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93화 (93/210)

# 93화.

용의 눈(1)

“저희 쪽 최종 오퍼는 7년 7천만 달러입니다. 아 물론 팀 옵션은 없습니다.”

“보리스씨 아무리 그래도 서비스 타임만 5년이 포함된 7년으로 7천만 달러는 너무한 것 아닙니까?”

“서비스 타임 5년이라고 해도 당장 후년부터 연봉조정에 들어갑니다. MVP급 타자, 아니 MVP를 수상할 타자가 네 번의 연봉조정을 걸쳤을 때 연봉이 어떻게 상승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닙니까? 게다가 최근 메이저리그 연봉 동향을 생각한다면 이정도면 충분히 합리적인 제안입니다.”

처음 구단으로부터 오퍼를 받은 이후 두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밀고 밀리던 지루한 협상. 협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은 8월 후반 진호가 미친 페이스로 홈런을 적립하면서 부터였다. 단순히 MVP에 이름이 오르내릴 선수에서 강력한 MVP컨텐더로, 그리고 결국 가장 강력한 MVP 후보로 올라서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한 달.

메츠의 단장 스티브 필립스의 악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Fox-TV쪽 관계자인지 아니면 메츠의 관계자인지 대체 어떤 놈이 섣불리 입을 놀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Fox-TV와 메츠가 맺은 새로운 중계권 계약의 세부 내용이 유출됐고, 그것이 생각보다 커다란 금액이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양키스의 YES네트워크가 벌어들이는 금액이 상상을 초월했던 만큼 누구나 예상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단순히 예상을 하는 것과 구체적인 금액이 나도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물론 Kang이 MVP를 차지하고 이후로도 지금과 같은 활약을 보여준다면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꼭 그러리라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FA선수들과 달리 Kang은 앞으로 5년의 서비스 타임이 남지 않았습니까.”

“MVP를 차지하고 올해와 같은 활약을 5년간 보여준다는 것이 보장된다면 지금 저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겠죠. 2년 연속 MVP를 수상한 선수가 연봉조정 신청을 했을 때 위원회에서 천만 달러 미만의 결정을 내릴 거로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연봉조정은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게다가 그게 3년 차, 4년 차로 간다면? 휘유, FA로 나가기 전에 이미 7천만 달러를 받아낼 수도 있겠군요.”

“7천만 달러라니 과장이 너무 심하시군요. 당장 최고 수준의 FA 타자도 연 평균 1,200만 달러면 충분히 데리고 올 수 있습니다.”

“어이쿠, 연 평균 1,200만 달러로 MVP 타자를 데리고 오신다고요? 혹시 올해가 1999년이라는 걸 잊으신 건 아니죠? 그리고 방송사와 새로 중계권 계약을 맺은 곳이 메츠만 있는 게 아니라는것도 잊으시면 곤란하죠. 그러고보면 스타인브레너 구단주가 참 난 사람은 난사람이에요. 그 양반이 YES네트워크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중계권료가 이렇게 천문학적으로 뛰지도 않았을 거 아닙니까.”

“후, 좋습니다. 뭐 그거야 그렇다고 치죠. 그런데 올해와 같은 활약을 한다는 게 어떻게 MVP를 계속 수상하는 게 되는 겁니까. 게다가 당장 올해도 MVP가 확정됐다고 볼 수도 없잖습니까.”

“그러니깐, 그렇게 확정된 사실이 없이 불확실한 것들로 가득하니 우리가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하.”

“끙.”

“뭐,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야 일단 내년에 최저연봉을 받고 이후 연봉협상으로 네번 더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요.”

제프 보리스의 능글맞은 웃음에 스티브 필립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불과 이년도 채 지나지 않은 과거, 진호를 5월에 콜업하던 당시의 자신을 찾아가 멱살이라도 한번 잡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당시에야 진호가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애초에 진호는 타격보다 수비에서 강점을 보이는 야수였고 1년 빠르게 연봉협상계약에 들어간다고 해도 기껏해야 30만, 혹은 40만 달러 정도의 추가지출에 그치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1년 빠르게 연봉협상에 들어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이것은 단순히 1년간 부담해야 될 연봉이 조금 많아진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진호가 만약 MVP 컨텐더 급의 기량을 꾸준히 유지한다고 가정했을 때 3년 차부터 연봉협상에 들어갔다면 그의 서비스 타임 동안 지출될 총연봉은 약 2천만 달러 정도로 예상됐다.

