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85화 (85/210)

# 85화.

라스트 스퍼트(2)

기가 막혔다. 이 시기에 이토록 극단적인 방향으로 구단을 운영할 수 있다니. 물론 전략을 운용하는 것은 감독이겠지만 그런 식으로 팀을 운용하는 감독을 선임하는 것 또한 단장의 일이었다. 과연 빌리 빈이라고 해야 할까?

‘일단 번트는 안 돼.’

멀지 않은 미래, 빅데이터를 통해 연역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난제들이 귀납으로 해결되는 시대가 온다. 그리고 그 시대에 나온 결론은 수비 시프트를 피하기 위해 비어있는 곳으로 번트를 치는 행위는 매우 좋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번트를 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원하는 곳으로 공이 흐르게 번트를 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타격감이 한참 물오른 상황에서 굳이 번트를 시도함으로써 타격 밸런스를 흐트러트리는 것은 좋지 않다.

그렇다면 밀어치기를 통해 비어있는 3루 간을 뚫는 것은 어떨까?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나는 내야를 벗어나는 땅볼이라면 어지간해선 2루타로 둔갑시킬만한 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자랑하는 전력분석팀 역시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것 참 너무 속이 뻔히 들여다보인단 말이지.’

***

“그러니깐 이게 최선이라 이 말이로군. 허 참.”

빌리 빈이 가볍게 혀를 찼다. 채 2년도 되지 않은 과거. 데리고 오기에 너무 많은 지출을 해야 했던 유망주. 심지어 실링 역시 당시 데리고 왔던 페레즈보다 못하리라 예상했던 녀석은 그런 그들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신인왕에 선정되고 2년 차에 곧바로 강력한 MVP 후보로 손꼽힐 만큼 성장했다. 물론 당시에는 그것이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오클랜드에는 투수가 부족했고 Kang은 타율보다 출루율이 너무 낮았으며, 페레즈와 제프 괴츠를 합친 만큼의 가치는 절대 없다고 판단됐다. 하지만 닭인 줄 알았던 병아리는 사실 봉황의 새끼였다.

“아직 모집단이 너무 적긴 합니다만 전체적으로 타구는 이렇게 형성되고 있습니다.”

“흐음.”

그것은 아마 진호가 목격했다면 깜짝 놀랄만한 자료였다. 아직 PTS(Pitch Tracking System, 투구추적시스템)조차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지금 저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은 HTS(Hit Tracking System. 타구추적시스템)의 결과물과 매우 흡사한 자료들이었다. 물론 그런 첨단 과학의 결정체는 아니었다. 순수한 노동력의 결정체. 제대로 된 FA 하나 잡지 못하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바로 그들이 보고 있는 그 자료였다.

“여기 보시면 2, 3루 쪽 내야를 통과하는 타구가 장타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어차피 주자가 없는 상황이라면 볼넷을 내주나 이런 시프트를 사용하나 그리 큰 차이는 없다는 것이 저희 들의 판단입니다.”

Kang을 대신해 리키 헨더슨과 트레이드됐던 메인 매물인 제프 괴츠는 현재 팔꿈치 수술을 받고 재활 중이었다. 하지만 은근슬쩍 별것 아닌 녀석을 데리고 오는 것처럼 받아 온 제레미 페레즈는 달랐다.

61경기, 191타석, 167타수, 47안타(2루타 7개. 12홈런), 21볼넷. 1사구, 2희생플라이. 0.281/0.365/0.539.

컨트롤 기간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 6월 말에 콜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페레즈는 놀라운 성적을 기록하며 오클랜드의 중심타자로 거듭났다. 물론 애초에 데리고 올 때 기대했던 평균수준의 외야 수비는 없었다.

녀석은 메이저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무식하리만큼 몸을 키웠고 덕분에 장기적으로는 1루수 혹은 지명타자로의 전환이 불가피해졌다. 물론 현재로서는 제이슨 지암비나 존 자하 보다는 나은 수비를 보였기에 어쩔 수 없이 주전 좌익수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다른 타자들에 대해 대비는 충분히 돼 있겠지?”

