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86화 (86/210)

# 86화.

라스트 스퍼트(3)

프레스톤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들어오는 공을 자유자재로 밀어칠 능력따윈 없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배팅볼이야 프레스톤도 얼마든지 좌, 중, 우 마음먹은 방향으로 날려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전에서 메이저 정상급 투수의 공을 상대로 밀어치기로 내야 수비를 뚫는 강한 땅볼을 쳐내거나 외야까지 빠르게 날아가는 라인드라이브를 쳐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프트를 뚫는 것은 꼭 밀어치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당겨칠 거면 더 확실하게 당겨친다.’

어차피 시프트를 건다고 해서 모든 공을 잡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프트가 고려된다고 해도 라인 드라이브성 타구가 잡힐 확률은 3할에 불과했다. 결국, 빠르고 강한 타구라면 시프트고 뭐고 상관없이 뚫어낼 확률은 충분했다. 다만 문제는 빠르고 강한 타구가 영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지만 말이다.

프레스톤은 29홈런을 기록한 이후 무언가 자꾸 어긋나는 느낌을 받았다. 자세의 문제인가 싶어 비디오를 통해 디테일하게 체크했지만 딱히 크게 문제가 되는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30홈런을 의식한 큰 스윙이 문제였다. 하지만 프레스톤은 재능있는 타자였고 그런 큰 스윙은 의식조차 하기 전에 스스로 수정했다. 그렇기에 타격폼 체크에서 무언가 문제가 발견될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슬럼프가 계속되는 것은 그 뒤로 이어진 불운. 그리고 스스로가 슬럼프라고 의식함으로서 생긴 위축 때문이었다. 연습에서는 여전히 뻥뻥 장타를 날리지만, 경기에만 들어서면 나타나는 미묘한 심리적 위축. 산만 한 덩치에 유쾌하고 무던할 것 같은 이미지의 프레스톤이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이었다.

게다가 신인왕에 대한 부담감 역시 상당했다. 그것은 단순히 올 시즌 가장 뛰어났던 신인이라는 타이틀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년의 신인왕 강진호. 그처럼 플레이하고 싶다는 마음은 버렸다. 강진호는 강진호고 프레스톤은 프레스톤이다. 하지만 경쟁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최고의 선수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버리기에 24살은 너무 젊었다. 그리고 올해 신인왕을 탄다는 것은 자신이 그에 못지않은 길을 걷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프레스톤의 머릿속에는 그런 부담감, 그리고 심리적 위축이 한쪽으로 밀려났다. 그것은 그런 인간적인 고민들을 압도하는 짜증, 그리고 분노 덕분이었다. 그 짜증과 분노가 시프트 자체를 향한 것인지 혹은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진호는 무난하게 처리한 시프트에 발목 잡힌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방망이를 휘두르는 프레스톤의 스윙이 맹렬했다.

부웅!!

“스트라잌!!”

배트가 공과 10cm는 떨어진 곳을 가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프레스톤은 전혀 괘념치 않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긴장하는 것은 9월 확장 로스터를 통해 메이저에 올라온 21살의 어린 투수 케빈 자비스였다.

‘젠장, 진짜 스치면 그대로 넘어가겠네.’

두 번째 공을 기다리며 프레스톤이 빠르게 자세를 잡았다. 투수를 재촉하는 것 같은 속도감. 마운드의 케빈 자비스가 자기도 모르게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딱!!

거센 스윙. 높게 뜬 타구가 광활한 파울 지역을 넘어 내야석으로 떨어졌다. 볼카운트 0-2. 투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프레스톤은 마치 자신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인 것처럼 재촉하듯 말없이 타석에서 타격을 준비했다.

또다시 어버버하는 케빈 자비스. 홈플레이트 너머 35살의 노련한 포수 마이크 맥팔레인이 유리한 카운트에도 불구하고 메이저리그라는 큰 무대에 잡아먹히고 있는 마운드의 루키를 진정시켰다.

‘이봐 걱정하지 말라고. 이 자식 칠 마음으로 아주 가득하잖아. 게다가 0-2라고. 적당히 빠지는 공 하나면 스윙 삼진이라고.’

