인 레이 오도네즈. 발이 느린 주자가 아니었다. 적당히 외야로 빠지는 안타 하나면 추가점을 만들 수도 있는 상황.
톰 글래빈의 피칭이 시작됐다. 초구, 바깥 코스 낮게 깔려 들어오는 공을 흘려보냈다.
“스트라잌!!”
아슬아슬하게 걸쳤다고 볼 수도 있는 공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공은 아니다. 두 번째 조금 전보다 반개 정도 더 빠지는 코스의 체인지업. 이번에도 역시 배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히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는다. 볼카운트 1-1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공이 톰 글래빈의 손을 떠났다. 볼, 파울, 그리고 볼.
빠른 구속도, 압도적인 구위도, 대단한 변화구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 글래빈은 대단한 투수였다. 그를 대단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리 볼 판정을 받더라도, 아무리 많은 볼넷을 쌓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바깥쪽에 공을 집중시키는 집요함, 그리고 볼카운트가 아무리 불리해지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배짱이었다.
볼넷?
톰 글래빈에게 볼넷이란 피할 수 없는 세금일 뿐이었다. 최고의 제구력을 갖춘 투수로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9이닝당 3.06개나 되는 볼넷의 숫자는 그가 볼넷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상대가 두려워하지 않는 지점, 상대방이 충분히 감수하고 있는 지점을 공략하겠다 달려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내가 볼넷으로 출루한다고 해도 그것은 톰 글래빈에게 그저 충분히 감수하고 있는 일에 불과했다.
마운드 위의 톰 글래빈이 여유롭게 움직인다. 볼카운트는 3-2. 풀카운트다.
보통의 투수라면 1아웃 만루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든 스트라이크를 던질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리고 나는 그가 다르다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밖으로 반개 정도 삐져나온 빠른 공이 날아든다.
볼넷의 위기에서도 자신의 피칭을 고집하는 뚝심 있는 공이었다. 게다가 코스 역시 까다로운 바깥쪽 낮은 코스.
살짝 들린 오른발을 힘차게 내디뎠다. 85kg의 무게가 실린 전진력, 그리고 둔부에서 시작된 몸통의 회전력. 이 모든 힘이 양손의 배트에 오롯하게 실렸다.
강력한 어퍼 스윙.
배트 끄트머리에 닿은 공을 끝까지 잡아당겼다.
딱!!
존 밖으로 빠진 공을 억지로 쳐내느라 자세가 완전치 못했다. 평소 스윙이 10이라면 7이나 8 정도. 하지만 괜찮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높게 뜬 타구가 우측 담장을 쓱 넘어갔다.
[홈런!! 홈런입니다. 5회 초 Kang의 석 점 홈런!!]
[와우, 방금 이 건 완전히 존 밖으로 빠지는 공이었는데 이걸 이렇게 넘기네요. 대단합니다.]
[마이너 시절 대부분의 툴에 플러스 평가를 받으면서도 파워 만큼은 평균 이하라고 평가받았었는데 지금 이 타격을 보면 그 평가가 완전히 잘못된 평가라고밖에는 말할 수가 없네요.]
[시즌 28호 홈런입니다. 바로 이전 경기 카디널스와의 3차전에 이어 2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는 Kang. 이제 30홈런까지 2개의 홈런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남은 경기 숫자는 36경기. 이제는 정말 30-30은 확정적이라고 봐야 할 것 같고 40-40도 충분히 노려볼 만할 것 같습니다.]
[최근 두 명의 선수가 40-40을 기록했습니다만, 사실 이게 보통 어려운 기록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 오직 세 명밖에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에요.]
톰 글래빈이 강력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자신이 약한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다. 한 걸음만 내디딘다면 커다란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에서조차 안전을 추구하는 신중함. 그렇기에 톰 글래빈을 깨부수는 타자는 오직 그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영역조차도 파괴할 수 있는 종류의 힘을 가진 타자들뿐이었다. 그것은 일류의 타자라고 해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종류의 기량은 아니었다.
