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용의 눈(3)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5차전.
낡을 대로 낡은 펜웨이파크의 38,000석은 빈자리 하나 없이 레드삭스의 팬들로 가득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보스턴의 팬들이 응원하는 팀은 두 팀. 보스턴, 그리고 양키스와 상대하는 팀이라는 농담이 말해주듯 그들이 양키스에 가진 적대감이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빌어먹을 멍청한 새끼들. 저거, 저거 올해도 이미 글러 먹었어.”
“젠장, 양키스 놈들은 96년에도 그리고 작년에도 우승했잖아. 대체 우리는 왜 우승을 못 하는 거냐고. 젠장할 밤비노 같으니라고.”
“어이, 너무 그러지들 말라고.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잖아. 오늘 우리 선발은 페드로라고. 1차전에서 녀석들을 닥치게 만들었던 것처럼 오늘도 그래 줄 거야.”
“그래서 오늘 이긴다고 해봤자 시리즈 스코어 3:2에 남은 2경기는 페드로도 없이 저 빌어먹을 양키 스타디움에서 치르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야구라는 게 원래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깐,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는 말자고.”
“젠장, 그놈의 희망의 끈은 대체. 우리 할아버지도 그 희망의 끈만 찾다가 돌아가신 게 벌써 10년 전이라고.”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믿고 있었다. 자신들의 에이스가 오늘 그들에게 두 번째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그리고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6이닝 무실점 11K.
불과 닷새 전 9이닝 1실점 완투승을 거둔 투수의 호투에 양키스 덕아웃이 고요해졌다.
“저기 저 녀석한테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는 사람? 혹시라도 그런 사람 있으면 가서 사과 좀 하고 와주지 않겠어?”
바니 윌리엄스의 재미없는 농담에 답하는 이는 없었다. 평소였다면 함께 까불어줬을 데릭 지터조차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어느새 양키스 타자들의 머릿속에는 1차전의 악몽이 떠오르고 있었다.
짝짝짝
“거, 다들 너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거 아니야?”
덕아웃 한구석. 험상궂은 인상의 한 사내가 박수로 양키스 타자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이글거리는 눈빛. 분노와 폭력이 인간의 몸을 뒤집어 쓴다면 아마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은 사내였다.
“로저······.”
“저기 전광판을 좀 보라고. 누가 보면 우리가 한 10:0으로 지고 있는 줄 알겠어? 자자 한 번 똑바로 봐보라고. 숫자가 어떻게 적혀있는지 말이야.”
가벼운 말투. 하지만 그 안에 새겨진 으르렁거림이 사람들을 압도했다. 1차전과는 달랐다. 그때 그 자리에는 없었던 그가 양키스 타자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리고 그의 말이 옳았다. 점수는 고작 1:0. 지금 으르렁거리고 있는 오늘 경기 그들의 선발 투수 역시 보스턴의 타자들을 매우 잘 막아주고 있었다.
그의 분노는 정당했다.
“난 보스턴이 아주 싫어. 아마 세상에서 두 번째로 싫은 걸 고르라면 보스턴일거야. 그럼 여기서 문제!! 내가 보스턴보다 더 싫어하는 건 뭘까?”
“그, 글쎄······.”
“그 시x 보스턴 새끼들한테 지는 거야. 응? 알겠어?”
거듭되는 으름장에 마침내 가만히 있던 데릭 지터가 입을 열었다.
“젠장!! 거, 세상에 지는 게 좋은 사람이 어딨습니까?”
“그래, 애송이 말 한번 잘했다. 그렇게 지는 게 싫다면 말로만 떠들지 말고 그 무거운 엉덩이 들고 일어나서 똑똑히 보여주고 오라고.”
10살이나 어린 후배의 대거리 질에 그가 웃었다. 의기소침한 머저리들보다 이렇게 팔팔하게 들이대는 애송이 쪽이 훨씬 나았다. 게다가 심지어 이 애송이는 입만 살아있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현재 이곳 양키스에서 가장 믿음직한 타자였다.
