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82화 (82/210)

# 82화.

네번째 에이스(5)

선두 타자의 홈런. 그리고 이어지는 타자들의 연속 안타. 1회가 끝나는 시점에서 옥타비오가 내준 점수는 무려 4점에 달했다.

덕아웃으로 돌아온 옥타비오의 표정이 침울했다.

‘젠장, 안 좋은데.’

의기소침이라니. 차라리 분노하는 쪽이 나았다.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킬망정 그래도 육체에는 힘을 더해준다. 하지만 저렇게 기가 죽어버리는 것은 부정적인 효과만 가지고 올뿐이다. 투수용 점퍼를 입는 것조차 잊고 있는 녀석에게 점퍼를 건넸다.

“어? 아, 고마워.”

“이봐, 옥타비오 그날 기억나?”

“그날?”

“세인트 루시 시절에 네가 4이닝 동안 삼진을 9개나 잡으면서 퍼펙트로 막았던 그 날 말이야.”

옥타비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젠장, 그 날에 비교하면 지금 이건 아무것도 아니니 힘내라 이거냐?”

세인트 루시 시절 4이닝을 퍼펙트로 막았던 그 날은 옥타비오에게는 결코 유쾌한 날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다. 4이닝을 퍼펙트로 막고 5회 두 개의 아웃 카운트를 잡는 동안 무려 7실점을 한 기억이 유쾌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더 유감인 점은 그 날 옥타비오의 컨디션은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좋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옥타비오에게 지금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히 그 날의 7실점에 비하면 오늘 1이닝 동안 4실점 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아냐, 아냐. 그냥 그때 전력으로 던지는 네 공은 진짜 죽여줬었다고 이야기하려고 그러는 거야.”

“죽여주기는 무슨. 고작 4이닝 던지고 지쳐서 어쩔 줄 몰랐었지. 프로 무대에서 체력 분배하는 건 생각도 안 하고 진짜 무식하게 던지던 시절이었지.”

“그래도 체력이 떨어지기 전 네 속구에 타자들이 방망이 붕붕 돌리던 건 짜릿했었잖아.”

“그거야 뭐, 마이너리그 그것도 어드벤스드 싱글A였으니깐.”

“에이, 어차피 거기서 뛰던 애들이 올라온 곳이 빅리그인데 다를 게 뭐 있겠어? 물론 거기서 뛸 때보다 성장이야 했겠지. 그런데 성장한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런가?”

의기소침 해있던 옥타비오의 목소리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좋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이러다 또 금세 푹 하고 기가 죽어버리는 것이 이 옥타비오라는 녀석이었다.

“그렇다니깐. 솔직히 네가 컨디션 좋을 때 던지는 포심패스트볼은 진짜 무섭다고. 지금 저쪽 선발 투수인 케빈 밀우드의 속구가 대단하다고들 하는데 내가 보기엔 네 속구도 만만치 않아.”

사실이었다. 비록 케빈 밀우드보다 변화구의 구위, 그리고 경기를 끌어나가는 뚝심은 조금 부족했지만, 옥타비오가 던지는 포심패스트볼의 위력만큼은 분명 저 케빈 밀우드에게도 못지않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조금 부족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야말로 메이저리그에서 선발로 성공하기 위한 필수조건들이었다.

‘하지만 전력을 다한다면 한 타순, 혹은 두 타순 정도 버티기는 충분해.’

옥타비오 놈이 마운드에서 하고 있는 생각이야 뻔했다. 어떻게든 선발로 길게 이닝을 먹어 보겠다는 생각.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옥타비오에게 그렇게 요령 좋은 완급조절 따위의 일은 어울리지 않았다. 이놈은 그저 전력으로 자기가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공만 주구장창 던지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놈이었다. 물론 선발로 나온 이상 긴 이닝을 먹어주는 것은 좋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긴 이닝은커녕 당장 롱릴리프가 등판해야 할 판국이었다.

2회 초, 우리의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옥타비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꾸준히 건넸다. 그 모든 이야기가 종국적으로 노리는 것은 그가 쓸데없이 경기를 운용하려는 마음을 없애고 그냥 1이닝, 1이닝에 최선을 다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평소였다면 이런 나의 시도에 불쾌함을 표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옥타비오는 첫 이닝 터무니없는 피칭 덕분인지 정신적으로 상당히 몰린 상태였다.

