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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90화 (90/210)

# 90화.

100(4)

자신들의 홈팀이 1회 상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광경을 지켜보며 셰이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메츠의 팬들이 흥겨움과 소란으로 달아올랐다.

뻐엉!!

평범한 포구음이었다. 그저 평소보다 조금 더 컸을 뿐 딱히 별다를 것이 없는 포구음. 삼진을 결정짓는 공은커녕, 타자를 타석에 세워두지도 않은 단순한 연습구. 하지만 흥분과 소란으로 가득하던 메츠의 팬들의 가슴 한구석에 서늘함이 스쳤다.

그것은 만 35세의 나이라 믿기 힘든 강건함으로 불가사의 할만큼의 성적을 이룩하고 있는 저 투수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는듯한 퍼포먼스. 랜디 존슨이 마운드의 리키 헨더슨을 향해 공을 던졌다.

마치 일루수가 홈으로 송구하는듯한 착각을 전해주는 97마일의 빠른 공.

부웅

“스트라잌!!”

리키 헨더슨이 자신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제아무리 대단한 강속구 투수라고 해도 선발로 10년 이상을 메이저에서 굴러먹고 나면 나름대로 노련한 피칭을 펼치기 마련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강철조차 10년 이상의 시간을 매일같이 연마하면 닳는 법이다. 하물며 사람의 몸은 그 강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약했다. 시종일관 불같은 강속구를 던져서는 몸이 남아날 수 없다. 그렇기에 성공적으로 남는 자들은 강속구를 대신할 무언가를 얻어낸 자들뿐이고, 그 무언가는 보통 노련함이라고 치장되곤 한다.

하지만 지금 마운드에 선 랜디 존슨은 달랐다. 그의 공에는 10년 이상을 선발로 활약한 투수가 보여줘야 할 노련함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약점이 아니었다. 그는 노련함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노련해질 ‘필요’가 없는 투수였다.

부웅!!

“스트라잌!!!”

분명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이었다. 하지만 헨더슨의 배트는 미치지 못했다. 4타석 0타수 4볼넷 5도루 4득점을 허용했던 애송이는 노련해지지 않은 채 성장했지만, 그를 농락했던 전설적인 타자는 너무 늙어버렸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삼구삼진. 꾸준히 리그 에이스‘급’ 투수라 평가받던 투수의 전성기가 만 35세에 펼쳐졌다. 그것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가장 특별한 투수가 써내려갈 전설의 시작이었다.

리키 헨더슨이 삼구삼진으로 물러났다. 대기 타석의 진호가 헬멧을 눌러쓰고 타석으로 들어왔다.

‘젠장.’

이전에도 제대로 쳐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상대전적에서 상당히 우위를 보이던 헨더슨이었다. 하지만 지금 랜디 존슨은 바로 작년까지, 아니 심지어 올 시즌 그가 상대했던 것보다 더 특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쩌면 애리조나의 절대적인 에이스로 팀의 멱살을 잡고 강제로 포스트 시즌까지 끌고 온 경험, 혹은 그대로 망해버릴 팀을 3일 간격으로 등판해가며 끌어올린 경험이 그를 한층 더 특별하게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사실 원인 따위는 크게 상관없었다. 그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진호 자신이 저 괴물을 상대해야 된다는 점이었으니 말이다.

[원아웃 주자 없는 상황. Kang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이번 시즌 매우 놀라운 활약을 보여준 Kang. 포스트 시즌에서도 그 활약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바로 어제 경기에서도 3안타를 기록했거든요. 게다가 랜디 존슨 선수를 상대로 전적도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8타석 7타수 2안타. 0.285/0.375/0.714입니다.]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샘플이 너무 적어요. 게다가 최근 기록인 올 시즌 기록은 4타석 3타수 1볼넷으로 그리 좋은 성적이라고 보기 힘들죠.]

