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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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되고 있어?”
“얘들 고생 좀 심하게 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노히터야.”
“흠, 그래? 의외네. 요새 기세로 봐서는 파죽지세로 뚫고 나갈 것 같았는데 말이야. 그리고 이왕이면 기세 좋게 올라오는 걸 부수는 게 모양새도 좋고 말이지.”
“큭큭, 일단 부수는 건 이미 확정인 거네?”
“당연하지. 지금 우리 멤버들을 좀 보라고.”
척 노블라우치가 웃었다. 자신의 이 젊은 동료의 눈빛에는 정말 한 점 의심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결코 자기 실력에 대한 자만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팀 전체에 대한 믿음. 그리고 긍지. 그리고 그가 보내는 그 팀에 대한 신뢰 속에는 척 노블라우치 자신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노블라우치는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어린 소년과도 같은 눈빛의 동료가 보내는 기분 좋은 신뢰는 긴 시즌으로 지친 노블라우치의 피로를 잠시 잊게 해주었다.
“그래, 맞아. 네 말이 맞다.”
노블라우치의 손이 쓸데없이 잘생긴 동료, 데릭 지터의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아이, 참. 어, 어 쟤 올라온다 쟤.”
“누구? 어라? 뭐야 네 라이벌이네?”
“라이벌?”
지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 내가 야구를 조금 더 잘하기는 하지만 저 정도면 라이벌이라고 인정해줄 만하지.”
“에이, 무슨 소리야. 야구는 쟤가 낫지. 너랑 쟤랑 경쟁하는 건 야구 말고 다른 쪽이잖아.”
척 노블라우치가 오묘한 미소를 띄우며 라커룸을 뒤졌다. 지터는 지금 그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너무나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지난 몇 주간 지겹도록 봤던 탓이었다.
노블라우치가 꺼내 든 것은 이제는 너덜너덜해진 화려한 표지의 잡지. 그리고 그 너덜너덜한 잡지의 표지에는 상반신 누드를 한 채 느끼한 눈빛을 보내는 두 남자가 묘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뉴욕의 연인들 특집. 뉴욕에서 가장 핫한 야구 선수들을 만나다. 강진호, 데릭 지터 편-
“아 쫌!!”
***
7이닝 동안 25명의 타자를 상대로 오직 4 출루. 세 개의 볼넷과 한 개의 에러. 마운드의 랜디 존슨이 노히터를 기록 중이었다. 랜디 존슨이 보여준 터무니없는 피칭에 덕아웃의 공기가 무겁다. 최근 승승장구하던 메츠였기에 너무나도 낯선 정적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5회 말 1아웃 주자 1, 3루 상황, 허샤이저의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올라간 옥타비오가 이닝을 무사히 정리하고 2.2이닝 동안 추가실점을 내주지 않았다는 점 정도였을까? 하지만 그 다행을 승기로 바꾸기 위해선 지금 마운드에 군림하고 있는 저 랜디 존슨을 공략해야만 했다.
타순의 시작은 오늘 경기에서 3타석 3타수 3삼진을 기록한 8번 레이 오도네즈였다. 대타는 없었다. 묵묵히 타석으로 향하는 오도네즈.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손짓이 바빴다.
[8회 말, 메츠의 공격. 아 그런데 여기서 오도네즈 선수가 그냥 나오네요. 사실 대타 카드를 사용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이죠.]
[최근 배니 아그바야니 선수도 타격감이 굉장히 좋거든요. 여기서 한 번 올려볼 만한데 발렌타인 감독의 선택은 오도네즈 선수입니다.]
‘괜찮을까?’
걱정이 됐다. 챔피언십 시리즈 2차전. 8회 말 2점 차. 극한의 상황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래도······.
틱
[아!! 번트!! 기습 번트!! 레이 오도네즈 선수의 기습 번트입니다.]
[랜디 존슨 빠르게 달려 나오지만 늦었어요.]
“세이프!!”
[맙소사. 8회 말. 랜디 존슨 선수의 노히터가 기습 번트로 깨졌습니다······.]
[······.]
