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83화 (83/210)

# 83화.

네번째 에이스(6)

별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그저 자비 로페즈를 한번 바라보고 씨익 웃어줬다. 포수 마스크 뒤에 감춰진 녀석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가벼운 베이스 러닝. 1점을 따라 왔지만 아직도 여유가 있다는 것일까? 삼루수 치퍼 존스의 표정은 여전히 유들유들하다.

내야를 한 바퀴 돌아 홈플레이트를 강하게 밟았다. 그리고 자비 로페즈를 바라보며 또 한 번 씨익 웃었다.

케빈 밀우드는 흔들렸지만, 추가점을 내주지 않았다. 그렇게 3회를 지나 4회. 우리의 수비이닝이 끝났다. 아직 더운 날씨. 굵은 땀방울을 뚝뚝 떨어트려 가며 옥타비오가 분전해준 덕분에 추가실점은 없었다. 다만 매 이닝을 끝낼 때마다 옥타비오는 눈에 띄게 지쳐갔다.

5회 초. 우리의 공격 차례. 시작은 9번인 옥타비오부터였다. 피칭을 끝내고 돌아와 육수같은 땀방울을 닦으며 헬멧을 챙겨쓰는 옥타비오. 그를 바라보는 바비 발렌타인의 시선이 복잡하다. 망설임이 담긴 눈빛. 이제 고작 4회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옥타비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렌타인 감독은 교체를 고려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경기의 선발 투수가 알 라이터, 혹은 오렐 허샤이저 같은 베테랑 에이스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메이저 1년 차. 언제 마이너로 떨어질지 모르는 위치의 옥타비오라면 감독의 명령에 저항할 수 없으리라.

‘아, 그건 또 아닌가.’

생각해보니 감독이 바비 발렌타인이다. 이 영감이라면 지금 마운드에 서서 활약한 것이 알 라이터가 아니라 그렉 매덕스였어도 자기가 내릴 만하다고 생각하면 주저 없이 내렸을 것이다. 물론 그렉 매덕스였다면 고작 4회를 끝내고 저렇게 힘들어 헉헉 되고 있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한참 동안 복잡한 눈빛으로 옥타비오를 바라보던 발렌타인 감독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 5회 초, 타석에 나간 옥타비오가 허공에 배트를 몇 번 휘두르고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이제 다시 타자들의 시간이었다. 3회 초 도루 실패를 경험했던 헨더슨은 한층 더 신중했다. 커트하고 골라냈으며 마침내 걸어갔다.

1사 1루. 세 걸음 반의 리드 폭. 헨더슨에게 세 번의 타석 모두 볼넷을 허용한 케빈 밀우드의 표정은 침착하다. 어린 나이답지 않은 좋은 표정관리. 하지만 그 눈빛이 사나운 것만은 숨길 수 없었다.

더러운 꼴을 당하면 의기소침해지는 우리 옥타비오와 한층 더 비교되는 성정이다. 애초에 저런 식의 투쟁심이 아니라면 훌륭한 선발 투수로 살아남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 에이스 알 라이터와 같이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오늘 경기가 참 재밌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5회 초 벌써 세 번째 타석에 들어오는 Kang. 이번에도 3회와 마찬가지로 1아웃 주자 1루의 상황에서 경기를 맞이합니다.]

[이전 타석에서 솔로홈런을 기록한 Kang입니다. 메츠로서는 참 아쉬운 순간이었어요.]

[아무래도 선행주자인 리키 헨더슨의 도루 실패만 아니었더라도 그대로 동점이 될 수 있었을 테니깐요.]

방망이를 쥐고 천천히 타석으로 다가갔다. 타석의 바닥을 고르고 느릿하게 자세를 잡았다. 케빈 밀우드의 눈빛이 한층 더 사납게 변한다. 좋은 징조다. 분노는 폭발적인 힘을 주지만 그만큼 차분한 이성을 앗아간다. 이성을 갖춘 맹수보다는 이성을 잃은 힘만 센 맹수 쪽이 더 수월한 사냥감이다.

