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96화 (96/210)

# 96화.

용의 눈(4)

뻐엉!!

“스트라잌!!”

‘쳇.’

바깥쪽 낮은 코스 포심 패스트볼. 아슬아슬한 코스였다. 보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존 밖으로 빠져나갔다고 봐도 무방할 코스. 하지만 오늘 심판의 존은 조금 후했다.

평소였다면 1번 타석에서 이런 것들을 꼼꼼하게 체크해줬을 헨더슨의 빈 자리가 아쉬웠다. 마운드 위 6피트 4인치(194cm) 243파운드(110kg)의 흉폭한 체구. 지방 따위는 보이지 않는 단단한 근육의 갑주를 뒤집어쓴 로저 클레멘스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흉폭하게 웃는다. 마치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어느 육식동물과 같은 흉폭함. 그가 두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온다!’

이번에도 역시 코스는 바깥쪽 낮은 코스. 빠른 공이었다. 종전보다 아주 약간 더 밖으로 빠지는 아슬아슬한 공. 심판이 스트라이크 콜을 할지, 하지 않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한번 봄으로서 눈에 익은 코스, 눈에 익은 공이다. 흘려보낼 이유가 없었다. 나의 배트가 힘차게 돌아갔다.

딱!!

높게 떠오른 타구가 1루 파울라인을 넘어 내야석에 떨어진다. 젠장. 마운드의 저 흉폭한 짐승은 단순히 흉폭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비슷한 코스, 같은 구질이었다. 하지만 똑같은 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속이 달랐다. 미묘하게 달라진 타이밍에 타점이 너무 앞에서 잡혔다. 전광판에는 94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아, 큼지막한 파울 타구입니다. 이거 영 좋지 않은 공에 손이 나갔어요.]

[Kang 선수,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올 시즌 양키스 이적 이후 그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던 로저 클레멘스 선수입니다만, 하반기, 그리고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자신이 왜 MVP 투수인지를 충분히 증명하고 있거든요. 쉽지 않습니다.]

놀라운 완급조절.

로저 클레멘스가 세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스플리터.’

누구보다 삼진을 좋아하는 클레멘스다. 분명 여기서는 삼진을 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들어올 터. 지금 당장 배트를 휘두르라고 유혹하는 저 공은 스플리터가 분명했다.

[볼카운트 0-2, Kang이 침착하게 스플리터를 골라냅니다.]

[이게 Kang선수의 장점이거든요. 카운트가 몰린 상황에서도 결코 당황하는 법이 없습니다. 지금도 어지간한 타자라면 손이 나갈 수밖에 없는 변화구인데, 대단합니다. 자 이제 볼카운트는 1-2. 중요한 순간입니다.]

클레멘스의 입가가 씰룩인다. 저것이 분노인지, 아니면 감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의 동작이 한층 더 흉흉해졌다는 점이었다.

그의 네 번째 공이 날아들었다.

빠른 공의 위력이 가장 극대화되는 몸쪽 높은 코스.

하지만 그가 던진 몸쪽 높은 공은 단순히 빠른 공의 위력을 극대화 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이런 미친!!’

콤마 단위의 짧은 시간. 나의 상체가 급하게 뒤로 빠졌다. 아슬아슬하게 코앞을 스쳐 가는 누런 공. 심장의 고동이 요란하다. 급하게 피하느라 엉덩방아를 찧은 엉덩이의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로저 클레멘스의 빈볼!! Kang이 아슬아슬하게 피했습니다.]

[이거 Kang이 순간적으로 잘 피했기에 망정이지 굉장히 위험한 공이었습니다. 손에서 공이 빠진 걸까요?]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노린 공 같은데요? 로저 클레멘스, 이런 중요한 무대에서도 위협구라니. 과연 헤드 헌터 답습니다.]

빌어먹을 약쟁이 자식이 바깥쪽 공을 거듭 던져 사람을 홈플레이트에 붙여 놓더니 이런 식으로 공을 뿌리다니.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저 개자식이?’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은 나를 보며 즐겁게 웃는 클레멘스. 이건 어떻게 생각해도 주먹다짐을 나눠보자는 도발로밖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주먹. 하지만 참았다. 243파운드의 근육질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월드 시리즈. 상대방의 도발에 휘말려 그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고 싶지 않았다.

