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89화 (89/210)

# 89화.

100(3)

휴스턴과의 시리즈가 3:0으로 끝났다. 4차전 혹은 5차전까지 진행하게 될 애리조나 혹은 애틀랜타와 비교한다면 고작 하루, 이틀의 휴식이 더해지는 것이었지만 그 날짜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만약 애리조나가 애틀랜타와의 4차전에서 이기고 5차전까지 진행된다면 그 사이의 휴식일까지 고려해서 실제 휴식일 차이는 사흘에 달한다.

물론 우리가 게임 속 캐릭터들처럼 사흘간의 휴식으로 몸 상태가 100%가 되는 마법 같은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한 시즌 162경기라는 가혹한 일정을 치른 우리의 몸은 고작 사흘의 휴식으로 회복될 만큼 만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그 사흘이라는 차이는 유의미했다. 더군다나 나흘 혹은 닷새에 한 번씩 등판하는 선발 투수들의 로테이션 관리라는 측면으로 생각해봤을 때 이 사흘은 너무나도 소중했다.

‘게다가 상대가 상대니깐 말이야.’

지금 비록 애틀랜타와 애리조나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고 있지만, 어차피 승부의 결과는 뻔했다. 랜디는 물론 위대한 투수이지만 아무리 위대한 선발 투수라 해도 포스트시즌을 혼자 이겨나갈 수는 없는 법이다. 5번의 디비전시리즈. 그가 최대한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선다 해도 나올 수 있는 무대는 1차전 그리고 5차전이 전부였다. 그리고 승부는 내일 있을 4차전에서 결정 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런 나의 예상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4차전 랜디 존슨이 또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사실 랜디 존슨의 등판은 등판 그 자체만으로도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었다. 올해 정규 시즌에서 랜디가 던진 이닝은 무려 271.2이닝. 80년대 후반 메이저리그에 투수 분업화가 자리 잡은 이후 가장 많은 이닝 수였다. 게다가 이번 디비전시리즈 1차전에서 무려 8이닝을 던지며 팀에 승리를 안겨줘 놓고 고작 사흘을 쉬었을 뿐인데 또다시 등판이라니. 아무리 랜디 존슨이 철인으로 유명하다지만 이건 너무나도 가혹하고 비상식적인 등판이었다. 선발 투수가 자신의 등판에 쏟는 에너지는 어마어마했다. 나흘 간격의 등판도 힘겨워하는 것이 투수일진대 사흘 간격의 등판이라니. 사람의 몸은 결코 강철이 아니었다. 적절한 휴식이 보장되지 않는 등판은 보통 실패로 끝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99년의 랜디 존슨은 마치 강철과도 같았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벡스 4차전 2:1 신승!!-

-승부의 추를 원점으로 돌리는 랜디 존슨의 괴력. 모든 것을 결정짓는 5차전은 애틀랜타의 홈구장 터너필드에서!!-

랜디 존슨이 7이닝을 1실점으로 막아내며 애리조나에게 승리를 안겼다. 그리고 그의 호투는 우리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중요한 순간 발목을 잡혀버린 애틀랜타. 방긋 웃는 뉴욕 메츠-

-양키스 텍사스를 상대로 시리즈 3:0 완승. 월드 시리즈 진출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뉴욕의 양 팀-

5차전 애틀랜타가 그렉 매덕스를 마운드에 올렸다. 만약 4차전으로 끝났더라면 우리와의 1차전에 올라왔을 그렉 매덕스다. 솔직히 애리조나가 여기까지 해준 것만으로도 우리는 정말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애리조나의 분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 어?”

팀 동료와 함께 모여 경기를 관전하던 중 프레스톤을 시작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의아함을 담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스티브 핀리!! 2타점 적시타!! 1회 초, 애리조나의 스티브 핀리가 그렉 매덕스를 상대로 2타점 적시타를 기록합니다.]

[이거 애틀랜타에게는 매우 안 좋은 소식인데요? 선발로 가장 믿음직한 카드를 꺼내놓은 애틀랜타인데 이렇게 되면 다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 그렉 매덕스 그래도 침착하게 후속 타자를 상대하네요. 스윙!! 삼진. 1회 초 애리조나가 두 점의 선취점을 올리며 경기를 앞서나갑니다.]

