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87화 (87/210)

# 87화.

100 (1)

시즌 162번째 경기.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3차전 마운드에는 오클랜드의 선발투수 마이크 오키스트가 서 있었다. 그는 스몰마켓인 오클랜드에 소속된 다수의 선수가 그러하듯 마이너 옵션을 다 소진한 뒤 마이너와 메이저를 오가는 평범한 투수였다. 중하위권의 팀만 가더라도 선발은커녕 메이저 콜업 자체가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를 따져야 하는 투수.

이미 세 개의 공을 골라낸 상황. 볼카운트 3-0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91마일의 빠른 공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바로 그 좋은 공이었다.

딱!!

전력을 다한 스윙. 배트의 스윗스팟에 정확하게 꽂힌 공이 빠르게 날았다. 굳이 달릴 필요조차 없을 큼지막한 타구. 우측 담장 외야 2층을 넘어 관중 하나 앉아있지 않은 어퍼덱(최상단 관중석)을 두들겼다.

시즌 40호 홈런. 천천히 내야를 도는 사이 팀 동료들이 줄지어 달려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홈플레이트를 밟는 순간 달려드는 동료들. 헨더슨과 프레스톤을 필두로 한 동료들의 손바닥이 나의 몸을 두들겼다.

“이 자식 결국 40개를 채우네.”

“히야, 대단하다 대단해.”

어제 경기부터 홈런을 노리고 의식적으로 크게 배트를 휘둘렀는데 마침내 하나가 얻어 걸렸다. 덕분에 어제 경기에서 5타수 무안타. 그리고 오늘 경기에서 3타수 1안타를 기록했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홈런이었다.

어떻게 본다면 팀의 승리보다 개인의 기록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플레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의 지구 우승은 이미 159차전에서 결정이 난 상황이었다. 팀 내에서도 나의 기록달성을 위해 이런저런 배려를 해줬다. 크게 효과는 없겠지만, 타순 역시 2번에서 1번으로 조정이 됐다.

40-40.

1999시즌. 본래라면 절망적인 재활훈련 속에서 어드벤스드 싱글A와 더블A를 오가고 있었을 내가 메이저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

-99시즌 강진호의 내셔널리그 MVP 수상 가능성에 대하여-

길었던 메이저리그의 정규 시즌도 어제로 끝났다. 한국인들에게 올 시즌은 정말 재밌는 시즌이었다. 감히 도전하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던 메이저 리그(비록 1994년 박찬화 선수의 도전으로 인해 허들이 많아 낮아지긴 했지만). 그 야구귀신들의 리그에서 우리 자랑스러운 대한의 건아 강진호 선수가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꼽힌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야구계의 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작년 신인왕을 수상한 이후 많은 언론들이 강진호 선수의 소포모어 징크스를 염려할 때 본 필자는 감히 강진호가 더 발전된 모습으로 메이저리그를 휩쓸 것을 예측하고 주장했다. 증거는 곳곳에 존재했다. 하반기로 갈수록 체력적으로 부치는 가운데도 떨어지지 않던 성적. 심지어 12월에 있었던 아시안 게임에서 그가 보여준 퍼포먼스는 시즌 중에 보여준 것 그 이상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그의 기량이 아직 완연히 성장세에 있다는 방증이라고 본 필자는 예측했다. 그리고 올해 본 필자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99시즌의 강진호는 98시즌 자신의 활약이 단순한 예고에 불과했음을 여실하게 증명했다. 메이저 역사상 단 세 번밖에 나오지 않았던 40-40의 네 번째 주인공이 된 것이다. 야구선수가 홈런과 도루를 병존시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두 가지가 병존한다는 것은 마치 차가운 불, 뜨거운 얼음이라는 말과도 같다. 애초에 홈런을 치기 위해서는 몸이 클수록 유리하고 도루는 몸이 작고 재빠를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강진호 선수는 그 어려운 것을 해내고야 말았다.

40홈런 그리고 51도루.

