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92화 (92/210)

# 92화.

100(6)

마운드의 병규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지난 아시안 게임 대표팀 시절 한솥밥을 먹으며 느꼈지만, 저 녀석 던지는 공만 독특한 것이 아니라 캐릭터 자체가 독특했다.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극한의 마이웨이라고 해야 할까? 다른 일을 하기엔 그리 좋은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투수라는 업으로 살아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성격이었다. 타석에 서서 방망이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그 순간 해맑게 웃던 병규의 표정이 돌변했다.

언더핸드 스로잉.

지금은 특이하고 희소한 투구폼이라 여겨지지만, 야구는 본래 언더핸드 스로잉에서 시작됐다. 언더핸드 스로잉이야 말로 모든 투구 폼의 원조인 셈이다. 물론 무슨 음식점도 아니고 원조가 이후에 나온 것들 보다 더 좋을 리는 만무했다. 언더핸드 스로잉이 희귀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구속은 빠를수록 위력적이다. 그리고 팔의 각도가 내려갈수록 구속은 큰 폭으로 감소하는 법이었다. 흑마구로 유명한 톰 글래빈조차 88마일가량의 공을 뿌리는 곳이 이곳 메이저리그다. 이곳에서 구속이 낮다는 것은 커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단점이었다.

그렇기에 현대 메이저리그에 언더핸드 투수는 극히 보기 드물었고, 그나마도 대부분 특유의 생소함으로 한 이닝 정도를 담당하는 불펜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그쳤다.

부웅!!

“스트라잌!!”

전광판에 92라는 숫자가 선명했다. 그리고 이 구속이야말로 병규가 다른 언더핸드 투수들과 달리 메이저에서 활약할 수 있는 이유였다. 언더핸드투수의 근본적인 약점인 구속을 극복한 유일한 투수. 애초에 저런 폼으로 최고 94, 95마일짜리 공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물론 단순히 특이한 폼, 그리고 빠른 구속만이 있었다면 헨더슨이 삼구삼진으로 물러나고, 내가 이렇게 고전할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바로 저 업슛에 있었다.

‘미치겠군.’

기본적으로 타격은 수 없는 반복 훈련의 결정체였다. 100마일로 날아드는 공을 순간적으로 캐치해서 타격한다는 것은 그 수많은 훈련 속에서 만들어진 이미지가 있기에 가능한 행위였다. 그리고 그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들 중에 갑자기 솟아오르는 공 따윈 결단코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공 두 개 정도 높은 곳으로 배트를 휘둘러야겠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부웅!!

“스트라잌!!”

2구 연속 스윙 스트라이크. 진지한 표정의 병규가 세 번째 준비 자세에 들어갔다.

***

“자, 자. 덕아웃으로 나갈 시간이다.”

“아, 잠깐만요. 조금만 더 보고요. 지금 애리조나에 진짜 미친 투수가 하나 등장했단 말이에요.”

“미친 투수? 지금 애리조나 랜디 존슨이 노 히터 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건 진작에 깨졌고요, 지금 새로 올라온 투수 막 공이 떠오르고, 프리즈비를 던진 것처럼 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빠져나가기도 하고. 진짜 장난 아니에요.”

“공이 떠오르고 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빠져나간다고? 왜 아예 110마일짜리 포심도 던졌다고 하지 그러냐?”

양키스의 벤치 코치 뽀빠이, 돈 짐머가 코웃음을 쳤다. 새로 팀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 젊은 유격수는 종종 자신의 나이를 잊은 듯 10대 소년처럼 행동하곤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직원들은 그런 그의 행동에 꺄꺄거렸지만 그를 관리해야 하는 돈 짐머 입장에서 그의 이런 행동은 그저 골치 아픈 행동들일 뿐이었다.

지금 저렇게 흥분해서 날뛰는 것 역시 종종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17인치짜리 조악한 화질의 TV로 중계되는 방송이었다. 우완투수들의 횡무브먼트 변화구는 더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지터가 봤다는 그 투수의 변화구도 우완투수가 던진 각이 좋은 슬라이더 정도였을 확률이 높았다.

돈 짐머가 두꺼운 팔을 꼬아 팔짱을 끼고 지터를 향해 눈을 흘겼다.

“아, 진짜라니까요. 여기 앉아서 조금만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예요.”

