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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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비전 시리즈 1차전. 경기가 진행됨에 따라 휴스턴 선수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휴스턴과 우리의 전력은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오직 실력만은 아니었다. 1차전 행운의 여신이 우리를 향해 강하게 미소지었다.
14:2. 핸드볼 스코어급의 대승.
이후 이어진 2차전에서 휴스턴의 선수들은 어제 있었던 대패의 여파를 완전히 수습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킬러 B라 불리는 휴스턴 타선의 중심 선수들이 동료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지만 별반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그렇게 격려하는 당사자들의 상태부터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2차전 우리의 선발 투수는 오렐 허샤이저. 그에 맞서는 휴스턴의 선발은 호세 리마였다. 재작년 휴스턴에 트레이드되어 작년 체인지업을 가다듬은 후 폭발하기 시작한 호세 리마는 이전까지 메이저 평균을 밑도는 불펜투수에서 완벽하게 환골탈태하여 올 시즌 올스타로까지 선정됐다.
하지만 1차전 14점을 뽑아냈던 우리 타선은 여전히 뜨거웠고, 그것은 올스타급의 투수라고 해도 결코 막아설 수 없었다.
8:3 승리.
마침 그날 있었던 양키스 역시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서 텍사스 레인저스를 상대로 8:0 대승을 거뒀다. 덕분에 호들갑스러운 뉴욕 언론이 일제히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지터의 예언은 이뤄지는가!! 뉴욕 양키스, 뉴욕 메츠의 압도적 승리!!-
-뉴욕을 막아설 팀은 오직 뉴욕뿐!! 메츠, 양키스 범접할 수 없는 대승리!!-
-메츠, 이제 남은 것은 오직 1승뿐!! 승리를 위해 휴스턴으로 떠나는 뉴욕의 사나이들-
호들갑을 떠는 것은 뉴욕 언론만은 아니었다. 이미 나의 MVP 수상이 확정이라도 된 것처럼 떠들어대는 한국의 언론은 물론이거니와 팀의 3선발로 자리를 잡은 마사토 요시이를 인터뷰하는 일본의 언론들 역시 시끄럽게 우리를 쫓아다녔다. 아메리칸리그에서 대활약중인 양키스에도 자국의 선수인 이라부 히데키가 있었고 그들은 마치 이번 월드 시리즈가 일본인간의 맞대결이라도 되는것 처럼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리고 휴스턴으로 이동한 이동일 겸 휴식일. 양키스가 텍사스와의 2차전을 3:1로 승리하는 순간 여론은 더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여론은 디비전 시리즈에 올라온 다른 네 팀이 모두 1승 1패씩을 나란히 주고받았기에 더더욱 뜨거웠다.
그리고 마침내 휴스턴과의 3차전.
올 시즌 그저 준수한 선발 투수에서 리그를 좌우할만한 선발로 껑충 뛰어오른 마이크 햄튼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4일간의 휴식을 끝낸 정상적인 5일 로테이션. 그의 얼굴에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책임감이 가득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팀이 내놓은 최후의 카드.
휴스턴의 에이스가 그 책임을 담아 공을 뿌렸다.
포심과 커터의 적절한 조합은 시즌 중에 봤던 것 이상으로 강력했다. 하지만 마이크 햄튼이 나이답지 않은 노련함으로 땅볼과 병살을 유도하며 실점을 억제했다. 지난 이틀간의 성공으로 마음껏 배트를 휘두르는 메츠의 타자들을 농락하는 영리한 피칭. 물론 그렇다고해서 안타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마이크 햄튼이 리그 에이스급 투수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지금 우리의 타선 역시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강력했다. 안타 그리고 또 안타.
반면 휴스턴의 타자들은 오늘 우리의 선발인 요시이를 상대로 영 힘을 쓰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요시이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다. 철저하게 땅볼을 유도하는 요시이의 피칭에 맞춰 내야진들이 철벽같은 수비를 보여줬다. 특히 레이 오도네즈는 그간 자신이 타격으로 부진한 것은 바로 오늘 이 장면들을 위해서라고 주장하듯 터무니없는 곡예들을 선보였다.
오지 스미스 이후 최고의 유격수.
솔직히 난 수비에 있어서 어떤 선수에게도 뒤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레이 오도네즈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런 나의 자신감에 강한 스크래치를 새겼다. 맨손 캐치로 잡아낸 타구만 세 개. 맨손 캐치 직후 정확하게 날아가는 송구와 2, 3루 간에서 공을 잡아 글러브 채로 이루수에게 건네는 수비는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2연패로 몰린 휴스턴이었다. 입이 쩍 벌어지는 수비들이 상대방의 사기를 꺾었다. 그렇게 양팀 모두 득점 없이 7회. 마이크 햄튼이 또 다시 무실점으로 7회 초를 마무리 지었다. 투구수 107개. 이제 슬슬 불펜이 가동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7회 말 휴스턴의 공격. 마이크 햄튼이 타석으로 올라왔다.