[마스터를 상대로 1회 초 2점의 득점이라니, 이거 애리조나의 타선은 정말 최선을 다해줬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오늘 애리조나의 선발인 토드 스토틀마이어 선수가 제 몫을 해주느냐에 달렸어요.]

[지난 2차전 6이닝을 1실점으로 막아내다 7회 순식간에 3실점을 허용하며 무너졌던 토드 스토틀마이어 선수. 오늘은 과연 어떨지 기대되는군요.]

[이 선수, 비록 4일 휴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중간에 이동일이 이틀이나 있었단 말이죠. 토드 스트톨마이어 선수 역시 몸 상태가 평소 같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사실상 오늘 경기에서 패배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만큼 양 팀 모두 투수를 아끼지 않을 거거든요. 관건은 토드 스토틀마이어 선수가 과연 몇 회까지 먹어줄 수 있느냐예요.]

화면을 통해 전해지는 토드 스토틀마이어의 모습에 피곤함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투쟁심뿐. 그것은 그가 던지는 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오늘이 야구를 하는 마지막 날인 것처럼 스토틀마이어가 공을 뿌렸다.

“이거 어쩌면······.”

프레스톤이 뒷말을 삼켰다. 하지만 함께 경기를 관전하는 모두가 그 뒷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챔피언십의 상대가 애틀랜타가 아닌 애리조나일 수도 있다.

물론 야구에서 단기전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메이저리그의 팀끼리라면 아무리 약팀이라도 10번을 싸우면 3번은 이기는 법이다. 심지어 애리조나는 동부지구의 우승팀이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와일드카드로 올라온 애틀랜타를 잡아낸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요 몇 년 같은 지구의 애틀랜타에게 지독하게 시달려본 우리는 저 애틀랜타가 시리즈에서 얼마나 강력한 적수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쉬어갈 틈이 없는 선발진. 리그에이스급 투수를 넷이나 갖춘 애틀랜타는 사실상 디비전시리즈와 같은 경기에서는 모든 경기에 1선발 투수를 내밀 수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 애리조나가 애틀랜타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은 현실이었다. 랜디 존슨이라는 규격 외의 괴물이 두 번의 승리를. 그리고 마지막 5차전 단판 승부에서 행운을.

마침내 9회 말 토드 스토틀마이어가 마지막 공을 뿌리고 포효했다.

5:3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우리의 챔피언십 시리즈 상대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우리 입장에서는 잘된 일인 것 같아.”

“그렇긴 그렇지. 애틀랜타의 그 지겨운 사인방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는 게 어디야.”

“게다가 저쪽 존슨이랑 스토틀마이어를 이미 써먹었잖아. 최소한 1차전에 그 둘은 못 나온다는 말이니깐 제법 유리하지 않나?”

“하긴, 아무리 존슨이 괴물이라고 해도 연속으로 사흘 만에 마운드에 오르는 건 말이 안 되지.”

7전 4선승제와 같은 긴 시리즈에서 무서운 것은 애리조나와 같이 압도적인 괴물 하나가 있는 팀이 아닌 애틀랜타처럼 괴물 넷이 버티고 있는 팀이었다. 게다가 그 압도적인 괴물은 이미 사흘 간격의 등판으로 상당히 지친 상황. 게다가 1, 2차전이 열리는 곳은 우리의 홈구장이었다. 저들은 저렇게 지친 상태로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이동해야 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극도로 유리한 환경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건 이길 수밖에 없겠는데. 이래놓고 지면 정말 변명할 거리도 없겠어.”

“이겨야지.”

“내가 제법 오래 메이저 생활을 했지만, 올해 우리 팀만큼 강한 팀도 없었어. 이런 팀으로 반지를 끼지 못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되지.”

프레스톤, 피아자, 리키 헨더슨이 한마디씩 말을 던졌다. 그리고 구석에 앉아있던 그렉 보어가 말을 이었다.