“알았어. 안 그래도 우리 시합 끝나고 그 경기 영상 녹화해서 분석해야 하니깐 그때 꼭 보도록 하지. 그러니깐 일단 우리 시합에 집중하자고. O.K?”

“근데 진짜 지금 Kang 타석까지만 딱 보고 가면 안 돼요? 이 친구 지금 뭔가 할 것 같은데.”

“습!!!”

“아, 알았어요. 갑니다. 가요.”

게다가 지금 지터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저 내셔널리그의 챔피언십 시리즈가 아니었다. 10분 후에 시작될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이 젊은 청년의 자신감은 참 보기 좋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자신감만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이번 챔피언십 시리즈 상대는 만만치 않았다. 자칭 뉴욕 양키스의 가장 큰 라이벌. 그리고 타칭 양키스에게 가장 많이 패배한 팀. 보스턴 레드삭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보스턴이 오늘 선발로 내세운 투수는 라이브 볼 시대 가장 완벽한 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즈였다.

***

3구째 바깥쪽 꽉 찬 코스. 나의 배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설마 슬라이던가?’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 반쯤 돌아간 배트가 멈춰 세웠다. 그리고 바깥쪽 꽉 찬 코스로 들어오던 공이 터무니없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뻐엉!!

[맙소사. 방금 보셨습니까? 이전 타석 리키 헨더슨을 삼진으로 잡아냈던 그 공입니다. 마치 야구공이 아니라 프리즈비를 던진 것처럼 휘어 들어가네요.]

[공도 공이지만 방금은 Kang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방금 몸을 뒤로 빼지 않았으면 이건 그대로 히트 바이 피치였어요.]

잠시 타석에서 빠져나와 숨을 골랐다. 천만다행이었다. 인터넷을 떠돌던 전설적인 짤방. 김병규의 데드볼 삼진아웃 짤방을 보지 못했더라면 이렇게 기민하게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공이었다. 마치 물리법칙을 벗어나기라도 한 것 같은 움직임. 분명 아시안 게임 대표단에 함께 있을 때만 하더라도 이정도까진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정도면 만화에 나오더라도 야구 만화가 아닌 판타지 만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쪽이 어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 투수가 판타지 만화의 주인공이라고 승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8회 말 1아웃 주자 1, 2루 점수는 2:0. 대역전의 드라마를 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건이다.

옷깃을 툭툭 털고 배팅 장갑을 조여 맺는다. 적당히 느껴지는 장갑의 압박감. 배트를 움켜쥐고 타석에 섰다. 앳된 얼굴의 병규가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봤다. 평소 다른 투수들이었다면 기세에서 눌리지 않기 위해 힘껏 노려볼 타이밍이었다.

씨익

빠른 79년생. 사회적으로는 2살. 실제로는 3살이나 어린 후배다. 이역만리 타향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마운드에서 홀로 외롭게 서 있는 후배에게 내가 웃었다.

제4구. 살짝 높은 코스로 병규의 공이 날아들었다. 정상적인 속구라면 방망이를 내밀어야 했다. 하지만 업슛이라면 이건 존 밖으로 빠지는 공이다. 확신은 없었다. 그저 지금 병규라면 업슛을 던졌을 거라는 막연한 예감뿐.

뻐엉!!

[볼카운트 1-2 상황, Kang이 또다시 공을 침착하게 골라냅니다.]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상황에서 정말 침착합니다. 이건 정말이지 고작 빅리그 2년 차 선수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라고 믿기 힘드네요.]

[신비로운 오리엔탈 파워 같은 것 아닐까요? 동아시아 쪽에는 특별한 마인드 컨트롤을 어린 시절부터 한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글쎄요. 어쨌거나 8회 말, 2:0, 1아웃 주자 1, 2루. 볼카운트는 2-2. 큰 거 하나면 승부를 뒤집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자 Kim 제5구!!]

마운드의 병규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포수와 사인이 맞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지금 녀석의 선택지는 총 세 가지. 포심, 업슛, 그리고 슬라이더다. 대체 포수가 무엇을 요구했기에 녀석이 저렇게 고집스럽게 고개를 젓는 것일까? 단순히 코스? 아니면 구종? 잠시 녀석이 보여준 공들을 반추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지금까지 병규가 보여준 공은 모두 일곱 개. 그중 두 개가 슬라이더였고 나머지 다섯 개가 모두 업슛이었다.