하지만 슈퍼2 조항을 통해 2년 차 이후부터 연봉협상을 해야 하는 지금 예상되는 금액은 약 3800만 달러. 거의 단년계약으로 올스타급 선수 두 명을 써먹을 만큼의 차이였다. 그리고 이 금액은 그가 단순히 MVP 컨텐더가 아니라 MVP 위너가 될 경우 더 커질 것이다.

그야말로 스티브 필립스 개인에게 닥친 최대급 재앙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지나간 일에 매몰되어 미래를 간과하기에 스티브 필립스는 너무 똑똑했으며 과감했다.

‘구단의 전력분석팀과 스카우트팀 모두 Kang이 올해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수준의 활약은 꾸준히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어. 그리고 그들의 판단이 맞는다면 7년 7천만 달러의 계약은 나쁜 조건은 아니야.’

만약 전력분석팀과 스카우트팀의 예측대로 진호가 활약하고 FA로 나간다면 그 금액은 절대 연평균 1,500만 달러 미만에서 형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 미쳐 돌아가는 시장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혹시 진호가 지금 보여주는 모습이 그의 실링이 아니라면 어쩌면 연평균 2,000만 달러가 가능할지도 몰랐다.

‘맙소사. 연평균 2천만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진호가 올해 보여준 활약이 그냥 플루크일 확률도 고려해야만 했다. 만약 그렇다면 메츠는 무려 7천만 달러라는 암 덩어리를 끌어안게 되는 셈이다. 스티브 필립스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죠.”

“생각할 시간이라. 뭐 알겠습니다. 내일 이 자리에서 다시 뵙는걸로 하죠.”

“내일이요?”

“아, 설마 더 긴 시간을 원하시는 건가요? 흐음, 미리 말씀드리지만, MVP가 발표된 다음에는 금액이 또 달라질 겁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요.”

당연한 이야기였다. MVP 컨텐더와 MVP 위너, 혹은 루저의 몸값은 다르다. 다만 올 시즌 MVP를 획득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컨텐더임은 변화가 없으니 떨어지는 폭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만약 진호가 MVP 위너가 된다면 메츠가 부담해야 될 금액은 지금보다 매우 커질 확률이 높았다. 회의실 밖으로 나온 스티브의 움직임이 급해졌다.

***

3차전을 위해 애리조나로 가는 비행기의 분위기가 가벼웠다. 비록 2차전에서 고전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승리한 것은 우리들이었다. 그리고 2차전 애리조나가 내놓은 카드야말로 그들이 내밀 수 있는 가장 좋은 카드였다. 그것이 깨트린 이상 두려울 것은 없었다.

“에이, 거 과장도 심하십니다. 공이 떠오르다뇨. 진호 허풍에 전염된 것도 아니고. 헨더슨씨까지 왜 이러시는 거에요. 그게 다 눈의 착시입니다. 착시. 사람의 눈이라는 게 원래 간사해서 그런거 구분이 잘 안된 데요. 남들 공보다 좀 덜 떨어지면 그게 떠오르는 거로 보이는 겁니다.”

“프레스톤 넌 진짜! 휴, 말해 뭐하겠냐. 어차피 같은 리그인데 조만간 직접 상대할 날이 오겠지.”

리키 헨더슨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내일 당장 상대할지도 모르죠. 직접 경험해봐야 정신을 차릴 테니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래, 진호야 말 한번 잘했다.”

“두고 보세요. 내가 아주 큰 거 한 방 뻥 하고 날려줄 테니까요.”

“퍽이나.”

3차전. 우리의 라인업에는 변화가 없었다. 워낙에 다들 타격감이 좋기도 했고 어정쩡하게 휴식을 주느니 기세를 살려 시리즈를 빠르게 이겨보겠다는 감독의 의중 덕분이었다.

1회 초 리키 헨더슨이 타석에 섰다. 3차전 애리조나의 선발은 앤디 베네스. 탄탄한 선발투수와 리그 에이스의 경계 즈음에 있는 그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89년 21살의 어린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이후 11년이라는 시간 동안 올스타 1회, 사이영 6위 한번 3위 한 번이라는 괜찮은 활약을 보이며 연평균 12승 ERA 3.79의 솔리드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 뿐이었다. 긴 시즌을 운영하는데 어느 팀을 가건 3선발 정도는 충분히 해줄만한 투수라는 것은 아주 큰 재목이었다. 하지만 포스트시즌이라는 단기전에서 기세가 오른 팀을 꺾기에 앤디 베네스는 부족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방심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동일 겸 휴식일이었던 바로 어제, 우리는 오늘 선발로 나올 앤디 베네스는 물론이거니와 애리조나의 불펜들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집어넣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이미 이길 준비가 끝나 있었다.

뻐억!!

“악!!!!!”