“네, Kang에 비교하면 다른 타자들은 훨씬 쉽습니다. 솔직히 그 녀석은 지금도 여전히 과소평가 되고 있어요. 수비와 주루 기여도. 그리고 타격 생산성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가 들어간다면 녀석은 단순히 MVP 후보가 아니라 압도적인 MVP로 꼽혀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뭐 하겠나. 과소평가된 상태라도 2년 차에 MVP 후보인 선수인데. 우리 형편에 어디 건드려 볼 수나 있어야지. 역시 앞으로는 조금 비싸더라도 가능성이 보이면 영입을 시도해보는 쪽으로 해야겠어.”

빌리 빈의 이야기에 부단장 디오네스타가 답했다.

“에이, 단장님. 그건 아니죠. Kang이라는 비상식적인 샘플을 생각하고 움직이게 되면 오히려 다른 부분들이 어그러질 겁니다. 그런 건 그냥 이레귤러로 인정하고 상식적으로 움직여야죠.”

“진지하기는. 놓친 물고기가 아쉬워서 그냥 해본 말이야. 나도 저런 이레귤러는 어지간해선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고.”

“그런데 말입니다. 그 Kang, 아직 건드려볼 건덕지가 있지 않습니까?”

“응?”

***

고민은 짧았다. 좋지 않은 코스로 들어오는 공 세 개를 골라내고 볼카운트 2-1을 만들었다. 그리고 네 번째. 여전히 그리 좋은 공은 아니었다. 몸쪽 낮은 코스 꽉 찬 공. 제구에 자신이 있는 것인지 홈플레이트에 제법 바짝 다가섰음에도 주저 없이 들어오는 몸쪽 공이었다.

바짝 당긴 겨드랑이. 터질 것 같은 상박. 콤팩트하게 돌아가는 회전력이 배트에 온전히 실렸다.

오클랜드가 나에게 내준 문제의 해답은 60년 전 테드가 이미 내놓았다.

‘잡을 수 없게 홈런을 치면 된다.’

1, 2루 간에 아무리 많은 선수가 서 있어 봤자 담장을 넘기는 공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테드 윌리엄스의 답안은 시프트를 대하는 100점짜리 답안이라고 부를만했다. 애초에 100마일짜리 공들이 날아드는 메이저리그에서 몸쪽 공을 밀어친다는 것은 나의 스윙을 유지하며 제대로 잡아당겨 담장을 넘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밀어친 공이 제대로 된 타구가 된다는 보장 따위는 없다. 아마 높은 확률로 비실비실한 타구가 될 것이다.

‘하지만 80점짜리지.’

이것은 지금 당장 저들의 시프트를 뚫어내는 시원한 맛은 있을지 몰라도 결국 저 시프트가 나에게 유효하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애초에 홈런은 내 마음대로 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타구를 만드는 것 까지다. 홈런은 거기에 행운이라는 요소가 크게 포함될 때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100점짜리 답안은 저들이 비워둔 코스로 안타를 치고 그것을 2루타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애초에 저들이 저런 과감한 시프트를 택할 수 있는 것은 밀어친 타구가 2루타로 연결되는 확률이 적다는 통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3루와 바짝 붙은 코스로 자리를 비워둔다면 2루타를 만들지 못할 것도 없었다. 내야 땅볼이라도 충분한 힘만 있다면 나에게는 2루까지 달려나갈 빠른 발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것은 80점짜리 답변도, 100점짜리 답변도 아니었다. 레그킥을 통해 튀어나간 오른쪽 다리가 대지를 단단히 붙들었다. 쭉 뻗은 다리가 나의 무게와 회전을 지탱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다리의 각도만큼 나의 몸이 뒤로 빠졌다. 오랜 단련을 통해 굵은 나무뿌리처럼 두꺼운 척추기립근이 꿈틀거리며 나의 자세를 지탱한다. 그 복잡한 과정에서도 회전의 축인 머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몸이 뒤로 빠진 만큼 스윙에 여유가 생겼다. 상당히 뒤에서 형성되는 히팅 포인트에도 배트에 힘이 충분하게 실린다. 몸쪽 빠른 공에도 불구하고 마치 바깥쪽 코스 변화구를 밀어치는 것 같은 효과였다.