‘분명 업슛은 체력적으로 무리가 많이 간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실제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 몸 곳곳이 비명을 지르던 시기의 병규는 더 이상 그 마법과도 같은 공을 던지지 못했다. 게다가 전성기 시절에도 그가 경기당 업슛을 던진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새로운 장난감을 손에 넣고 기뻐하는 아이인가?’

그렇기에 지금 이 비정상적인 볼 배합은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애초에 변화구란 속구와 적당히 섞여 들어올 때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그리고 업슛은 분명 변화구의 일종이었다.

그 사이, 애리조나의 포수 다미안 밀러가 마운드로 올라갔다. 애리조나의 덕아웃에서 통역이 뛰어나왔다. 뭐라, 뭐라 한참을 떠드는 세 사람. 하지만 여전히 병규의 표정은 딱딱했다. 이건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뻔했다. 병규의 고집이 포수의 의견을 꺾었다.

다섯 번째. 이번에도 역시 높은 코스, 다미안 밀러가 마운드를 방문한 보람 따윈 전혀 없게도 존 밖으로 빠져나가는 공이었다.

뻐엉

[아, 볼, 볼입니다. 2개의 스윙 스트라이크를 잡아낸 Kim. 벌써 3구 연속 볼을 던지네요.]

게다가 이 녀석의 터무니 없는 공에 집중하느라 간과하고 있던 사실 한가지가 떠올랐다.

‘컨트롤이 별론데?’

애초에 병규가 정교한 커맨드 보다는 구위로 타자를 윽박지르는 타입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성기 SO/BB 비율은 3.54 수준으로 매우 준수한 컨트롤을 자랑했다. 하지만 지금 이 무대의 병규는 달랐다.

영점이 덜 잡혔던지, 아니면 빅리그 가장 중요한 무대에서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는 자신의 모습에 흥분했던지. 아직 20살 어린 나이, 프로의 무대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병규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여섯 번째, 병규의 손에서 공이 출발했다.

뻐엉!!

스트레이트 볼넷. 방망이를 내려두고 1루로 걸어갔다. 마운드 병규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볼넷을 내줬음에도 별반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 중요한 것은 결국 점수를 내주지 않는 일 아니냐고 묻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 볼넷!! 볼넷입니다. 이렇게 되면 1아웃 주자 만루입니다. 이거 대단한 공을 던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경험이 없는 투수에게 너무 큰 부담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괜히 이런 큰 무대에서 경험이 풍부한 투수를 선호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런 무대일수록 작은 실수 하나가 돌이킬 수 없는 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자, 타석에 3번 마이크 피아자 선수가 들어옵니다. 이 선수도 올 시즌 내내 정말 대단한 활약을 보였죠? 그야말로 타선의 핵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선수입니다.]

[어? 그런데 애리조나 덕아웃이 또 분주한데요? 아!! 투수 교체입니다. 왜죠? 볼넷을 하나 내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말 대단한 구위거든요.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투수 교체 지시에 병규의 딱딱한 표정에 짜증이 어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별다른 말 없이 병규가 마운드를 내려갔다. 병규를 대신해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는 올 시즌 64경기 63.2이닝 동안 2.51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한 베테랑 불펜투수 그렉 스윈델이었다. 젊은 시절의 빠른 공을 잃어버린 대신 노련함을 갖춘 전형적인 베테랑 투수.

그의 89마일 몸쪽 속구가 담장 밖으로 튕겨 날아갔다.

-마이크 피아자의 8회 말 만루 역전 포!! 뉴욕 메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벡스를 상대로 4:2 역전승-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벡스 감독 벅 쇼월츠 ‘8회 말 메츠가 보여준 행동은 실로 비열한 행동이었다. 대기록은 더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랜디 존슨 ‘거기서 번트가 나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볼넷은 단순히 실수였다. 아쉬운 점은 내가 끝까지 마운드를 책임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뉴욕 메츠 감독 바비 발렌타인 ‘포스트시즌 고작 2점을 두고 벌이는 각축 속에서 그런 불문율이 지켜지기를 바라는 인간은 실로 순진한 인간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벅 쇼월츠는 순진과 담을 쌓은 지 오래다.’-

-페드로 마르티네즈 9이닝 16삼진 2볼넷 1피안타. 1실점 완투승.-

-Beung-kyu Kim ‘빈볼? 뭐 그것도 게임의 일부다. 팀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던질 수 있다. 그런데 어디 부러지기 쉬운 노인이나 나랑 친한 사람한테 던지는 것은 좀 그렇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