위대한 기록을 만들어나가는 투수에게 기습 번트를 대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메츠는 1승 1패가 모든 것을 가를 수 있는 포스트시즌을 치르는 중이었다. 비겁하다고 가릴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레이 오도네즈의 기습 번트에 관중석이 웅성거렸다. 야구계의 불문율을 잘 모르는 팬들은 그저 선두 타자가 출루했다는 사실에 환호했고, 야구를 아는 이들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법칙에 충실했다.
‘8회 말에 2점 차. 그리고 포스트시즌인데 그딴 불문율 따위 알 게 뭐야.’
대다수의 팬들이 찝찝함을 잊은 채 출루 자체에 집중할 때 발렌타인 감독이 움직였다.
“배니 준비하도록.”
“네.”
9번 타자, 투수 옥타비오를 대신 해 오매불망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배니 아그바야니가 선택됐다. 방망이를 움켜쥐고 그라운드로 나서는 아그바야니의 눈빛이 결연했다.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노히터를 날려버린 랜디 존슨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것은 존중받지 못한 자의 분노였다. 하지만 그 분노 앞에 선 아그바야니의 얼굴에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직 승리에 대한 결연한 의지뿐.
랜디 존슨의 99마일 빠른 공이 날아들었다.
뻐엉!!
깨어진 노히트 노런으로 마음이 흔들린 탓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분노를 참지 못한 탓일까. 랜디 존슨의 공이 위험한 곳을 지났다. 99마일짜리 위협구에도 불구하고 아그바야니의 표정이 태연하다. 침착하게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아그바야니. 그런 아그바야니를 바라보는 랜디의 얼굴이 한층 더 붉게 달아올랐다.
볼, 볼 그리고 볼.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아그바야니가 출루에 성공했다. 단순히 타석에 서있다 걸어 나가는 것이었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100마일짜리 제구되지 않는 공이 덮쳐오는 공포 속에서 아그바야니는 자신의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노아웃 주자 1, 2루. 리키 헨더슨이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8회 말. 2점 차. 랜디 존슨이 흔들리는 지금이 어쩌면 마지막 역전 찬스일지도 몰랐다. 리키 헨더슨의 표정이 비장했다.
[어? 애리조나의 덕아웃이 움직입니다. 뭐죠? 어? 투수 교체, 투수 교체입니다.]
[와우, 벅 쇼월터 감독이 과감하게 움직입니다. 8회까지 매우 잘 던진 랜디 존슨 선수를 이렇게 강판시켜버리네요.]
[노히터가 깨지고 그대로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주는 모습이 불안했던 모양인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지금 타이밍에 랜디 존슨 선수를 내리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아무래도 불안도 불안이지만 그보다 다음 경기에 랜디 존슨을 최대한 빠르게 써먹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기서 쓸데없이 투구 수를 더 늘리지 않겠다 이거죠.]
[하긴, 지난 디비전시리즈 8이닝을 던지고 사흘 만에 다시 등판해서 7이닝을 던졌던 랜디 존슨 선수입니다. 이번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교체가 무조건 득이 되려면 이번 이닝을 무사히 마무리해야 합니다. 이번 경기에서 이겨야 다음 경기를 내다보는 보람이 있는 거거든요. 하지만 노아웃 1, 2루 상황. 상대는 리그 최고의 핵 타선 뉴욕 메츠. 그것도 1번부터 시작되는 상위 타선이에요.]
[아, 지금 교체된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Beung-kyu Kim. 지난 8월 말 메이저에 콜업된 루키로군요. 이거 지금 같은 상황에서 루키를 기용하다니 벅 쇼월츠 굉장히 대담한 선택을 감행합니다.]
[시즌 16경기 등판해서 19.1이닝 ERA는 4.81을 기록한 선수입니다. 특이한 점이라면 지금 대기 타석에서 준비 중인 메츠의 Kang과 같은 나라 출신이라는 점 정도로군요.]
맙소사. 김병규. 김병규다. 본래 역사에서 메츠를 상대로 화려하게 데뷔해 첫해부터 애리조나의 마무리 투수로 자리를 굳혔던 병규였다. 다만 여러 이유로 지금은 메이저 콜업 자체가 본래 역사보다 2달가량 늦어졌고, 기량 역시 본래 이 시기에 그가 보여주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중요한 타이밍에 마운드에 그를 올린다는 것은······.
