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용의 눈(2)
앤디 베네스. 그는 나쁘지 않은 투수였지만 결코 좋은 투수도 아니었다. 게다가 벤치 클리어링으로 뒤숭숭해진 분위기는 나보다 그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가운데로 몰린 밋밋한 포심 패스트 볼. 이런 공을 놓칠 수는 없었다.
힘차게 돌아간 나의 배트가 그의 공을 정확하게 후려갈겼다.
따악!!
방망이를 돌리는 순간 손끝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넘어간다.’
높게 떠오른 타구가 빠르게 날아갔다. 뱅크 원 볼파크 우측 담장 너머 설치된 2층 외야석에 나의 타구가 그대로 꽂혔다. 지금까지 내가 날린 모든 홈런 중 가장 거대한 홈런이었다.
[Kang, 홈런!! 홈런입니다. 벤치 클리어링 직후, 앤디 베네스 선수의 초구를 그대로 잡아당겨 대형 홈런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2점 홈런!! 메츠가 경기를 유리하게 가져갑니다.]
[2층 외야를 직격하는 아주 시원한 대형 홈런이네요. 어? 그런데. Kang 선수. 지금 뭐 하는 거죠?]
2초 정도 타구를 감상하며 배트를 뒤로 내던졌다. 그리고 마운드의 투수를 한차례 강하게 응시하며 1루로 느긋하게 달렸다.
어지간히 존중받는 베테랑이 아닌 이상, 아니 설사 베테랑이라고 해도 곧바로 보복구를 얻어맞음 직한 그야말로 투수를 도발하는 배트 플립의 종합선물 세트였다.
내야를 한 바퀴 돌아 홈으로 돌아온 나에게 프레스톤이 달려왔다.
“야, 인마!!”
“왜.”
“왜는 무슨 왜야. 무슨 생각이야. 안 그래도 약올라 있는 애들한테 또 도발이라니.”
목소리는 높았지만, 그 속에는 걱정이 담겨있었다. 다른 이들의 눈빛 또한 마찬가지다. 사실 투수를 도발해봤자 결국 손해 보는 쪽은 타자였다. 투수는 언제든지 타자에게 보복할 수 있지만 타자는 방법이 없다.
“그냥.”
“그냥?”
“그냥, 매끈한 면상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나의 대답에 프레스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피아자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덕아웃 구석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틀 전 선발로 등판했던 오렐 허샤이저였다.
“이 친구, 이거 아주 마음에 드는군. 그래, 팀 동료가 당했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보복구 들어오면 복수는 걱정하지 말라고. 아주 제대로 한 방 돌려줄 테니까. 안 그런가? 일본 친구.”
영어가 짧은 마사토의 곁에서 그의 일본인 통역이 열심히 말을 전했다. 수염이 숭숭난 마사토가 호쾌하게 가슴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우리들을 바라보며 프레스톤이 고개를 저었다. 정작 벤치 클리어링에서는 제일 활발하게 날뛴 주제에······. 아, 혹시 자신은 때릴만큼 때려서 분이 다 풀렸다 이건가?
이후 경기는 시종일관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마사토의 공이 특별히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애리조나의 타자들은 특별히 나빴다. 뭐, 게 중 몇몇은 프레스톤에게 내동댕이쳐진 곳이 욱신거려서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두 번째 타석에서 몸에 맞는 공을 허용했다. 다만 앤디 베네스도 생각이라는 걸 하긴 하는 것인지 헨더슨처럼 치명적인 부위는 아니었다. 이후 보복구를 던지겠다고 벼르는 마사토를 내가 말렸다. 어차피 이긴 게임이고, 헨더슨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는 끝냈다. 굳이 나의 복수를 위해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가느니 내가 보복구를 맞은 거로 상황을 종결짓고 싶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마사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샤이저는 조금 전까지는 마음에 들더니 이번에는 갑자기 새가슴이 된 것 같다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한 해 가장 중요한 결과물인 월드 시리즈를 앞두고 의미 없는 부상자를 더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옥타비오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것 같았다. 불펜에 있던 옥타비오는 7회 투수 교체로 마운드에 올라오자마자 스티브 핀리의 허벅지에 96마일 불꽃 포심을 틀어박았다.