[뭐 그거야, 타자의 타격감이라는 것이 원래 오락가락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최근 Kang 선수가 보여주는 타격감을 생각하면 좋은 결과를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글쎄요, 그렇게 희망적으로 보기에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랜디 존슨 선수가 보여주는 공들이 하나같이 심상치가 않군요.]

해설위원이 잠시 마이크를 내렸다.

‘어이 이봐.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이거 뉴욕 지역으로 송출되는 방송인거 잊었어?’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뉴욕에 사는 시민들이 지금 애리조나에 관심이나 있을 것 같아? 게다가 MVP 페이스의 특급 신인인데 무조건 칭찬을 해야지. 너 해설 오늘만 하고 말 생각이야?’

‘죄송합니다.’

‘똑바로 하자고. 똑바로.’

올 시즌 메츠와 새로운 중계권 계약을 통해 들어온 Fox-Sports였다. 지금까지 메츠를 중계하던 중계진 중 절반 이상이 갈려 나간 새로운 구성. 27년째 메츠의 중계를 맡아오던 카스티야는 챔피언십 시리즈 특별 해설위원이랍시고 들어온 이 멍청한 놈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일은 일이었다. 카스티야가 마이크를 다시 들고 중계를 이어갔다.

[하하, 토마슨 위원이 랜디 존슨에 대해 아주 강한 경각심을 품고 계시는군요. 우리 Jin-ho Kang도 그 부분은 충분히 염두에 두고 타석에 섰으리라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사실 Kang선수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 선수거든요. 올해 초 랜디 존슨 선수를 상대로 그리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만, 지금은 그때와는 또 다를 겁니다.]

***

좌타자인 나에게 랜디 존슨은 매우 까다로운 투수였다. 2미터 8센티의 거대한 키. 그리고 그에 걸맞은 긴 팔로 던지는 쓰리 쿼터 쓰로잉. 그야말로 내 머리 뒤편에서 공이 튀어나온다는 느낌을 전해주는 피칭.

안 그래도 커다란 랜디 존슨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오늘따라 한층 더 커다란 느낌이었다. 97마일의 공을 던진다고 하기에는 한없이 간결해 보이는 투구폼. 하체의 중심이동 따위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말그대로 상체만을 이용해 던진다는 느낌이 완연한 그의 피칭이 시작됐다.

초구 몸쪽 높은 공.

까다로운 공이다. 하지만 분명히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이었다.

‘흘릴까?’

평소 랜디 존슨의 제구를 생각한다면 흘려 보내고 좋은 공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쪽이 나았다. 심지어 지금 이 공은 초구였다. 하지만 앞서 리키 헨더슨을 상대로 보여준 공들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오늘 랜디 존슨을 상대로 이정도 공은 충분히 좋은 공일지도 몰랐다. 나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딱!!

빗맞은 공이 좌측 파울라인을 벗어났다. 최대한 배트를 끌고 나갔지만 밀렸다. 전광판에 98이라는 숫자가 선명했다. 포수에게 공을 건네받은 랜디 존슨이 곧바로 준비자세에 들어갔다. 숨돌릴 틈조차 주지 않는 빠른 타이밍. 안타깝게도 끊어갈 타이밍은 이미 지났다.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쥔 채 랜디 존슨을 노려본다.

2구째. 약간 몰려 들어오는 공.

‘슬라이더다.’

콤마 단위의 짧은 시간 속에서 98마일의 속구와 91마일의 슬라이더를 투구폼이 아닌 날아드는 공을 보고 구분하기란 절대 쉽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했다. 하지만 이 순간 나는 지금 랜디 존슨이 던진 공이 슬라이더라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최근 절정을 달리고 있는 나의 감각은 대부분 정확히 맞아 떨어졌고, 그것은 지금 이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웅!!

“스트라잌!!”

하지만 소용없었다. 구종을 미리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내가 머릿속으로 그린 궤적과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가 보여준 궤적은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타이밍 역시 미세하게 빨랐다.

2구 연속 스트라이크.