“내가 10년 넘게 리그를 떠돌면서 처음으로 얻은 기회야. 솔직히 내 인생에 다시 또 이런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리고 난 어릴 적부터 백악관에서 대통령과 스테이크를 먹어 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에이, 보어씨도 이게 마지막 기회는 아니죠. 내년에도 그리고 후년에도 그리고 그 뒤로도 우리는 계속 강할 거에요. 그러니깐 앞으로 은퇴할 때까지 쭉 겨울 만찬은 백악관에서 하는 거로 하자고요.”

프레스톤 녀석의 호기로운 이야기에 그렉 보어가 말없이 턱을 긁적였다.

“자, 백악관에서 스테이크를 썰어 먹으려면 우승 반지를 껴야겠지? 그리고 우승 반지를 끼려면 일단 월드 시리즈에 나가야 할 테고 말이야. 전력분석팀에서 준비해 준 자료가 있을 거야. 다들 가서 그거 보고 공부나 좀 하자고.”

“우, 피아자 씨, 지금 이 분위기, 이 타이밍에서 공부라니 그게 말이 됩니까? 몸도 근질근질한데 나가서 연습하죠. 연습!!”

“멍청아!! 오늘은 이제 몸은 그만 쓰라고 몇 번을 이야기하냐!! 운동은 아까 가볍게 몸을 풀어준 정도로 끝내는 게 모레 있을 경기를 위해 좋다고.”

“으, 하지만 앉아서 비디오 보고 그 빽빽한 종이들 보는 게 더 피곤하다고요.”

“네 뇌는 지금보다 한 100배쯤 더 피곤해도 괜찮아. 뭐 그래도 정 공부하기 싫다면 괜히 몸 쓰지 말고 푹 쉬어두라고. 저기 진호랑 우리들은 가서 애리조나를 좀 분석해둘 테니까 말이야.”

“아, 누가 싫다고 했습니까. 합시다. 공부.”

애틀랜타 대신 애리조나가 올라온 것은 여러모로 유리했지만 한 가지, 상대 선수에 대한 분석만큼은 애틀랜타 쪽을 더 철저히 했다는 점은 좋지 않았다. 물론 시즌 중에 상대했던 만큼 기본적인 부분은 숙지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같은 지구의 라이벌 팀인 애틀랜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챔피언 시리즈가 시작되기까지 이틀. 팀의 타자들과 함께 애리조나의 투수들을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물론 투수들 역시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알 라이터를 필두로 한 투수들 역시 애리조나 타자들의 정보를 머릿속에 쑤셔 넣고 있었다. 폭풍전야와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 알 라이터 vs 오마 달-

98년 애리조나에서 선발 투수로 보직을 변경하며 화려하게 날아올랐던 오마 달. 올해 그의 성적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작년과 비교해 상당히 저조했지만, 여전히 나쁘지 않았다. 아니, 더 적은 경기 수로 더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여러 가지 세부 스탯과 비율 스탯이 조금 나빠진 것 이상으로 더 훌륭하게 선발 롤을 수행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오마 달은 훌륭한 선발이었지만 지금 우리의 타선은 위대하다는 말이 어울렸다. 마운드의 오마 달이 연신 진땀을 흘렸고 관중석의 홈팬들은 마치 축제라도 벌어진 것처럼 환호했다.

[메츠!! 메츠!! 강합니다. 너무 강해요.]

[정말 쉬어갈 틈이 없는 타선입니다. 오늘 오마 달 선수의 공이 결코 나쁜 게 아니거든요. 메츠의 타선이 식을 줄을 모르네요.]

4회 말. 오마 달이 마침내 마운드를 내려갔다. 이후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총 3번의 투수 교체가 이어졌다. 그리고 8회가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점수를 더 만들기보다는 최대한 빨리 경기를 끝낸다는 느낌으로 경기를 진행했다.

17:6

애리조나의 타자들 역시 제법 분전한 경기였다. 하지만 그들의 분전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일방적인 경기였다. 휴스턴과의 디비전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좋은 시작. 이미 여론은 우리의 월드 시리즈 진출이 확정된 것처럼 떠들었다.

그 남자가 마운드에 서기 직전까지 말이다.

챔피언 시리즈 2차전 경기 1회 말.

2미터 8센티. 등 번호 51번. 불꽃을 던지는 거인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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