눈빛만으로 통할만큼 오래된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바깥쪽 공 하나 빠지는 코스로 요구하는 슬라이더에는 분명 그런 의미가 담뿍 담겨있었다. 케빈 자비스가 세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치겠다는 의지로 번들거리는 프레스톤의 눈동자가 케빈 자비스를 응시했다.

제3구. 바깥쪽으로 빠지는 87마일의 슬라이더. 프레스톤의 두 발이 강하게 대지를 움켜쥐었다. 맹렬한 몸통 회전. 그 무시무시한 힘이 38인치 나무배트에 실렸다. 바깥으로 빠지는 변화구. 하지만 프레스톤의 스윙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따악!!

빠지는 공을 프레스톤이 억지로 두들겼다. 내 외야의 수비수들이 타구를 응시한다. 무리한 자세 무리한 스윙이다. 좋은 타구가 나올 확률은 낮았다. 하지만 타구는 떠올랐다. 그것도 아주 높고 빠르게.

[프레스톤 윌슨의 힘찬 스윙!! 타구 방향 좌중간!! 큽니다!!]

프레스톤이 공을 맞춘 직후 0.2초 가량의 여유를 부렸다.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시선이 좌중간을 향했다.

‘됐어.’

손끝을 울리는 찌르르한 감각. 타구의 방향과 속도 그리고 높이. 프레스톤의 발걸음이 가볍다.

[홈런!! 홈런입니다!! 좌중간 담장을 넘어가는 프레스톤 윌슨의 시즌 30호 홈런!! 7경기째 침묵하던 그의 배트가 드디어 다시 깨어났습니다.]

[이달 초만 하더라도 윌슨 선수가 올시즌의 신인왕으로 가장 유력했었습니다만 시즌 중반 지독한 슬럼프에 시달리는 가운데 신시내티의 스콧 윌리엄스 선수가 6개의 세이브를 추가하며 무섭게 달려나갔었거든요. 솔직히 29홈런으로 시즌을 끝냈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까지 왔었는데, 이건 거의 신인왕을 확정 짓는 홈런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만약 프레스톤 윌슨 선수가 신인왕을 차지한다면 대릴 스트로베리와 드와이트 구든 이후 15년만에 메츠가 또다시 2년 연속 신인왕을 배출하는 셈이 되는군요. 또한, 그의 아버지인 무키 윌슨 선수가 81년 신인왕 7위였던 만큼 메츠의 팬들과 그의 아버지에게는 참 뿌듯한 일이 될 것 같습니다.]

***

7회 초 경기에서 뒤지고 있음에도 아직 승부를 포기하지 않았던 오클랜드를 프레스톤이 강하게 한방 두들겼고, 그렇게 비틀거리는 투수를 에드가르도가 확실히 짓밟았다.

뒤이어 올라온 투수가 레이 오도네즈와 투수를 상대로 이닝을 마무리 지었지만, 점수는 이미 11:4. 경기가 어지간해서는 뒤집히기 힘든 곳까지 진행됐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나의 다섯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이제 40홈런까지 2개 남은 건가.’

이미 오늘 경기는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지막 타석을 허투루 보낼 수는 없었다. 40-40의 대기록. 비록 빌어먹을 약쟁이들이 홈런을 뻥뻥 쳐대는 바람에 주목도가 덜하기는 했지만, 애당초 30-30만 하더라도 1876년부터 시작된 긴 메이저리그의 역사 속에서 달성한 선수가 채 서른이 되지 않는 대기록이었다.

40-40의 경우 약쟁이들을 제외한다면 그 누구도 기록한 적이 없는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경지. 훗날 공식적인 기록에서 약쟁이들이 전부 제외된다면 올 시즌 내가 기록할 40-40이 메이저 최초로 기록될지도 몰랐다. 물론 남은 2경기 그리고 1타석에서 2개의 홈런을 기록 할 때의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2루에는 무려 오늘 경기 5 출루를 달성한 리키 헨더슨이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내야를 살짝 넘기는 안타를 2루타로 둔갑시키는 모습은 언제봐도 참 경이로웠다. 물론 지금은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는 플레이이기는 했지만 내가 과연 마흔이 넘어서도 저런 플레이가 가능할지는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8회 초, 직전 이닝에서 두들겨 맞을 대로 두들겨 맞은 케빈 자비스가 내려가고 새로 올라온 투수는 체드 허빌. 2년 전 드래프트 2라운드로 오클랜드에 입단한 대졸 출신의 만 22살 투수였다. 나와는 동갑의 나이. 하지만 만 열여덟 살부터 외국의 프로 무대에서 구른 나와 대학 무대를 밟고 올라온 체드 허빌의 경험치는 결코 같다고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지금 그는 직전 타석 리키 헨더슨에게 농락당할 대로 당해 멘탈조차 온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96마일 빠른 공은 제법 위력적이었지만 절대 예리하지 않았다. 복판으로 몰린 빠른 공. 타구의 방향을 예측하고 전력을 다해 휘두른 배트가 아직 홈플레이트 위를 통과하지 않은 야구공을 후려갈겼다. 그야말로 당겨치기의 정석.