-데릭 지터 승부를 결정짓는 8회 말 역전 투런 홈런!!-
-페드로 마르티네즈 ‘우리는 강력했지만 아주 조금 부족했다. 오늘은 그것 외에 별다른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시리즈 스코어 4:1 뉴욕 양키스, 아메리칸리그 우승!!-
-1999년 월드 시리즈는 오직 뉴욕에서!! 1956년 이후 43년만의 서브웨이 월드 시리즈-
-자이언츠와 다저스가 뉴욕을 떠난 이후, 최초의 서브웨이 월드 시리즈. 과연 그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사상 최강의 핵 타선 뉴욕 메츠. 다시 한 번 왕조를 건설 중인 뉴욕 양키스!! 과연 이 싸움의 승자는?-
-메츠, 우승의 관건은 타선의 폭발, 상대적으로 빈약한 투수진은 약점으로 지목돼······.-
***
“결국 양키스네.”
“뭐 당연한 일이지.”
“그래도 보스턴에는 페드로가 있으니깐. 혹시 했지.”
“에이, 차라리 타자 한 명이 미쳐 날뛰면 몰라도. 선발 투수 혼자서 어떻게 시리즈를 뒤집냐.”
“그야 그렇지만 페드로잖아.”
“어휴, 그놈의 페드로, 페드로. 너 뭐 빚진 거라도 있어? 걔가 부르면 아주 엉덩이도 대줄 기세다?”
“무슨 소리야. 그 정도는 아니거든? 그리고 솔직히 올 시즌 페드로가 잘 던진 건 사실이잖아.”
“그거야 멍청한 아메리칸 리그 타자 놈들이 제대로 못 친 거지.”
“그래서 프레스톤 네가 올해 페드로를 상대로 어땠더라? 3타석 3타수 3삼진이었나?”
“아, 그거야 그날 그냥 컨디션이 좀 안 좋았던 것뿐이거든?”
아메리칸리그의 우승팀이 양키스로 결정 나던 시점. 우리는 셰이 스타디움에서 가벼운 훈련을 수행 중이었다. 4:0. 일방적으로 시리즈를 끝낸 덕에 휴식일은 매우 넉넉했다. 이동일 포함 총 엿새간의 휴식. 투수들은 거의 만전을 갖출 수 있었고 타자들 역시 몸에 쌓인 피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실전 감각이 떨어지지 않을지 걱정이 될 만큼 긴 시간이었다.
양키스 역시 5차전으로 시리즈를 끝낸 만큼 나흘간의 휴식이 있었다. 약간 부족한 감은 있지만 그래도 역시 만만치 않게 긴 시간이다.
양 팀 모두 체력적으로는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일정. 그렇기에 이제 남은 것은 힘과 힘의 맞대결뿐이었다.
작년 월드 시리즈의 홈어드밴티지를 가져간 곳이 아메리칸리그였던 만큼 올해 1차전이 열리는 곳은 우리의 홈구장 셰이 스타디움이었다. 물론 두 팀 모두 뉴욕에 있고 지하철로 5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인 만큼 어디에서 시합을 시작하는지는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이동으로 인한 피로를 제외하더라도 홈어드밴티지가 주는 이점은 작지 않았다.
우리가 가장 많이 뛰었던 곳에서 경기한다는 것. 그리고 일방적으로 우리를 응원하는 팬들 앞에서 경기를 치른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이 됐다.
게다가 그런 정신적인 이유 외에 지명타자의 기용 여부도 매우 중요했다. AL룰에 따라 지명타자를 활용하게 될 경우 아무래도 유리한 것은 그쪽이었다. 물론 우리도 배니 아그바야니와 그렉 보어가 제법 괜찮은 타자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양키스의 지명타자인 칠리 데이비스과 비교한다면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망할, 저놈들 대체 어떻게 저렇게 잔뜩 들어온 거야.”
“그러게······.”
3루 쪽 관중석에 핀스프라이트들이 잔뜩이었다. 거의 3루 내야석 절반 이상이 줄무늬 놈들이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고 해도 명색의 월드 시리즈인데 원정팀 관중들이 저렇게 잔뜩 들어서다니 경기도 하기 전에 상당히 기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제법 괜찮은 활약을 보였음에도 이 꼴이라니. 대체 언제쯤 양키스와의 경기에 핀스프라이트 놈들이 단체로 자리를 차지한 광경을 안 볼 수 있을까 싶었다.
“자자, 꼬맹이들, 기운 내라고. 그래도 시즌 중보다는 훨씬 낫잖아?”
“그건 그렇지만.”
피아자가 프레스톤과 나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저기 저 줄무늬 놈들, 경기 끝나기도 전에 상심해서 빠져나가게 만들어 주자고.”