애리조나와의 한 경기 두 번째 벤치 클리어링의 시작이었다.
***
마지막까지 감정을 세워가며 대립하던 경기가 끝났다. 경기 자체는 우리의 완승이었다. 하지만 이를 갈며 돌아가는 애리조나의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남은 경기도 상당히 피곤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커룸에서 뜨거운 물로 몸을 씻어내고 나왔을 때 언제나처럼 내 라커룸 앞으로 기자들이 몰려왔다.
“강진호 선수, 오늘 홈런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운도 좋았고, 중앙으로 많이 몰린 밋밋한 공이었습니다. 아마 앤디 베네스 선수의 실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후 있었던 배트 플립에 대해 벤치 클리어링 직후 또다시 그런 도발은 그리 적절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이야기라니. 방금 시합이 끝났는데 대체 어디서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어디선가 이야기가 나왔다고 둘러대는 기자를 가볍게 째려보며 담담하게 답했다. 어감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차피 나올 질문이었고, 충분히 답변이 준비된 질문이기도 했다.
“방금 경기가 끝났는데 어디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지는 좀 궁금합니다만, 일단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오늘 경기의 흐름 자체를 좀 뒤집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경기의 흐름이라면, 혹시 벤치 클리어링 직전에 있었던 리키 헨더슨 선수의 몸에 맞는 볼 말씀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이야기를 좀 하려는데 자꾸 말을 끊는 기자를 가볍게 째려보며 강하게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무슨 말씀 하실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우선, 제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아마 2차전 있었던 경기에서 우리가 8회에 노히터를 번트로 끊은 것에 대한 정당한 보복구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만, 두 가지 부분에서 틀렸습니다.”
“두 가지요?”
“애초에 대기록을 달성 중인 투수에게 번트를 대지 않는 것은 단순히 대기록 자체를 깨기 위해 번트를 대는 것은 너무나도 비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역전할 의지가 충만했고, 실제로 그 번트를 통해 역전했습니다. 물론 전통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전통이 어떤 이유로 생겼는지를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이겼다는 것은 결국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고, 번트하던 당시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잖습니까. 게다가 그 불문율에 대한 것 역시 강진호 선수 개인의 생각 아닙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저희가 번트를 댄 것은 여전히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히터는 분명 대단한 기록이고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월드 시리즈 진출을 다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챔피언십 시리즈 1경기 1경기의 승패는 그 존중받아 마땅한 대기록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차전 번트로 노히터를 깬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나의 폭탄 발언에 몇몇 기자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몇몇 기자들의 얼굴에는 우려가 감돌았다. 물론 얼굴 표정과 무관하게 그들의 손가락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맙소사, 그러니까 애초에 앤디 베네스 선수가 몸에 맞는 공을 던진 게 잘못이라 이거군요.”
“물론 아닙니다.”
“네?”
“위의 이야기는 단지 저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모든 사람이 제 생각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전통을 불합리하게 생각한다고 전통을 지키는 이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전통은 전통 자체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방금 분명 앤디 베네스 선수의 보복구가 정당하지 않다고 하셨잖습니까.”
기자들의 얼굴에 ‘얘가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왜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거지?’라는 질문이 감돈다. 딱 내가 원했던 표정들이다.