마운드의 맹수가 으르렁거린다. 1루를 바라보는 시간은 짧았다. 3타석 연속 볼넷이라고 해도 안타와 홈런을 허용했던 나만큼 신경이 쓰이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직전 타석에서 도루 실패를 경험한 리키 헨더슨이었다. 또다시 도루를 시도할 확률은 낮았다.

[1루 주자!! 달립니다!! 단독 도루!!]

아무도 예상 못 한 타이밍. 리키 헨더슨의 질주가 시작됐다. 날아드는 공. 아슬아슬한 코스. 치기 어려운 공이다. 하지만 나의 배트가 세차게 돌았다. 포수의 송구를 방해하기 위한 의도적인 스윙이었다. 단 0.01초라도 포수의 송구를 늦출 수 있다면 헨더슨의 도루가 성공할 확률은 그만큼 높아진다.

뻐엉

“세이프!!”

2루 베이스. 헨더슨이 가슴팍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웃는다. 흉폭한 웃음이다.

빠른 발, 풀시즌을 치러낼 체력, 30개가 넘는 홈런을 쳐내는 파워. 야구 선수로서 활약할 수 있는 기능 대부분을 잃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리키 헨더슨이었다. 마운드의 케빈 밀우드의 얼굴에 동요가 보인다.

2구째 크게 벗어나는 볼.

그리고 3구째 실투. 강하게 휘두른 배트가 실투를 두들겼다.

큼지막한 타구가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다.

[오!! 큼지막한 타구!! 넘어가나요? 메츠의 Kang이 커리어 최초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는 건가요? 파울 폴대 근처로 날아가는 공. 안쪽이냐 바깥쪽이냐. 아, 빠졌습니다.]

[1미터? 아니 그것도 안 되는 것 같군요. 아쉬운 타구입니다. 어쨌든 시즌 막판 정말 무시무시한 힘입니다. 종종 40-40 가능성을 이야기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매우 희박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거 어쩌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쉽게 우측 파울 폴대를 살짝 벗어난 공. 1루를 향해 천천히 달리던 몸을 돌려 타석으로 돌아왔다. 연타석 홈런인가 하고 부풀었던 마음이 조금은 차게 식어 내렸다. 볼카운트는 1-2. 투수에게 유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헨더슨의 도루로 이미 살짝 흔들렸던 케빈 밀우드의 포커페이스는 연타석 홈런의 위협 앞에 완벽하게 박살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제구는 그 부서진 포커페이스처럼 망가졌다.

뻐엉!!

제4구. 어림없는 코스로 날아드는 공. 홈플레이트 너머 자비 로페즈가 마운드로 올라갔다. 글러브와 미트로 입을 가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배터리.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망가졌던 케빈 밀우드의 포커페이스가 돌아왔다. 하지만 얼굴의 동요가 사라졌다고 해서 흔들리는 투수의 마음이 완전하게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는 케빈 밀우드의 시선은 나를 쓰러트리기 위한 맹수의 그것이라기보다는 내가 물러서길 바라는 초식동물의 그것을 닮아있었다.

그를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크고 요란하게 몸을 풀었다. 평소보다 긴 준비 자세. 밀우드의 다섯 번째 공이 날아들었다.

94마일의 빠른 공.

‘이런 미친!!’

나의 몸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뻐엉!!

아슬아슬하게 몸을 틀어 피해냈다. 빈볼. 그것도 위험한 부위를 향해 날아든 빈볼이다. 우리 팀의 덕아웃이 들썩인다. 안 그래도 브레이브스와 감정이 좋지 않은 우리들이다. 아마 내가 달려나간다면 그대로 달려 나와 브레이브스 녀석들의 똥만 찬 대가리를 두들기겠지. 만약 지금 우리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를 끌고 나가는 쪽은 우리다. 당장에라도 마운드로 달려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게다가 일부러 빈볼을 던졌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마운드. 자비 로페즈가 이어붙인 위태롭던 포커페이스가 다시 박살났다.

제6구. 조금 전 던졌던 빈볼은 내가 아닌 마운드의 그를 위축시킨 것 같았다. 바깥쪽 낮은 코스 95마일 포심패스트볼. 나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손끝으로 전해오는 아릿한 통증. 단단한 야구공이 우측 먼 곳을 향해 날았다. 빠르고 강한 타구. 우측 펜스 끝 아슬아슬한 곳을 두들기는 타구. 우익수의 글러브가 불규칙하게 굴절되는 공을 간신히 잡아낸다.