[7회 말 원아웃 상황. 9번 타자 마이크 햄튼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7회이닝을 정말 완벽하게 막았던 마이크 햄튼 선수. 투구수가 만만치 않은 상황입니다만 다음 이닝에도 마운드를 책임질 것 같군요.]
7이닝 동안 107개. 포스트시즌, 벼랑 끝 승부에서 107개의 공을 뿌리며 0:0을 유지해온다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2:0으로 시리즈 전적을 앞서가는 우리 팀의 마사토 요시이도 반쯤 녹초가 된 상황. 마이크 햄튼 역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 마이크 햄튼 선수가 타격 자세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선수 이번 시즌 타격 성적이 보통 좋은 게 아닌데요? 3할 타율이에요.]
[맞습니다. 마이크 햄튼 선수같은 경우 타격에도 굉장힌 재능을 보이고 있거든요. 올 시즌 성적이 88타석 74타수 21안타에 비율스탯이 0.311/0.373/0.432입니다.]
피곤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눈빛만큼은 여전히 이글거린다.
부웅!!
물론 눈빛만으로 공을 쳐낼 수는 없었다. 헛스윙. 그리고 또 헛스윙. 8회 피칭을 이어가기 위해 그냥 방망이를 휘두르러 나온 것이 확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딱!!
요시이의 포심을 마이크 햄튼이 그대로 끌어당겨 받아쳤다. 달려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 대형 홈런. 지루하게 유지되던 팽팽한 균형추를 마이크 햄튼이 직접 깨트렸다.
[마이크 햄튼!! 마이크 햄튼의 솔로 홈런!! 0:0 팽팽하던 경기의 균형이 깨어집니다.]
[마이크 햄튼이 디비전 시리즈 탈락의 위기에서 휴스턴을 구원합니다.]
휴스턴 선수들의 표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미약하지만 희망이 생긴 것이다. 애초에 정규 시즌도 마지막까지 개싸움을 벌이며 우승을 차지했던 휴스턴이다. 이번 디비전 시리즈도 그렇게 끝까지 물고 늘어지겠다는 각오가 그들의 얼굴에서 엿보였다.
그리고 그 각오를 가장 강렬하게 표출하는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립스틱이 덕지덕지 묻은 지저분한 헬멧의 사나이. 리그 최강의 이루수. 크레이그 비지오. 이제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상징 그 자체가 되어버린 남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승부를 가르는 에이스의 선취 홈런. 그리고 이어지는 타자는 휴스턴의 상징 그 자체. 마치 승부의 흐름 자체가 휴스턴으로 흘러간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야. 그래 봐야 1점이야.’
6.1이닝 1실점. 아직 마사토의 구위는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바비 발렌타인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 메츠. 투수 교체입니다.]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투수를 교체했다. 적절한 타이밍인지, 혹은 성급한 타이밍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끌려가는 것 같았던 분위기 자체는 한순간에 쇄신됐다.
[마운드에 마사토 요시이 선수를 대신해 옥타비오 도텔이 올라옵니다. 올 시즌 선발과 불펜을 넘나들며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옥타비오 도텔 선수. 최대 98마일의 빠른 공이 아주 인상적인 투수입니다.]
옥타비오가 간단하게 몸을 풀었다. 팀의 6번째 선발이라는 말은 팀에서 여섯 번째, 혹은 일곱 번째로 강력한 투수라는 말과도 같았다. 우리는 지난 1, 2차전에서 매우 넉넉하게 승리했고 덕분에 옥타비오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어깨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마운드의 옥타비오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초구 98마일의 빠른 공.
조금 전까지 마운드를 지키던 마사토 요시이의 평균구속이 91마일을 오가는 것을 고려할 때 단번에 적응하기 매우 힘든 공이었다. 하지만 크레이그 비지오는 마치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기세로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야구공을 쪼갤듯한 맹렬한 스윙. 높게 뜬 타구가 담장을 향해 날아왔다.
[크레이그 비지오!! 중앙 깊은 곳으로 향하는 큼지막한 타구!!]
[중견수 Kang이 빠르게 달려갑니다!!]
시즌 초와 비교해 8kg 가깝게 가벼워진 몸이 재빠르게 반응했다. 여기서 공을 놓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이미 1점을 내주고 분위기가 휴스턴으로 흐른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상황이다. 여기서 투수까지 교체하고 추가점은 절대 막아야 했다. 지금 이 공에 오늘 경기의 승패가 달려있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담장을 향해 질주했다.
쾅!!
펜스에 몸을 부딪치는 순간 어마어마한 속도의 반작용이 나의 몸을 덮쳤지만, 통증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것은 왼손 글러브의 묵직함 뿐. 펜스에 몸을 기댄 채 글러브를 낀 왼손을 높게 쳐들었다.