‘녀석이 이번 경기를 틀어막아 줄 확신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진호가 타임슬립을 하는 시점까지 한국 출신의 메이저리거 중 유일하게 두 개의 반지를 수집했던 김병규였다. 물론 우승 횟수가 그의 기량을 이야기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성기의 그는 그 두 개의 반지가 부끄럽지 않은 리그 최정상급의 마무리였다.
단단히 각오하던 랜디 존슨이 마운드를 내려가고 웬 애송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헨더슨의 전신에 서려 있던 긴장감이 사그라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헨더슨이 그 당연한 일을 억지로 막아냈다.
‘방심해선 안 돼.’
챔피언십 시리즈 2차전. 8회 말. 2:0으로 리드하는 상황이었다. 지금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는 저들이 내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임이 틀림없다. 헨더슨이 신경을 날카롭게 세웠다.
‘언더핸드 투수라고 했었나?’
애리조나의 투수들을 머릿속에 넣은 지 고작 이틀. 김병규라는 투수에 대한 기억은 선명했다. 숙지 된 정보에 따르면 언더핸드치고는 굉장히 빠른 공을 던진다는 것이 특이할 뿐, 별다른 유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저 어린 투수는 20살의 청년들이 종종 그러하듯, 이 짧은 시간 동안 무언가 특별한 성장을 이룩한 것이 틀림없었다.
마운드의 병규가 헨더슨을 향해 공을 뿌렸다.
뻐엉!!
“스트라잌!!”
헨더슨이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 그가 목격한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착시? 설마 내가 착시를?’
만 40세. 늙은 나이였지만 여전히 눈만큼은 젊었을 때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신하던 헨더슨이었다. 하지만 지금 병규의 공을 보는 순간 그 자신감에 크게 금이 갔다.
‘신중하게, 끝까지 공을 살펴보자.’
병규의 손끝에서 두 번째 공이 출발했다.
부웅!!
“스트라잌!!”
헛스윙. 리키 헨더슨이 잠시 손을 들어 타석에서 벗어났다. 심각한 표정. 잠시 고개를 휘저은 그는 마침내 지금 자신이 본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말이지.’
사흘 전, 애리조나의 투수들에 관해 한창 공부하던 때에 진호가 했던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끝까지 착시라고 생각할 뻔했다.
“이 김병규라는 아이 떠오르는 공을 던진다는 소문이 있어요.”
“떠오르는 공? 큭큭큭, 야 너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떠오르는 공이라니. 큭큭크긐큭ㅋ극”
“내가 살면서 프레스톤 녀석 의견에 동의하는 날이 있을 줄 몰랐네. 진호, 아무리 자료 숙지하는 게 지겹더라도 무슨 그런 농담을 하고 있어.”
“아니, 뭐 그냥 소문이에요 소문.”
“뭐, 라이징패스트볼 같은 착시현상이겠지. 아무래도 보기 힘든 언더핸드니깐 말이야.”
하지만 아니었다. 진호가 들었다던 소문은 사실이었다.
‘저 어린 친구가 던지는 공은 떠오른다.’
이것은 마치 차가운 불, 혹은 뜨거운 얼음이라는 말처럼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차라리 리키 헨더슨 자신의 눈에 갑자기 노안이 와서 잘못 봤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현실이었다. 리키 헨더슨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구종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있으리라고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기에 당황했을 뿐, 침착하게 대응한다면 절대 대응 불가능한 공도 아니었다.
병규의 세 번째 공이 날아들었다.
부웅!!!
“츄라잌!! 아웃!!!”
리키 헨더슨의 입에서 오래간만에 욕설이 흘러나왔다.
“이런 미친······.”
***
타석에서 삼진으로 물러나는 리키 헨더슨의 눈이 휘둥그렜다.
‘업슛 그리고 프리즈비 슬라이더라······.’
변화구의 무서움은 예상과 다른 궤적에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 마운드의 김병규가 던지는 공은 그 변화구의 무서움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했다. 바로 직전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지던 빅유닛의 빠른 공에 익숙한 눈에게 바닥에서 솟구치는 김병규의 업슛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그야말로 등 번호 51과 49가 만나 100이라는 완전수가 만들어진 셈이었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8회 말 2:0 상황. 1아웃 주자 1, 2루. 가장 완벽한 역전의 무대 위, 완전한 마운드를 상대로 내가 타석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