그 누구도 일류임을 부정할 수 없는 리키 헨더슨 역시 톰 글래빈을 상대로는 통산 0.160/0.222/0.200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다. 반면 마이크 피아자는 달랐다. 그가 톰 글래빈을 상대로 기록한 통산 성적은 0.360/0.467/0.667. 100타석 가까운 표본으로 이토록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하는 것은 상대가 마이너 레벨의 투수라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 피아자는 자기가 칠만하다 싶은 공은 설사 그 공이 존 밖으로 돌아다니는 공이라도 주저 없이 배트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홈런을 친 프레스톤 역시 비슷했다. 물론 프레스톤 놈은 단순히 존에 걸친 공인지, 아니면 존 밖으로 빠진 공인지 구분하는 능력 자체가 부족한 거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톰 글래빈을 두들겨 패기 위해선 뛰어난 수준의 배드볼 히팅 능력이 필요했다. 본래 그것은 나와는 결이 다른 능력이었다. 나는 굳이 분류한다면 리키 헨더슨과 흡사한 타입이었다. 뛰어난 선구안으로 공을 골라내고 좋은 공을 강하게 쳐 내고, 좋은 공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볼넷으로 출루해 주자로서 투수를 흔드는 타입.
하지만 리키 헨더슨과 나는 달랐다. 지금 리키 헨더슨이 좋지 않은 공을 못 치는 것이라면 나는 좋지 않은 공을 안 치는 것이었다. 아직 젊은 나에게는 리키 헨더슨이 잃어버린 파워 라는 선택지가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본래라면 그 둘은 별반 다를 바가 없어야 했다. 애당초 좋은 공을 골라낼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안 좋은 공을 칠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안 좋은 공에 스트라이크콜이 나오는 특별한 상황이었다.
나의 뒤를 이어 타석에 올라선 피아자가 백투백 홈런을 터트렸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 홈런이었다. 어지간한 투수라면 기가 팍 꺾이고 수그러들만한 상황. 톰 글래빈이 존 올러루드를 볼넷으로 내보내고 이어지는 로빈 벤츄라에게 내야 땅볼을 유도해 병살을 만들었다.
경기가 이어졌다. 이미 제법 벌어진 경기였다. 하지만 톰 글래빈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자신의 피칭을 이어갔다. 무려 4피홈런. 진작에 나가떨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바깥쪽으로 자기 공을 던지는 톰 글래빈. 그는 그 집요함으로 추가실점을 막아내며 8회까지 마운드를 지켰다.
하지만 점수를 만드는 것은 투수가 아닌 타자였다. 그리고 브레이브스의 타선은 우리의 에이스 알 라이터와 필승조를 뚫어내기에 부족했다.
-뉴욕 메츠,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1차전. 뉴욕 메츠의 6:2 승리!!-
-강진호 선수의 작년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 톰 글래빈을 상대로 한 28호 홈런포!!-
-FX의 유명 스포츠 캐스터 카트리나 에반스 ‘강진호 선수가 지금 페이스대로라면 40-40도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뉴욕 메츠 마침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1경기 차!!-
-마이크 피아자 ‘지금 우리 머릿속에는 이기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바비 콕스 감독 ‘많은 것들이 변해도 결코 변치 않는 일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브레이브스의 지구 우승이죠.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오직 월드 시리즈 우승뿐입니다.’-
***
애틀랜타와의 2차전.
랜디 존슨과 함께 리그에서 가장 혁혁한 활약을 보이는 애틀랜타의 젊은 피 케빈 밀우드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어제 마운드에 섰던 톰 글래빈과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의 에이스 투수. 1999년의 케빈 밀우드는 젊은 시절의 로켓맨을 연상케 하는 활약을 보이며 내셔널리그를 평정하고 있었다. 98마일을 오가는 포심과 빼어난 슬라이더. 매 경기 7이닝 이상씩을 소화하는 터프함까지. 시즌 초반 톰 글래빈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브레이브스가 동부지구 1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젊은 투수의 활약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뻐엉!!