올 시즌 특별히 돋보이는 선수가 없는 내셔널리그에서 단연 으뜸이라고 봐도 무방할 기록이다. 물론 40-40의 기록이 MVP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40-40을 기록하고 MVP를 수상한 선수는 88년의 호세 칸세코 선수가 유일하다. 96년의 배리 본즈는 MVP 5위에 그쳤고 작년의 알렉스 로드리게스 선수는 MVP 9위밖에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40-40이라는 기록은 그저 희귀한 것일뿐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저들이 40-40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음에도 MVP에 선정되지 못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메이저리그의 MVP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대 KBO의 MVP를 살펴보면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팀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KBO의 경우 그것을 강하게 의식했다기보다는 그저 뛰어난 성적을 거둔 선수가 소속된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하지만 MLB의 경우 선수 개인의 성적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소속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하는 경우는 빈번하며 그 경우 MVP를 수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메이저리그 MVP가 탄생한 이후 67년의 역사 속에서 총 세 번밖에 되지 않는다. 즉 40-40이라는 기록은 루징팀의 선수를 MVP로 만들어 줄 정도의 가치는 되지 못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올 시즌 강진호 선수는 96년의 배리 본즈나 98년의 알렉스 로드리게스와는 사정이 다르다. 강진호 선수가 소속된 뉴욕 메츠는 101승 61패로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하며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즉 충분히 MVP를 경쟁해볼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현재 내셔널리그에 MVP를 노릴 만큼 뛰어난 성적을 거둔 선수는 세인트루이스의 마크 맥과이어와 컵스의 새미 소사. 신시내티의 그렉 본, 애틀랜타의 치퍼 존스, 휴스턴의 제프 배그웰, 애리조나의 맷 윌리엄스, 그리고 강진호와 같은 팀의 로빈 벤츄라와 마이크 피아자, 에드가르도 알폰조 등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중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팀의 선수는 성적이 아무리 좋더라도 MVP에 선정될 확률이 지극히 낮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 그렉 본은 경쟁상대가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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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강진호 선수 MVP 수상의 관건은 메이저리그의 기자들이 얼마나 공정하게 투표를 하는가, 그리고 메츠에 우호적인 기자들의 표를 같은 팀의 경쟁자들이 얼마나 나눠 가져가는가에 달렸다고 볼 수 있다.

올 시즌 강진호 선수의 최종 성적은 704타석 637타수 194안타(2루타 32개 3루타 5개) 40홈런 51도루 59볼넷 5사구 3희생플라이 98타점 133득점으로 0.305/0.368/0.559를 기록했다. 이것은 규정타석을 충족한 타자들 가운데 안타는 8위, 홈런은 공동 7위, 그리고 득점 2위와 공동 30위의 타점이다.

re 기사가 좀 이상합니다. 이번 시즌 내셔널리그 MVP 후보 중에 랜디 존슨이 빠지는 게 말이 됩니까? 35경기 선발 17승 9패에 271.2이닝 완투만 12경기를 뛰었음. ERA 2.48에 삼진만 364개. 거기다가 기자가 이야기한 포스트시즌 진출 팀의 조건도 충족했고. 솔직히 강진호가 잘하기는 했는데 저라면 랜디 존슨한테 MVP 줄 듯합니다.

re 윗분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메이저리그에는 사이 영상 이라는 투수용 MVP가 따로 있습니다.

re 40-40이라니. 이거 거의 바람의 아들 이정범급 활약을 메이저에서 했다는 거 아니냐? 이정도면 야구 혼자 한 수준이잖아. 솔직히 MVP 줘야지.

re 근데 이 기사 조금 웃긴게 아시안 게임 보고 강진호가 발전한걸 예측했다는데 아시안 게임은 알미늄배트 들고 했잖아. 그걸 보고 발전여부를 어떻게 판단함?

re 이제 포스트시즌만 잘 뛰면 MVP는 강진호 선수가 수상한다고 봐도 되겠군요.

re 메이저리그의 MVP와 기타 상들은 정규시즌 성적만으로 수상한다고 합니다.

re 좋은 기사 잘 읽고 갑니다 ^^

re 기사는 참 좋은데 몇몇 댓글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군요. 아무리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이라지만 서로 간에 예의를 지키는 존대어 사용은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

정규시즌이 끝났다고 긴 휴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10월 2일 정규 시즌의 마지막 경기를 끝내고 홈으로 돌아온 시간은 3일 새벽이었다. 하루의 휴식이 끝나고 4일 오후. 곧바로 내셔널리그 디비전 시리즈 첫 경기가 시작됐다. 다행스럽게도 내셔널리그 전체 1위의 승률을 거둔 우리였기에 디비전 시리즈 1차전이 열린 곳은 우리의 홈 구장 셰어 스타디움 이었다.

상대는 중부지구의 우승 팀이자 내셔널리그 전체 승률 4위의 휴스턴 애스트로스. 본래라면 승률 1위 팀인 우리의 상대는 와일드카드 진출 팀이 되야 했지만, 같은 지구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와일드카드로 진출한 덕분에 지구 우승팀 중에서 승률이 낮은 애스트로스가 우리의 디비전 시리즈 상대로 결정됐다.

애틀랜타를 상대로 하는 것 보다 휴스턴을 상대로 하는 것이 수월했던 만큼 우리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대진표였다. 심지어 휴스턴의 경우 마지막 순간까지 지구 2위 팀인 신시내티와 가열 찬 순위경쟁을 했던 만큼 전력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시즌 막판 디비전 시리즈에 대비해 선발진의 로테이션을 조정했던 우리와 달리 휴스턴은 162차전 경기에서 자신들의 에이스인 마이크 햄프턴을 사용했고 덕분에 오늘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는 올 시즌 2선발로 활약했던 셰인 레이놀즈였다. 물론 그 역시 만만한 투수는 아니었다. 98년 다승 2위 탈삼진 4위로 휴스턴을 이끌었던 레이놀즈는 올 시즌 여러 가지 면에서 마이크 햄프턴에게는 다소 밀리는 감이 있었지만, 리그에서 가장 볼넷을 적게 주는 짠물 피칭으로 자신의 몫을 톡톡하게 해냈다.