따악!!

좌측 담장을 향해 날아가는 높게 뜬 타구. 걱정했던 근육의 욱신거림은 없었다. 가리비아의 프로그램 아래 몸을 만든 지도 벌써 2년째. 나의 몸은 충분히 질기고 단단하게 변해있었다.

오클랜드의 좌익수 제레미 페레즈가 달리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그리 열정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평생 동안 야구만 해온 선수다. 지금 이 타구가 담장을 넘어간다는 사실 정도는 그 누구보다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맙소사. Kang 홈런!! 홈런입니다. 시즌 서른여덟 번째 홈런. 오클랜드의 선발 팀 허드슨을 상대로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포를 쏘아 올립니다.]

[대단한 스윙이었어요. 몸쪽 빠른 공을 밀어쳐서 홈런을 만들다니요. 허, 이건 정말이지······.]

[자신에게 시프트는 소용없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보여주네요. 이건 마음만 먹는다면 밀어치기로도 언제든 담장을 넘길 수 있다는 표현이거든요.]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올 시즌 Kang이 밀어쳐서 담장을 넘긴 건 37개의 홈런 중 5개밖에 되지 않았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시프트를 걸자마자 ‘내가 지금까지 못 넘긴 게 아니라 그냥 안 넘겼던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홈런을 때려냅니다. 이렇게 되면 오클랜드는 조금 전 같은 시프트가 쉽게 걸 수가 없습니다. 홈런이야 마음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지만 방금 이건 의도적인 밀어치기로도 충분히 장타를 만들 수 있다는 증명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이걸로 저들은 쉽게 시프트를 걸지 못할 것이다. 밀어치는 코스를 비워뒀더니 거기로 공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홈런을 만들었다는 것은 언제든지 밀어치기로 장타를 뽑아낼 수 있다고 시위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당겨치기가 내 마음대로 홈런이 되지 않듯 이번 홈런 역시 내 마음대로 홈런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밀어치기로 커다란 타구를 만들어 볼 생각이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가 나왔다. 팀 허드슨의 공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90마일로 리그 평균에 살짝 미치지 못하는 구속이었다는 점과 내 예상보다 아주 약간 높게 들어왔다는 점이 행운으로 작용했다.

어찌 됐건 홈런은 홈런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밀어치기로 만들어 낸 홈런. 내야를 돌아 덕아웃으로 돌아왔을 때 팀원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1회 초 1:0.

시즌 160번째 경기를 우리가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

7회 초. 또다시 수비진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발 투수인 팀 허드슨은 이미 내려갔다. 하지만 프레스톤이 껄끄러운 것은 그의 공이 아니라 저 시프트 그 자체였다.

시프트를 처음 경험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클랜드의 시프트는 다른 팀보다 더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마치 프레스톤 자신의 타구 방향을 예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서 있는 그들의 글러브에 벌써 세 개의 아웃 카운트를 헌납했다.

‘젠장, 진호 녀석처럼 밀어치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만 있다면 이딴 시프트쯤이야.’

강진호는 강진호. 프레스톤은 프레스톤.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앞선 이닝 상대방의 시프트를 농락함으로써 감히 시프트를 걸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했던 진호가 부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1회 초, 솔로 홈런에도 꿋꿋하게 시프트를 걸던 오클랜드를 상대로 밀어치는 2루타, 그리고 밀어친 안타에 도루를 더하는 것으로 그들을 농락한 진호에게 오클랜드는 결국 백기를 내걸었다. 앞선 6회 초 그들은 진호에게 시프트를 포기했다.

물론 시프트를 포기했다고 진호가 안타를 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녀석은 마치 오늘 경기 조 디마지오라도 된 것처럼 연달아 안타를 기록했다.

반면 프레스톤 자신은 3타수 무안타.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전 멍청했던 시절처럼 진호를 흉내 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프레스톤 역시 지금의 상황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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