“몸에 맞는 공 자체는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앤디 베네스 선수의 보복구는 도를 넘었습니다. 지금 헨더슨 씨는 병원에 가 있는 상황입니다. 최악의 경우 시리즈 남은 경기에 나오지 못할 수도 있죠. 아무리 기록이 중요하다지만 리키 헨더슨이라는 선수의 남은 시즌을 박살 낼 만큼 그 기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Kang, 전통은 존중한다. 하지만 애리조나의 대응은 너무 심했다.-
-뜨거운 동료애. 강진호의 투혼!!-
-야구란 무엇인가의 저자 래너드 코페트‘전통은 따지는 것이 아니라 따르는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타자가 너무 거만하다.’-
-흔치 않은 포스트시즌 한 경기 2회의 난투극. 과연 앤디 베네스의 몸에 맞는 공은 정당했는가.-
-리키 헨더슨 전치 4주. 시즌 아웃.-
진호의 인터뷰가 불러온 파문은 상당했다. 어떤 이들은 그의 말에 공감했고, 어떤 이들은 그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전통을 불합리하다 매도한다고 분개했다. 하지만 그가 했던 배트 플립이 단순히 신인의 건방이 아닌 동료가 당한 부당한 일에 대한 그 나름의 항의였다는 점에는 모두가 공감했다. 물론 처음에는 그저 앤디 베네스의 공이 삐끗했을 뿐, 정당한 보복의 과정이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터져 나온 리키 헨더슨의 시즌 아웃 소식에 그런 이들의 주장은 쏙 들어갔다. 비록 자기중심적인 흑인 선수였지만, 리키 헨더슨은 전국의 야구 팬들에게 사랑받는 슈퍼스타이자 많은 선수에게 존중받는 전설이었다. 그런 이의 월드 시리즈(심지어 커리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월드 시리즈)를 망쳤다는 것은 아무리 보복구라고 해도 과한 일이었다는 평에 힘을 실어주었다.
“솔직히 Kang이 틀린 말 한 건 아니지. 8회 말 2점 차는 경기를 포기하기에는 이른 시점이잖아. 게다가 챔피언십 시리즈 경기고 말이야.”
“그렇기는 한데 마찬가지로 챔피언십 시리즈 경기였으니 노히터가 더 대단한 가치를 갖는 것 아닐까?”
사람들의 갑론을박과 무관하게 챔피언십 시리즈는 이어졌다. 리키 헨더슨이라는 매우 핵심적인 선수가 시즌 아웃을 당했음에도 메츠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매섭게 타올랐다. 게다가 리키 헨더슨은 시즌 아웃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팔목에 붕대를 둘둘 감은 채 덕아웃에 앉아있었다.
“뭐, 타석에 서거나 수비하는 건 못하지만 대주자 정도는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팔목에 이거 감아놓긴 했지만 그래도 프레스톤 녀석보단 빠를걸?”
“아, 왜 하필 비교 대상이 접니까.”
시끌벅적하기 짝이 없는 메츠의 덕아웃. 반면 애리조나의 덕아웃은 고요했다. 시리즈 스코어 3:0.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애리조나 덕아웃의 고요함은 모든 것을 포기한 고요함이 아니었다. 어제 있었던 두 번의 벤치 클리어링이 애리조나 선수들의 투쟁심을 자극했다.
‘어떻게든 저 빌어먹을 메츠 놈들에게 한 방 날려주겠다.’
‘설사 시리즈에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메츠 놈들의 앞길을 꽃길로 만들어 주지는 않겠다.’
‘가는 길 소금이라도 팍팍 쳐주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그런 의욕은 오히려 메츠에게 득으로 다가왔다. 오늘 메츠의 선발투수는 케니 로저스. 시즌 중반 팀의 우승을 위해 메츠의 단장 스티브 필립스가 높은 비용을 지불하며 오클랜드에게 반년 렌탈해온 34세의 베테랑 투수였다. 텍사스, 양키스 오클랜드를 거쳐 메츠에 자리를 잡은 이 좌완투수는 긴 메이저리그 경험만큼이나 영리했고, 또 그 영리함을 살릴만한 능력을 갖춘 투수였다.
그는 1회 첫 번째 타자를 상대하는 순간부터 상대 타자들이 한방 치겠다는 의욕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것을 영리하게 이용했다. 연신 터져 나오는 땅볼들. 메츠의 내야진이 정말 훌륭하게 땅볼들을 처리했다. 게다가 투수로는 특이하게 펑고 훈련을 자주 하는 그는 그 훈련량만큼이나 뛰어난 수비 실력을 자랑했다. 두 번의 투수 강습 타구가 모두 병살로 이어졌다.
8이닝 1실점.
케니 로저스가 마운드를 내려왔을 때 이미 승부는 끝나있었다.
4차전 7:1 승리.
뉴욕 메츠가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보다 한참 빠르게 월드 시리즈 진출을 확정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