“확실히 내가 전력으로 던지면 괜찮기는 하지.”

“그러니깐. 솔직히 3년 전에 그렇게 던지다가 힘들어진 건 맞지만 그 때에 비하면 너도 체력적으로 많이 좋아졌잖아. 지금이라면 더 오래 그렇게 던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선발로 많은 공을 던진다는 것은 단순한 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설사 빅유닛이나 로켓맨이라고 해도 선발로 등판하는 경기 110개의 공을 모두 전력으로 던지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옥타비오의 경우 실제 그렇게 던진다고 해도 워낙에 레퍼토리 자체가 단조롭기에 오랜 이닝을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4이닝 간 퍼펙트를 기록하고 7점을 기록했던 세인트 루시 시절과 지금은 달랐다. 지금 불펜에는 그 당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불펜들이 대기 중이었고 덕아웃에는 작전 펼치기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발렌타인 감독이 버티고 있었다.

1회 4점. 이미 옥타비오에게 주어진 기회는 다 사용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마 앞으로 한 번 더 실점 위기를 맞는다면 그대로 교체될 확률이 농후했다. 그렇게 올라온 불펜이 옥타비오보다 좋은 투수일 확률은 지극히 낮았지만 말이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 그 시절에 비교하면 체력적으로 많이 좋아진 건 사실이야.”

옥타비오가 팔랑거리는 귀가 나의 말에 반응했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주자 1루 상황에 프레스톤이 타석에 들어섰다. 최강의 7번 타자. 무려 시즌 27개의 홈런을 친 7번 타자다. 다른 팀이었다면 벌써 중심타자로 기용되는 것이 당연했을 성적.

부웅!!

“스트라잌!!”

부웅!!

“스트라잌!!”

딱!!

그리고 그 최강의 7번 타자가 병살타를 기록하며 두 개의 아웃 카운트를 적립시켰다. 그리고 이어지는 8번 타자는 OPS 0.631로 자신의 타격 커리어 하이를 기록 중인 레이 오도네즈. 작년까지 꾸준히 OPS 5할 중후반대를 기록하던 그는 올 시즌 처음으로 6할이 넘는 OPS를 기록 중이었다. 솔직히 말해 전혀 기대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대가 되건 안되건 다음 타자는 대기 타석으로 나가야 했다. 투수용 점퍼를 벗지 않은 옥타비오가 대기 타석에 섰다.

딱!!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초구 내야 팝플라이. 2회 초 케빈 밀우드가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2회 말. 옥타비오가 다시 마운드에 섰다. 마운드로 오르는 그의 표정이 비장했다. 빠른 공. 그리고 더 빠른 공. 옥타비오의 포심패스트볼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타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본래 그리 강하지 못한 애틀랜타의 타선이었다. 심지어 8번으로 시작하는 하위타선. 작심하고 지금만 던지겠다고 던지는 옥타비오의 공을 제대로 공략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삼진, 그리고 또 삼진.

2회 말 2아웃 상황. 선두 타자 홈런을 기록했던 제랄드 윌리엄스가 다시 타석에 섰다. 한차례 홈런을 기록했던 만큼 자신감으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옥타비오의 초구를 직접 경험하는 순간 싹 사라졌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던지는 공 하나하나에 전력을 다하는 옥타비오는 강했다. 2회 말 옥타비오가 17개의 공을 던져 세 명의 타자를 모조리 삼진으로 잡아냈다. 불안하던 마운드가 안정됐다.

점수는 여전히 2:4.

남은 것은 이제 우리가 점수를 만들어 내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메츠가 지금까지 가장 잘해 온 일이었다.

투수 타석으로 시작된 3회 초. 타석의 옥타비오가 평범한 투수다운 스윙을 보여주었다. 삼구 삼진. 그리고 뒤를 이어 타석에 들어선 리키 헨더슨. 1회 초, 케빈 밀우드를 괴롭혔던 그가 또다시 집요하게 그를 물고 늘어졌다. 벗어나는 공을 철저하게 골라내며 괜찮은 공만을 공략하는 리키 헨더슨. 하지만 케빈 밀우드의 강력한 구위가 그의 시도를 번번이 무위로 돌렸다.