이번에도 역시 빠르게 피칭에 들어가려는 랜디 존슨. 하지만 내가 빨랐다. 적절한 타이밍의 타임 요청. 랜디 존슨이 끌어가던 좋은 흐름이 잠깐 멈췄다. 타석 밖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다시 타석에 섰다.

뻐엉!!

볼카운트 0-2에서 들어온 슬라이더. 반쯤 돌아간 배트를 멈춰 세웠다. 존 밖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였다. 아슬아슬한 코스도 아니었다. 너무 명백하게 빠져나간 공. 하지만 조금만 결정이 늦었더라도 배트를 휘두를 뻔했다. 압도적인 구위가 나를 현혹했다.

[볼카운트 0-2에서 Kang이 침착하게 잘 골라냅니다.]

[랜디 존슨 선수의 슬라이더 같은 경우 좌타자가 상대하기 너무 까다로운 공이거든요.]

[실제로 그의 슬라이더를 경험한 좌타자들은 랜디 존슨 선수가 자신의 얼굴에 공을 던진 것 같은데 그게 존 안으로 들어간다고 이야기 합니다.]

네 번째.

이제 슬슬 눈에 익을만도 하건만 여전히 강맹하다는 느낌 뿐인 랜디 존슨의 공이 날아왔다. 바깥쪽 아슬아슬한 코스. 나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딱!!

빗맞은 타구가 힘없이 1, 2루 간으로 향했다.

[Kang!! 쳤습니다!! 아, 하지만 2루수 정면. 아웃입니다.]

“아웃!!”

[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Kang 선수의 빠른 발을 생각하면 땅볼이라고 해도 2, 3루간으로 흘렀다면 살아나갈 가능성도 있었거든요.]

[자 올 시즌 Kang과 함께 40홈런을 기록한 팀의 또다른 거포죠? 타석에 3번 타자. 마이크 피아자 선수가 들어옵니다.]

터무니없이 대단한 투수였다.

내가 지금까지 목격한 최고의 투수는 단연 페드로 마르티네즈였다. 당연한 일이다. 99년의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FIP이라는 순수한 투수의 실력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제거해버린 스탯에서 역대 그 어떤 선발 투수와도 비교를 거부하는 터무니없는 성적을 기록했다. 그것은 과거 데드볼 시대라는 지금과 조금은 다른, 투수에게 극히 유리했던 야구에서도 극히 일부의 투수들만이 보여준 성적이었다.

‘그렉 매덕스처럼 던지는 랜디 존슨.’

99년의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저 투수의 이상향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존재였다. 하지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가깝게 다가갔다는 표현이었다. 지금 마운드에 선 랜디 존슨은 그렉 매덕스처럼 던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랜디 존슨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마이크 피아자, 스윙 삼진!! 1회 말 랜디 존슨이 2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합니다.]

[메츠로서는 조금 아쉬운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최근 메츠의 타자들이 보여주는 기세를 생각한다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겁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메츠 선수들이 이번 포스트시즌 4경기 동안 얻어낸 점수는 42점. 경기당 평균 10점 이상의 득점을 기록했거든요. 승부의 관건은 오늘 선발로 등판한 오렐 허샤이저 선수와 메츠의 불펜들이 애리조나의 타선을 얼마나 잘 억제해주는지에 달려있을 겁니다.]

[그래도 시즌 내내 약점으로 꼽히던 투수진이 포스트시즌 들어와서는 제법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아마 오늘도 잘 막아낼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2회 초, 마운드에 오른 오렐 허샤이저가 호투했다. 그리고 그 호투는 2회를 넘어 3회 4회 5회까지 이어졌다.

5이닝 2실점. 완벽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피칭이었다. 올 시즌 우리 메츠의 평균 득점을 생각한다면 승리를 확신해도 좋을 실점. 하지만 5회 말 우리의 공격이 끝나고 다시 마운드로 오르는 허샤이저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17명의 타자를 상대로 2볼넷. 그리고 무안타.

오늘 경기 우리 메츠의 타자 중에서 자신의 힘으로 1루를 밟은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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