전력을 다한 스윙에 정확하게 얻어맞은 야구공이 날아오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11.5도의 적절한 각도로 튕겨 나갔다. 90마일 이상의 공의 가장 이상적인 발사각이었다. 그렇게 쏜살처럼 날아간 타구가 우측 담장을 넘어 외야 2층 관중석을 그대로 두들긴다.

[홈런!! 맙소사, 이 선수 오늘 아주 작정을 한 것 같습니다. 시즌 39호 홈런입니다.]

[Kang이 올 시즌 세 번째 멀티 홈런과 동시에 커리어 최초로 한 경기 5안타를 기록합니다.]

[홈런 두개에 2루타 하나 그리고 안타 두 개라니. 이거 시즌 막판이라고 해도 이정도 기록이면 비율 스탯에 변동이 엄청나겠는데요?]

[아 여기 나왔습니다. 경기 전 스탯이 0.302/0.366/0.546이었는데 지금은 0.307/0.370/0.561로 한 경기 만에 장타율이 무려 1푼 5리가 상승했습니다.]

-강진호 5타석 5타수 5안타(홈런 2개, 2루타 1개) 대활약. 뉴욕 메츠는 14:4 대승.-

-남은 경기는 단 2경기. 과연 강진호는 지금까지 단 세 번밖에 기록되지 못한 40-40의 대기록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인가.-

-오늘 경기 이전까지 188안타를 기록했던 강진호!! 경기 결과에 따라 시즌 200안타도 가능?-

-내셔널리그 유력한 MVP후보 강진호. 그의 경쟁자를 알아본다.-

***

“이거 건드려볼 건덕지가 없겠는데요?”

“허, 뭐 이런 괴물 같은. 의도적으로 밀어쳐도 홈런이고, 마음대로 당겨치면 외야 2층까지 날아가는 대형 홈런이다. 이거네요.”

“이건 저희가 1~5위 유망주를 다 퍼줘도 절대 트레이드가 안될 것 같은데요.”

“젠장, 그렇게 일일이 말하지 않더라도 나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오늘 경기 직전만 하더라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뛰어난 타선에 비해 선발진이 빈약한 메츠다. 괜찮은 선발투수에 괜찮은 유격수 유망주와 투수 유망주 세트라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여줘서야 도무지 견적이 나오지 않았다. 남은 서비스 타임은 무려 4년. 뛰어난 중견수 수비능력을 갖춘 40홈런 포텐셜의 타자. 심지어 약점을 부각시켜 보려고 시도했던 시프트는 약점부각은커녕 그런 것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용도로 전락해버렸다.

빌리 빈이 판단하기에 진호의 트레이드 가치는 현재로서는 측정불가였다. 물론 실력으로 따진다면 같은 팀의 마이크 피아자나 휴스턴의 제프 배그웰과 크레이그 비지오, 애틀랜타의 치퍼 존스, 컵스의 새미 소사 등등 올해의 진호에 못지않은 선수들은 많았다. 하지만 트레이드 가치는 단순히 실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무려 4년간 헐값으로 써먹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가늠하기 힘든 압도적인 가치였다. 이것은 단순히 연봉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정된 페이롤로 운영해야 하는 구단의 사정상 페이롤에 여유를 주는 MVP급 타자라는 것은 같은 실력의 대형 FA 2명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끙, 그래도 같은 리그가 아닌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게다가 올해 인터리그에서 만났으니깐 앞으로 2년은 안 보는 거잖아.’

빌리 빈이 애써 행복회로를 돌려가며 자신을 위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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