[아웃!! 아웃입니다!!]
[메츠의 Kang이 또 한 번 좋은 수비를 보여주는군요.]
[비지오 선수도 운이 없었습니다. 타구 방향이 좋지 못했어요. 애스트로돔이 중앙 담장까지 거리가 정말 멀거든요. 차라리 우측이나 좌측으로 좀 휘어졌더라면 충분히 담장을 넘길 수도 있는 타구였는데 아쉽게 됐습니다.]
1:0 달라진 것은 아웃 카운트가 하나 더해졌다는 것뿐. 여전히 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크레이그 비지오가 타석에 들어설 때와는 또 분위기가 달랐다. 타오르려던 사기에 찬물이 끼얹어졌달까? 반면 우리 팀은 마이크 햄튼의 솔로 홈런으로 싸해졌던 분위기가 단번에 달아올랐다. 최근 며칠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고있는 팀과 그렇지 못한 팀의 차이였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곧 성적으로 이어졌다. 8회 초. 107개의 공을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마운드에 오른 마이크 햄튼이 피칭을 시작했다.
7번 프레스톤을 내야 땅볼로 잡아내며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는가 싶던 햄튼이 후속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했다. 8번 타자인 레이 오도네즈를 대신해 대타로 올라온 배니 아그바야니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9번 옥타비오의 타석 역시 발렌타인 감독이 대타 카드를 뽑았다.
[아, 메츠!! 옥타비오 도텔을 대신해 그렉 보어 선수가 타석에 들어옵니다.]
[저 선수, 시즌 중반 리키 헨더슨의 부상으로 콜업 되어 상당히 쏠쏠하게 활약을 했죠?]
[네, 28경기 51타수밖에 되지 않습니다만 타율이 0.274에 장타율은 0.482로 상당히 준수합니다.]
그렉 보어가 마이크 햄튼의 낮은 속구를 잡아당겼다. 마치 작두라도 탄 것처럼 연달아 성공하는 발렌타인 감독의 대타 작전. 원 아웃 1, 3루. 괜찮은 타구 하나면 동점, 큼지막한 타구면 역전까지 가능한 상황. 리키 헨더슨이 마이크 햄튼을 괴롭히며 8개의 공을 뽑아내고 볼넷으로 출루했다.
[아, 리키 헨더슨이 볼을 골라내며 출루에 성공합니다. 이거 마이크 햄튼 선수 상당히 지쳐보이는데요.]
[벌써 121구째에요. 멧 갈란테 감독, 믿음도 좋지만 이제는 그만 투수를 교체해야합니다.]
[하지만 멧 갈란테 감독도 상당히 난감할겁니다. 지금 마운드에 올려서 마이크 햄튼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확신할만한 투수가 없어요. 휴스턴은 지난 경기들에서 투수 전력을 너무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죠. 휴스턴은 지금 이 경기에서 패배하면 모든 게 다 끝나는 상황입니다. 설사 내일 선발로 올릴 투수라도 지금 당겨다가 써먹야 되는 상황이에요.]
[자, 원아웃 만루!! 타석에 Kang이 들어옵니다. 지난 1, 2차전에서 그야말로 맹활약을 펼쳤던 Kang. 오늘 경기에서는 유독 잠잠합니다만 방심할 수 없는 선수입니다.]
[적당한 안타 하나면 그대로 역전이 되는 상황입니다. 투수 교체는 없군요.]
마운드의 마이크 햄튼이 여전히 살아있는 눈동자로 나를 노려본다. 원 아웃 만루. 앞선 세 번의 타석에서 모두 나를 땅볼로 처리했던 햄튼이었다. 병살로 이닝을 마무리 짓겠다는 생각이 엿보였다.
어차피 도루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만루의 상황. 마운드의 마이크 햄튼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초구 커터. 앞선 타석에서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며 두 번이나 땅볼을 뽑아냈던 공이었다. 8회 121개의 투구 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빠르고 강력한 공.
하지만 나 역시 지난 세 번의 타석에서 그냥 놀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햄튼이 던진 공의 궤적이 눈에 들어왔다.
딱!!
힘차게 돌아간 배트. 큼지막한 타구가 우측 담장을 직격했다. 2, 3루 주자는 물론이거니와 1루의 리키 헨더슨까지 홈으로 불러들이는 3타점 적시타이자 오늘 시합을 결정지은 마지막 안타였다.
-뉴욕 메츠 내셔널리그 디비전 시리즈 3승 무패 완승!!-
-어메이징 메츠의 재림? No!! 올 시즌 메츠는 역대 그 어떤 메츠보다도 강력하다!!-
-팀 홈런 합계 251개!! 사상 초유의 핵 타선 뉴욕 메츠. 디비전시리즈에서만 25점을 뽑아내는 괴력을 자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