물론 이런 장면이 준비된 것은 아니었다. 리키 헨더슨이 왼팔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이 개자식들이?”

2차전 경기. 랜디 존슨의 노히터를 번트로 깨는 순간 보복구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건 문제가 있었다. 애초에 보복구는 허벅지나 엉덩이같이 큰 부상의 위험이 없는 위치에 던지는 것이 룰이었다. 심지어 지금 타석에 선 타자는 리키 헨더슨. 팀에 상관없이 존중받아 마땅한 베테랑이다. 그런데 그런 베테랑의 팔을 두들기다니. 심지어 리키 헨더슨 특유의 타격폼이 머리를 아주 낮은 곳에 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헤드샷이 될 가능성까지 있던 공이었다.

[아, 2차전 경기에 대한 보복구인가요? 그런데 위치가 좋지 않습니다. 리키 헨더슨 선수 심각하게 고통을 호소합니다.]

[어? 메츠 선수들 지금 뛰어 나옵니다. 벤치 클리어링!! 벤치 클리어링이에요.]

마이크 피아자가 가장 먼저 덕아웃을 뛰쳐나갔다. 프레스톤도 나도 빠질 수 없었다. 벤치 클리어링에서 중요한 것은 팀 전체가 하나 된다는 협동 정신이었다. 빠르게 달려나가 헨더슨의 팔을 살폈다.

‘젠장.’

손목이다. 한눈에 봐도 맞은 부위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화가 치밀었다. 이미 피아자와 프레스톤은 마운드로 뛰쳐나간 지 오래다. 애리조나의 선수들 역시 자신들의 투수를 보호하기 위해 마운드로 뛰어나왔다.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프레스톤은 단연 돋보였다. 딱히 체격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6피트 2인치에 210파운드는 일반인 사이에서는 아주 큰 덩치겠지만 대체로 체격이 좋은 야구 선수들 사이에서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하지만 현란하게 몸을 놀리며 애리조나의 선수들을 하나씩 바닥에 쓰러트리는 그의 레슬링 솜씨는 중학생 때까지 진지하게 레슬링을 했다던 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와우, 저기 프레스톤 윌슨 좀 보세요. 대단한데요?]

[애리조나 선수들을 번쩍 번쩍 들어 내다 꽂아 버리네요. 저건 배운 솜씨인데요?]

십여 분간의 소요. 프레스톤의 혁혁한 활약 덕분인지 이 장렬한 사투의 승리자는 우리들이었다. 벤치 클리어링에서 상대방을 눕히는 것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결코 별것 아닌 것이 아니었다. 승패가 정해지는 시합은 아니었으나 이것 역시 사내들의 원초적인 자존심 싸움이다. 때린 놈들은 시시덕거리고 맞은 놈은 분해서 씩씩거리는 것이 당연했다.

“일단 병원으로 이동해야 할 것 같다는군.”

“젠장. 망할 놈들 같으니. 몇 놈 더 눕혀줬어야 했어.”

하지만 벤치 클리어링에서 이긴 것(?)과 무관하게 우리의 피해 역시 만만치 않았다. 벤치 클리어링 중에 추가 부상자가 없는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헨더슨의 부상이 단순히 의무실에서 처치 가능한 수준이 아니라는 점은 매우 심각한 소식이었다.

항상 1번 타자로 팀 공격에 물꼬를 터주는 리키 헨더슨이었다. 비록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해 베테랑임에도 불구하고 팀 분위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그가 팀 전력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아 그라운드 정비가 끝났네요. 경기 재개됩니다. 한바탕 격렬한 벤치 클리어링이었습니다.]

[메츠는 대주자로 베네수엘라 출신의 발빠른 외야수. 로저 세드뇨를 내보냅니다.]

[타석에는 2번 타자 Kang이 들어오네요. 벤치 클리어링 직후입니다. 아무래도 집중력이 평소같기는 힘들 거에요.]

마운드의 앤디 베네스가 상처하나 없이 깔끔했다. 애리조나 녀석들도 베네스가 우리의 주 목표임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철저하게 보호받은 덕분이었다.

‘망할 놈 같으니.’

우리가 2차전에서 했던 번트가 그리 당당한 일이 아닌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베네스가 던진 보복구는 명백히 범위를 벗어났다. 만약 녀석이 허벅지나 엉덩이 쪽에 공을 던졌더라면 우리도 충분히 수용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물론 녀석이 의도적으로 헨더슨의 팔목을 노렸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보복구를 던질 때는 최소한 엉덩이나 허벅지에 공을 맞출 수 있는 수준의 제구력은 갖추는 것은 기본이었다.

방망이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