1회 초, 우리의 에이스 알 라이터가 삼자범퇴로 이닝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곧바로 이어진 우리의 공격. 리키 헨더슨이 타석에 올라갔다. 시즌 중 리키 헨더슨이 셰인 레이놀즈를 상대로 거뒀던 기록은 5타석 5타수 무안타 2삼진. 볼넷이 적은 투수였지만 절묘한 커멘드로 타자를 농락한다기보다는 좋은 구위의 공을 과감하게 존 안으로 공을 집어넣는 타입의 셰인 레이놀즈는 리키 헨더슨에게 상극이나 다름 없는 타입의 투수였다.

하지만

딱!!

선두 타자로 나선 리키 헨더슨이 대뜸 셰인 레이놀즈의 초구를 후려쳐 홈런을 만들었다.

[와우!! 리키 헨더슨. 디비전 1차전 1회 말 셰인 레이놀즈의 초구를 공략해 그대로 담장을 넘겨버립니다. 내셔널리그 디비전 시리즈 첫 번째 홈런입니다.]

[정규시즌 12개의 홈런을 기록했던 리키 헨더슨 선수 아주 좋은 스윙이었습니다. 물론 공이 가운데로 몰린 감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이건 셰인 레이놀즈 선수가 실수했다기 보다는 리키 헨더슨 선수가 잘쳤다고 말하는 쪽이 맞을 것 같습니다.]

내야를 돌아 홈플레이트를 밟은 헨더슨이 대기 타석에서 기다리던 나를 스쳐 지나가며 조용히 말했다.

‘저 녀석 어디 문제가 있는 것 같던데? 영 비실비실하니깐 가서 마음껏 휘둘러 보라고.’

올 시즌 셰인 레이놀즈가 소화한 이닝은 무려 231.2이닝. 랜디 존슨이라는 괴물이 271.2이닝을 소화하는 바람에 조금 빛이 바랜 것 같긴 했지만, 라루사이즘 이후 선발 투수가 231.2이닝을 소화한다는 것은 분명 적은 이닝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92년 데뷔 이후 레이놀즈가 200이닝 이상을 소화한 것은 작년과 올해 두 번이 전부였다. 그 이전까지 연평균 180이닝 미만을 소화하던 레이놀즈의 몸에 탈이 났다고 해도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뻐엉!!

초구 어림없는 공이 존 밖을 지나갔다. 확실히 레이놀즈 답지 않았다. 물론 구속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93마일의 구속은 레이놀즈가 시즌 중에 보여주던 포심 패스트볼의 구속과 비교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엉망인데.’

하지만 형편 없었다. 본래 레이놀즈가 던지는 포심은 이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지저분한 볼 끝을 보여줬었다. 그에 반해 지금 녀석이 던지는 포심은 흔히 말하는 작대기에 가까웠다.

딱!!

[담장 직격하는 큼지막한 타구!! Kang 2루 돌아 3루까지!! 3루에서!!]

“세이프!!”

그런 형편없는 공을 두들기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1회 말 우리 팀의 타자들이 연달아 레이놀즈를 두들겼다. 휴스턴의 야수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타구를 향해 달렸지만 쉽지 않았다.

1회 초 고작 두 개의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고 레이놀즈가 물러났다. 점수는 3:0. 빠르다면 빠른 교체였다. 하지만 휴스턴의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몸상태가 그리 좋지 않던 레이놀즈가 굳이 선발로 마운드에 오른 것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그의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올라 온 크리스 홀트가 처참하게 두들겨 맞았다. 심지어 그중에는 올 시즌 0.258/0.319/0.317이라는 참담한 성적을 기록한 레이 오도네즈도 포함되어 있었다.

1회 말 타자 일순.

전광판에 새겨진 점수는 이미 6:0. 주자는 1, 2루. 나의 두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정규 시즌의 시합이었다면 벌써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휴스턴이 두 번째 투수 교체를 시도했다. 마운드에 스콧 엘라르톤이 올라왔다.

가볍게 돌아간 배트가 엘라르톤의 공을 정확하게 두들겼다. 펑 하고 터지는 화려한 폭죽. 셰이 스타디움 외야의 정중앙. 실크햇 위로 새빨간 사과가 모습을 드러냈다.

[1회 말, Kang이 두 번째 타석에서 석 점 홈런을 기록합니다. 맙소사.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요. 점수는 벌써 9:0. 경기는 아직 1회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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