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81화 (81/210)

# 81화.

네번째 에이스(4)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갑작스러운 목소리. 브레이브스의 중심타자 삼루수 치퍼 존스였다.

“허슬 플레이도 좋지만, 몸 생각해야지.”

“글쎄, 이정도 가지고 무리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워워, 이러지 말라고. 싸우자고 말 건 거 아니니깐 말이야. 시합은 시합이고, 어차피 같은 리그 사람인데 친하게 지내자고. 친하게.”

나의 대답을 부드럽게 받아낸 치퍼 존스가 내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냈다. 약간의 오싹함. 경기 중에 상대 팀 선수에게 이렇게 끈적하게 나올 이유는 없었다.

‘아니야, 치퍼 존스면 복잡한 사생활로 유명하잖아.’

‘잠깐, 그런데 여자랑 복잡하다고 해서 꼭 이성애자라는 법은 없지.’

슬쩍 홈 쪽으로 반걸음 정도 걸음을 옮겼다.

“뭐, 이번 시리즈 끝나고도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보자고.”

“어휴 까칠 하기는.”

타석에 마이크 피아자가 들어왔다. 외야수의 잘못된 송구로 인해 다시 득점권에 주자를 보낸 케빈 밀우드였다. 에이스급 활약을 보인다고는 하지만 이제 풀타임 2년 차. 경험이 많은 투수는 아니었다. 충분히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다. 마운드의 밀우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웅!!

“스트라잌!!”

하지만 그런 나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밀우드가 존의 상단을 통과하는 강력한 공으로 피아자의 스윙을 끌어냈다. 전광판에 98이라는 숫자가 올라왔다. 빠른 공에 강한 피아자였다. 하지만 직접 경험했듯 밀우드의 포심은 결코 쉬운 공이 아니었다.

‘동요가 없네.’

“훌륭한 투수야. 공도 훌륭하고 성격도 대담해. 게다가 투쟁심도 높아서 쉽게 꺾이지 않지.”

“수다를 좋아하나보네.”

“응? 아냐, 저 녀석 얼마나 과묵한데. 하루 온종일 말 한마디도 못 듣는 날이 있다니깐 글쎄.”

“아니, 저쪽 말고 당신 말이야.”

“응? 나? 나야 뭐 그냥저냥 평범한 수준이지.”

나에게 작업을 거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말이 많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치퍼 존스가 말을 이어갔다.

“슬슬 우리도 세대교체를 할 시기가 오고 있어. 그런 의미에서 저런 에이스가 떡하고 나와 준 건 굉장히 좋은 징조란 말이지.”

치퍼 존스의 입에서 밀우드에 대한 자랑질이 쏟아졌다. 높은 향상심, 팀 내에 롤모델이 될 만한 훌륭한 멘토들. 빠른 학습 능력.

“내가 장담하건대 2000년대에 가장 강력한 투수는 저 녀석이 될 게 확실하다고.”

어림없는 소리였지만 굳이 정정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마운드의 케빈 밀우드가 두 번째 공을 뿌렸다.

딱!!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를 걷어내는 시원한 스윙. 하지만 부족했다. 타구가 아슬아슬하게 1루 파울라인을 넘어갔다. 동시에 치퍼 존스의 자랑도 케빈 밀우드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연속 지구 우승으로 넘어갔다.

“우리 지난 8년이 대단하긴 대단했어. 물론 그중 4년은 나의 활약 덕분이긴 했지만 말이야. 실제로 죽어라, 지구 우승만 했지 반지는 끼지 못하던 우리 팀이 처음으로 반지를 낀 건 이 몸이 로스터에 합류한 다음이었잖아?”

“대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오, 드디어 대꾸하는군. 뭐 특별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모처럼 이렇게 만났는데 MVP 후보끼리 이야기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뭐 기껏해야 한 3위나 4위 정도 하겠지만 말이지.”

“글쎄, 그거야 남은 시즌 다 치러봐야 아는 이야기 아닐까?”

나의 대꾸에 치퍼 존스가 씨익 웃었다. 젠장. 그의 말이 맞았다. 현실적으로 내가 MVP를 수상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성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치퍼 존스가 나보다 9개 더 많은 홈런을 기록 중이기는 했지만, 대신 내가 타율이 조금 높았고, 볼넷과 도루 쪽은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게다가 개인 성적만으로 따졌을 때 현재 리그에서 가장 돌출된 아웃 라이너는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였다.