제8구. 케빈 밀우드가 던진 슬라이더를 헨더슨이 흘려보냈다.

뻐엉!!

[리키 헨더슨!! 첫 번째 타석에 이어 두 번째 타석에서도 또다시 볼넷을 얻어냅니다.]

[쉽지 않은 공이었는데 정말 잘 참아내네요.]

[1아웃 1루 상황. 1회 초 안타와 실책으로 3루까지 진루했던 Kang이 타석에 들어옵니다.]

[4:2. 큰 거 한방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점수 차입니다. 최근 Kang의 홈런 페이스가 매우 좋거든요. 케빈 밀우드 선수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겁니다.]

아웃 카운트 하나가 추가됐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첫 번째 타석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의 두 번째 타석.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모습대로라면 1회 초와 같은 실수가 또 나오는 것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1루의 헨더슨이 제법 넓은 리드폭을 가져가며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뛰겠다 말하는 것 같은 리키 헨더슨. 마운드의 케빈 밀우드가 태연하게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퀵모션, 그러니까 슬라이드 스텝으로 공을 던지는 것은 구속은 몰라도 구위와 제구에서 크게 손해 보는 것을 각오하고 던지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렉 매덕스 같은 투수는 도루는 철저하게 포수에게 맡긴 채 오직 피칭에만 집중하곤 했다. 아마 1회 주자에게 정신이 팔렸던 실수에 그렉 매덕스가 직접 조언이라도 해준 게 아닐까?

바깥 코스 빠른 공. 1루의 헨더슨이 2루로 달렸다.

‘안 돼!!’

함정이었다. 스윙을 통해 포수의 송구를 방해하기도 힘들었다. 배트가 닿지 않는 바깥쪽 99마일의 공. 미리 준비하고 있던 포수가 2루를 향해 공을 뿌렸다.

뻐엉!!

“아웃!!!”

도루 실패. 1개의 볼카운트와 아웃 카운트가 동시에 올라갔다. 큰 손해였다. 마운드의 케빈 밀우드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틈 좀 보여줬더니 좋다고 달려드네. 멍청하기는.’

등 뒤에서 무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브레이브스의 포수인 자비 로페즈의 목소리다. 타자를 흔들기 위해 포수들이 흔히 하는 쓰레기 같은 이야기였다. 게다가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방금 이 아웃은 일부러 보여 준 허점에 리키 헨더슨이 스스로 걸려 넘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됐다. 만 40세. 107경기 외야수 선발 출전. 그리고 시즌 막판이라는 조건만 아니었더라면 조금 전의 허접한 낚시질 따위, 낚시질이 아닌 진짜 허점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리키 헨더슨이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리키 헨더슨 정도의 업적을 쌓아 올린 레전드를 저런 식의 비아냥거리는 것은 설사 그것이 경기 중인 상대편이라 해도 옳지 않았다.

약간의 분노. 하지만 동요는 없었다. 그저 단지 방망이를 꾸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제2구. 케빈 밀우드가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몸쪽 높은 공. 돌아가던 배트를 멈춰 세운다.

뻐엉!!

마운드의 케빈 밀우드는 훌륭한 구위와 괜찮은 변화구, 그리고 선발 투수의 성정을 지닌 투수이지만 제구가 훌륭한 투수는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변화가 없는 침착한 얼굴이다. 하지만 동요하고 있을 것이다. 볼카운트 2-0. 초조한 투수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나는 볼카운트.

제3구. 케빈 밀우드의 포심이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날아들었다.

‘2-0의 볼카운트에서는 평범한 타자조차도 가장 훌륭한 타자로 변신한다.’

그리고 지금 마운드에 선 나는 평범한 타자가 아니었다.

따악!!

빠른 구속, 더러운 볼 끝. 대단한 구위까지. 케빈 밀우드의 포심 패스트볼은 대단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속구라도 완벽하게 대비하고 있는 타자의 존 중앙으로 던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의 29번째 홈런이 터너필드 우측 담장을 크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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