“내일 경기는 감히 보러 올 엄두도 못나게 말이죠?”
“그래, 바로 그거지. 역시 진호 넌 뭘 좀 아는구나.”
피아자가 나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유치하고 뻔한 고무였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프레스톤의 경우 뜨겁게 콧김을 뿜어내며 오늘 줄무늬 놈들을 박살 내겠다고 의욕을 불태웠다.
마운드에 오르는 알 라이터의 몸이 가벼워 보인다. 일반적으로 선발 피칭을 끝낸 투수들의 몸이 회복되는 기간은 4일에서 5일. 알 라이터의 경우 중간중간 컨디션 조절을 위한 불펜 피칭을 제외한다면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에 등판하고 무려 11일 만의 등판이었다. 그야말로 최상의 몸 상태.
하지만 양키스의 타선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1번 타자인 척 노블라비치가 총 7개의 공을 뽑아내며 내야 안타로 출루에 성공했고, 2번 타자인 데릭 지터가 안타를 기록하며 노아웃 1, 3루의 상황을 만들었다.
이후 3번 타자인 폴 오닐을 병살로 막아냈지만 3루 주자 척 노블라비치가 홈으로 들어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이어지는 4번 타자 버니 윌리엄스를 플라이 아웃으로 잡아내며 1회가 마무리 됐다.
[1회 초, 양키스가 선취점을 뽑아내며 경기를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오늘 양키스 타자들의 타격감이 나쁘지 않은 것 같군요. 알 라이터 선수의 공이 나쁘지 않은데 꾸역꾸역 점수를 만들어냅니다.]
1점을 내줬지만, 덕아웃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에이스 알 라이터는 우리 타자들이 충분한 점수를 내줄 것이라 믿고 있었고, 우리들 역시 알 라이터가 저들에게 대량득점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메츠의 공격, 타석에는 1번 타자 에드가르도 알폰조 선수입니다.]
[알폰조 선수가 1번 타자라니. 메츠의 팬들에게는 조금 생소한 광경일겁니다.]
[아무래도 시즌 중에 헨더슨 선수가 자리를 비웠을 때에는 Kang 선수가 주로 1번 타순에 들어왔었으니깐 말이죠.]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쪽이 훨씬 좋은 선택이에요. 사실 Kang은 빠른 발을 살리겠다고 1번에 두기에 장타력이 너무 좋거든요.]
[물론 에드가르도 알폰조 선수 역시 올 시즌 무려 24개의 홈런을 기록한 거포입니다만 지금 메츠의 타선에선 24홈런도 장타력으로 여섯 번째에 불과합니다. 차라리 두 번째로 높은 출루율을 활용하는 편이 상대적으로 나은 선택입니다.]
[와, 생각해보면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장타율 0.487의 타자가 팀에서 여섯 번째라니 말이죠. 정말 유례를 찾기 힘든 핵타선이라고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물론 양키스 역시 만만치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선발 투수진이 약점으로 꼽히는 메츠와 달리 양키스는 투타 모두 정상급이라고 평가받고 있거든요. 그건 오늘 선발 투수만 보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마운드의 그가 고개를 돌려 우리 덕아웃을 가볍게 훑으며 미소 지었다. 지금 타석에 선 에드가르도 알폰조는 물론이거니와 메츠의 타선 모두가 안중에도 없다는 광오한 태도.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런 그럴 광오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었다. 다른 모든 투수에게 용납되지 않는 일이라 해도 오직 그만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99년 현재까지 메이저 유일의 사이영 5회 수상자이자 메이저 역사상 아홉 명밖에 되지 않는 사이영 MVP 동시 수상자이며 현역 유일의 MVP 투수.
야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투수라는 것을 이 시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사나이.
배리 본즈와 함께 대 약물 시대를 대표하는 최악의 선수.
뻐엉!!!
초구 98마일. 36세의 투수라고 믿기 힘든 포심 패스트볼이 포수의 미트를 꿰뚫었다.
“스트라잌!!”
포심, 포심. 그리고 또 포심. 에드가르도가 최대한 공을 공략했지만 페어지역으로 떨어지는 타구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제 5구.
부웅!!
“스트라잌!! 아웃!!”
90마일.
하지만 속구가 아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스플리터. 에드가르도가 삼진으로 물러났다.
이제 나의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