하지만 둘의 소속팀인 세인트루이스와 시카고 컵스는 현시점에서 현실적으로 포스트 시즌 진출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봐야 했다. 그리고 MVP는 어지간해서는 팀을 승리로 이끈 선수, 즉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팀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 의미에서 애틀랜타, 메츠, 휴스턴, 그리고 애리조나의 선수 중 하나가 MVP를 수상할 가능성이 컸다.

애틀랜타의 경우 치퍼 존스의 독주였다. 수비까지 포함한다면 앤드루 존스 쪽이 더 나았지만 유감스럽게도 99년 현재 MVP 투표는 타, 출, 장, 홈런, 도루, 타점, 득점 등의 클래식 스탯이 좌우하는 시기였다. 또한, 휴스턴의 경우 모든 면에서 제프 배그웰을 따라올 선수가 없었다. 물로 성적만 본다면 나도 만만치는 않았다. 30-30을 넘어 어쩌면 40-40이 가능할지도 모르는 역대급 페이스. 하지만 우리 메츠에는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타자들이 너무 많았다. 40홈런을 노리는 피아자와 30홈런을 넘긴 로빈 벤츄라, 에드가르도 알폰조와 존 올러루드 그리고 프레스톤도 30홈런을 목전에 두고 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40-40을 기록한다고 해도 기자들의 투표성향에 따라 MVP를 수상하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시카고 컵스와 세인트루이스가 무난하게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한다는 가정이 성립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애당초 60홈런을 넘기는 괴물들과 클래식 스탯으로 경쟁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마운드의 케빈 밀우드가 세 번째 공을 던졌다. 존을 가로지르는 과감한 포심 패스트볼. 마이크 피아자의 배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갔다.

딱!!

높게 뜬 타구가 내야를 넘어 외야로 향했다. 그 사이, 나는 홈플레이트 쪽으로 세 걸음 나가 있던 발걸음을 회수해 3루 베이스를 밟았다. 좌익수 방면. 약간은 아슬아슬한 타구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최고의 주자다. 다른 이에게는 부족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충분한 거리다. 전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높게 떠오른 피아자의 타구가 제랄드 윌리엄스의 글러브에 쏙 들어간다. 그리고 그 순간 3루 코치의 신호가 떨어졌다.

“GO!!”

홈플레이트를 향한 빠른 질주. 하지만 나의 그런 질주가 무색하게도 제랄드 윌리엄스의 송구는 터무니없이 느렸다. 뭐 나야 좋았다. 별다른 충돌 없이 무난하게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피아자의 희생플라이가 나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1회 초. 원 아웃 2:0.

동부지구의 선두를 결정짓는 2차전. 우리가 경기를 이끌어나가기 시작했다.

“진호, 잘했어!!”

“멍청한 애틀랜타 놈들 표정 좀 보라고. 아예 송구할 엄두도 못 내는구만.”

덕아웃 동료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아직 시즌이 많이 남은 상황이긴 했지만, 어찌 됐건 시즌 초부터 그토록 바라왔던 지구 1위를 탈환할 기회였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마운드의 케빈 밀우드가 그렇게 쉽게 승리를 내줄 수 없다는 자신의 의지를 피칭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존 올러루드가 삼진으로 물러난 데 이어 후속 타자인 로빈 벤츄라가 유격수 앞 땅볼로 물러났다. 그리고 마운드에 옥타비오가 올라왔다.

***

[자, 애틀랜타와 메츠의 시리즈 2차전 경기. 메츠의 선발투수 옥타비오 도텔 선수가 올라왔습니다.]

[올 시즌 선발로 시작해 현재는 불펜으로 뛰고있는 옥타비오 도텔 선수입니다만, 오늘 선발로 예고됐던 불독 오렐 허샤이저를 대신해 마운드에 올라왔습니다.]

[소식에 의하면 오렐 허샤이저 선수가 가벼운 담이 왔다고 하는군요.]

[아무래도 오렐 허샤이저 선수 같은 경우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가벼운 담이라도 방심할 수 없긴 합니다.]

옥타비오의 올시즌은 빈말로도 그리 좋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다섯 번째 선발로 확정되기 직전 입단한 오렐 허샤이저로 인해 그의 자리는 확실한 다섯 번째 선발에서 바비 존스와 다섯 번째 선발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위치로 떨어졌다.