96마일 포심 패스트볼이 미트에 틀어박혔다. 단순히 표기되는 숫자보다 한층 더 강해 보이는 포심 패스트볼. 타석의 헨더슨이 웃는다.
[1회 초 리키 헨더슨이 케빈 밀우드를 상대로 볼넷을 얻어내며 출루에 성공했습니다.]
[어제 경기 5타수 무안타로 부진했던 헨더슨 선수. 오늘은 출발이 좋습니다.]
[헨더슨의 뒤를 이어 Kang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어제 톰 글래빈을 상대로 4타수 1안타 1홈런 1볼넷을 얻어냈던 Kang입니다. 오늘 브레이브스의 또 다른 에이스 케빈 밀우드 선수를 상대로는 어떨지 기대되는군요.]
헨더슨의 리드폭이 크다. 어제 타석에서 꽁꽁 묶여있었던 덕분에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마운드의 케빈 밀우드의 양손이 글러브에 모였다. 어제 저 마운드에 섰던 톰 글래빈과는 완전히 다른 속도감. 타자의 컨디션이 올라오기 전에 단번에 제압하겠다는 기세가 느껴진다.
[아!! 1루 주자 달립니다!!]
케빈 밀우드가 공을 뿌리는 바로 그 순간 헨더슨의 몸이 2루를 향해 튀어나갔다. 투수의 호흡을 훔치는 완벽한 타이밍. 마운드의 케빈 밀우드가 동요했다.
‘이거 봐라?’
아직 어린 투수, 그리고 1회 초 몸이 덜 풀린 상황이었기에 나온 실수였다. 그리고 난 투수의 실수를 놓치지 않는 좋은 타자였다. 가운데로 몰려오는 공을 향해 세차게 배트를 휘둘렀다.
딱!!
찌르르 울리는 양손의 느낌. 생각보다 공의 변화가 컸다. 포심과 슬라이더. 사실상 투 피치로 올 시즌 내셔널리그를 정복할만한 구위였다.
[Kang 초구 타격!! 이루수의 머리를 넘는 큰 타구!! 리키 헨더슨 계속 달립니다!!]
타구가 그리 멀리 뻗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베이스 러닝을 하는 주자는 리키 헨더슨이었다. 1회 초 체력적으로 가장 훌륭한 상태의 리키 헨더슨이 3루 베이스를 스치듯 밟고 달려나갔다. 깔끔한 주루. 브레이브스의 우익수 브라이언 조던이 달려와 공을 잡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그리고 홈 송구. 제법 괜찮은 어깨였다. 단번에 홈까지 날아드는 브라이언의 송구. 하지만 리키 헨더슨이 더 빨랐다. 과감하게 포수 자비 로페즈를 두들기며 홈플레이트를 밟는 리키 헨더슨.
자비 로페즈의 자세가 무너진다. 그리고 브라이언의 송구가 뒤로 빠졌다.
[어? 어!! 어!?]
기회였다. 1루에 멈춰있던 나의 발이 2루로 향한다. 전력을 다한 질주. 아직이다. 자비 로페즈의 손이 바닥을 더듬는다. 나의 오른발은 이미 2루 베이스를 밟았다. 멈추지 않는다. 그대로 3루를 향해 달려나갔다.
[브레이브스의 송구 미스!! Kang!! 2루 지나 3루까지!!]
엉거주춤한 자세의 로페즈가 3루를 향해 공을 뿌린다. 평소와 반대 방향으로 들어가는 벤트 레그 슬라이딩. 나의 등이 3루 베이스를 가렸다.
뻑!!
‘됐어!!’
등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통증. 자비 로페즈의 송구가 나의 등을 가격했다. 바닥을 구르는 야구공. 브레이브스의 삼루수 치퍼 존스의 시선에 당혹감이 감돈다.
“세이프!!”
1회 초 노아웃 주자 3루.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리키 헨더슨이 엄지를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