2루의 헨더슨은 홈까지 들어간 지 오래다. 1루를 지나 2루로. 그리고 2루를 지나 3루까지.

4:4 동점. 그리고 1아웃 주자 3루. 케빈 밀우드가 마운드를 내려갔다.

“고맙다.”

“뭐가.”

3루 베이스. 치퍼 존스가 뜬금없이 감사를 표한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

“아, 빈볼?”

“뭐 일부러 그런거 아닌건 표정만 봐도 알겠더라. 앞으로 리그를 이끌어갈 에이스치고는 너무 허약한 거 아니야?”

“끙, 좀 봐 달라고. 장래가 유망한 에이스라고 해도 이제 고작 24살이잖아.”

“난 22살이거든.”

“젠장,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기는 하지만. 본인한테 들으니 더 열 받네. 22살이라니. 앞으로 몇 년을 더 해먹으려고 벌써부터 이렇게 날아다니는거냐.”

“글쎄, 뭐 몇 년을 더 해먹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올해 지구 우승은 고맙게 받아가겠어.”

“어이, 이봐. 아직 동점이거든?”

잡담을 나누는 사이 케빈 밀우드가 내려간 마운드에 마이크 렘린저가 올라왔다. 그리고 피아자는 그를 상대로 자신이 어째서 리그 최고의 공격형 포수인지를 증명했다.

“이제 2점 차네?”

치퍼 존스가 입을 다물었다.

-뉴욕 메츠,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파죽의 2연승. 위닝 시리즈 확정!!-

-강진호 5타수 3안타 1홈런!! 30-30까지 남은 것은 이제 1홈런뿐-

-뉴욕 메츠,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1위 탈환!!-

***

69년 그해 이후 벌써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7살이었던 라울은 창단 7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던 이 어메이징한 팀의 팬이 됐다. 하지만 좋았던 순간은 짧았다. 멍청한 단장 조 맥도날드가 메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였던 톰 시버를 트레이드로 넘긴 이후 메츠는 꾸준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망할 조 맥도날드 놈 같으니. ’

7살에 첫 우승을 본 이후 두 번째 월드시리즈 진출을 보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17년. 그리고 메츠는 그 두 번째 월드시리즈에서 전설을 썼다. 83년의 신인왕 대릴 스트로베리. 그리고 84년의 신인왕 드와이트 구든. 투타에서 각기 맹활약했던 두 젊은이의 힘에 무키 베츠의 행운이 더해졌다. 24살 인생의 가장 큰 고비에 섰던 라울은 셰이 스타디움의 가장자리에서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봤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살아가는 동안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순간마다 그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

그리고 또다시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86년 뉴욕 메츠를 정상에 세웠던 투타의 기둥은 모두 코카인에 빠져들며 처참하게 무너졌다.

‘빌어먹을 멕시코 마약상 놈들.’

안 그래도 암에 걸릴 것 같은 경기력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리그 개편 이후 저 브레이브스 놈들이 내셔널리그 동부로 배정된 이후 메츠의 경기력은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이 비싼 돈 내고 꼬박꼬박 시즌권을 끊고 있는 건가 하는 회의감마저 느낄 만큼 처참했다.

라울은 매년 욕을 퍼부으면서도 메츠의 시즌권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야구는 이미 그의 인생에 일부였다. 그리고 1998년. 노란 피부의 한 청년이 외야 펜스 위로 날아드는 공을 낚아챘을 때 라울은 마치 1983년의 아직 새파랗게 어렸던 대학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피부색은 달랐다. 하지만 Kang이라는 저 동양인의 치고 달리고 던지는 모든 모습은 신인 시절의 대릴 스트로베리를 떠오르게 해주었다.

‘어쩌면!!’

98년 아쉬운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하지만 괜찮았다. 83년의 메츠보다 84년의 메츠가 강했고, 84년의 메츠보다 85년 86년의 메츠가 강했듯이 99년의 메츠는 98년의 메츠보다 강할 것이라고 라울은 믿었다.

그리고 1999년. 라울은 그 믿음에 보답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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