거기까지만 하더라도 상황은 조금 나빠졌을 뿐 지금처럼 암울하지는 않았다. 옥타비오의 재능은 아직 다 개화하지 않았다. 바비 존스의 기량은 옥타비오보다 조금 높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실낱같은 차이에 불과했다. 시즌을 치르며 경험을 쌓는다면 충분히 뒤집힐 수 있는 차이였다. 그리고 실제로 5월 중순부터 옥타비오는 바비 존스를 따돌리고 5선발 경쟁에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제 좀 피나 싶었던 그의 신세가 지금처럼 처량해진 것은 지난 7월 중순부터였다.

4점 중반대의 평범한 5선발, 혹은 여섯 번째 땜빵 선발 투수로 활약하던 옥타비오에게 닥친 불행. 그것은 다름 아닌 트레이드였다. 사실 4점 중반대의 평균 자책점은 5선발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문제는 메츠가 올 시즌 매우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메츠는 오클랜드에게 마이너 유망주 둘을 내주고 계약이 반년 남은 즉전 선발투수 케니 로저스를 데리고 왔다. 그렇게 옥타비오는 땜빵 선발 겸 불펜투수로 완벽하게 떨어졌다.

‘오늘이 이번 시즌 마지막 선발등판일지도 몰라. 후회 남지 않게 최선을 다하자.’

다행스럽게도 타선이 1회부터 2점의 점수를 만들어 주었다. 아주 안심할 수 있는 점수는 아니다. 하지만 득점 지원을 등에 업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분명 달랐다.

타석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1번 타자 제랄드 윌리엄스가 들어왔다.

‘최소한 6회까지는 내가 완벽하게 막아보겠어.’

홈플레이트 너머 피아자가 미트를 벌렸다. 몸쪽 높은 코스 빠른 공. 피아자가 미트를 통해 이야기를 걸어왔다. 옥타비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공이었다. 덕아웃에서 몸은 이미 충분히 풀어 두었다. 97마일 빠른 공이 홈플레이트 깊숙한 곳을 찔렀다.

뻐엉!!

“스트라잌!!”

시원한 포구음. 갑작스러운 선발등판이었지만 몸은 나쁘지 않았다. 이틀 전 구원등판으로 1이닝 던졌던 것이 일종의 불펜 피칭과도 같은 역할을 한 것 같았다.

[초구 몸쪽 빠른 공 스트라이크!! 1회 초부터 96마일의 빠른 공입니다.]

[옥타비오 선수 언제봐도 시원한 패스트볼입니다. 마이너 시절부터 빠른 공 하나만큼은 메이저 레벨이라고 꾸준히 인정받아 왔어요.]

몸쪽 높은 코스 빠른 공에 살짝 뒤로 물러난 제랄드 윌리엄스. 그렇다면 이제 교과서적인 바깥쪽 낮은 공이 등장할 차례였다. 옥타비오가 두 번째 공을 준비했다.

‘무리하면 안 돼. 오늘은 길게 던져야 해.’

부드러운 딜리버리. 수만 번의 연습으로 완성된 공이 바깥쪽 낮은 코스로 파고든다.

‘좋았어!!’

오늘따라 마음먹은 대로 잘 들어가는 공이 옥타비오가 노린 코스로 정확하게 빨려 들어갔다.

“스트라잌!!”

순식간에 0-2의 볼카운트가 만들어졌다. 타석의 제랄드가 잠시 물러나 자세를 가다듬는다. 옥타비오는 한참 좋았던 호흡이 잠깐 끊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오늘 자신의 기세는 잠깐의 휴식 정도로 끊길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제랄드가 다시 타석에 들어왔다.

절레절레

피아자의 리드에 옥타비오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포심이 매우 좋았다. 0-2의 볼카운트. 굳이 좋지 않은 슬라이더를 사용할 이유는 없었다. 반개 정도 빠지는 빠른 공. 타자의 배트가 나와도 좋고, 나오지 않아도 좋은 코스를 향해 옥타비오가 공을 던졌다.

따악!!

***

중요한 경기였다. 그렇기에 2선발인 오렐 허샤이저의 결장이 뼈아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목에 담이 걸려 고개도 제대로 돌리지 못하는 투수를 마운드에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래도 옥타비오라면 어느 정도 버텨줄 수 있는 녀석이었다. 그는 분명 메이저에서도 수준급의 기량과 잠재력을 가진 투수였다. 2000년대 14년간 13개 팀을 떠돌며 어지간한 팀의 셋업 투수급의 기량을 꾸준히 보여줬던 옥타비오. 그가 던진 세 번째 공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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