침착하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타석 밖에서 몸을 풀었다. 급하게 움직이고 바닥에 넘어지면서 무리가 간 곳은 없는지 꼼꼼하게 점검했다. 다행히 얼마 전 보복구를 맞았던 허벅지 말고는 크게 아픈 곳은 없었다. 옷깃을 털고 장갑을 동여맨다.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로저 클레멘스를 향해 가운뎃손가락 대신 입꼬리를 올려주고 또다시 타석에 바짝 붙어섰다. 분노였을까? 아니면 감탄이었을까. 녀석의 얼굴이 씰룩인다.

[Kang 선수 대담합니다. 방금 저 위협구를 보고도 또다시 홈플레이트에 다가서네요.]

[요즘 젊은 선수들에게서는 정말 보기 드문 투쟁심입니다. 레너드 코페트씨가 말했듯이 타격은 결국 공포와의 싸움이거든요. 훌륭합니다.]

[글쎄요, 그래도 저런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이 제가 보기에는 참······.]

볼카운트는 2-2. 딱히 녀석이 유리하다고 말하기도 힘든 카운트다. 녀석이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산다면 여기서 함부로 카운트를 낭비할 리 만무했다.

다섯 번째. 몸쪽 높은?

‘이런 미친놈이?’

황급히 몸을 뒤로 날려 공을 피했다. 존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 예측하고 휘두를 준비를 잔뜩 하고 있던 만큼 매우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나의 선구안과 순발력이 아니었다면 절대 피할 수 없는 공. 나의 입에서 욕설이 절로 흘러나왔다.

[로저 클레멘스, 2구 연속 빈볼입니다.]

[아, 실수였다는 제스쳐를 취하네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번에도 역시 손에서 공이 빠졌다기보다는 노렸다고밖에는 보이지 않는군요.]

[아,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덕아웃 밖으로 나옵니다. 고의적인 빈볼이라고 항의하는 것 같은데요?]

[리그의 규정에 따르자면 의도적으로 타자의 머리를 향해 공을 던지면 경고 없이 퇴장. 그 외에는 경고 이후 또다시 던졌을 경우 퇴장입니다만 사실 이 의도성이라는 것이 입증하는 게 영 쉽지가 않거든요. 하지만 바비 발렌타인 감독은 이번 빈볼의 경우 명백해 의도적이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이봐, 체임벌린 이건 아니지. 이건 누가 봐도 빈볼이잖아.”

“일단 진정하시죠.”

“진정? 지금 진정이라고 했나? 저 자식이 던지는 공을 보고도 지금 그런 말이 나와?”

“투수에게는 경고 조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진정하시고 덕아웃으로 돌아가세요.”

“경고오? 젠장.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대가리를 노리고 공을 던졌는데 경고라고? 허, 참.”

발렌타인 감독이 뛰쳐나와 구심에게 맹렬하게 항의했다. 솔직히 저런 항의가 받아들여질 거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99년의 메이저리그는 아직 빈볼에 매우 관대했고, 대부분의 팬, 그리고 선수들 역시 위협구와 싸우는 배짱이야말로 타자의 조건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 생각에 동의했고, 지금 격렬하게 항의하는 ‘척’하는 발렌타인 감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꾸 이러시면······.”

“젠장, 저 개자식에게 똑똑히 전해두라고. 한 번만 더 이런 개 같은 공을 던지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심판의 참을성이 다하기 직전. 절묘한 타이밍. 발렌타인 감독이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마운드의 로저 클레멘스는 자신에게 경고가 주어진 것에 살짝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저런 경고로 저 개자식이 빈볼을 절대 던지지 않으리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런 인간이었다면, 이렇게 티 나게 두 번 연속 빈볼을 집어 던지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운드의 저 인간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빈볼을 꽂아 넣을 인간이다.

여섯 번째 공이 파울로 연결됐다. 그리고 일곱 번째 중앙으로 몰린 공. 반쯤 돌아간 배트가 멈춰섰다.

뻐엉!!

[볼넷, 볼넷입니다. 풀카운트에서 침착하게 스플리터를 골라내는 Kang. 변화구에 속아주질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로저 클레멘스 선수로서는 앞서 낭비한 두 개의 볼카운트가 참 아쉽겠네요.]

방망이를 던져두고 1루로 향했다. 마운드의 로저 클레멘스가 나를 노려본다.

‘뭐 어쩌라고.’

나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깐의 눈싸움. 그의 입가가 또 한 번 씰룩인다. 타석에 마이크 피아자가 들어왔다.

‘클레멘스와 피아자라. 지금 시점에서는 아직 그런 관계가 아니었던가?’

메이저 리그에서 앙앙불락하는 사이로 유명해질 두 사람이었다. 뭐 동등한 앙숙이라고 보기에는 여러가지 면에서 더 지랄맞은 로저 클레멘스에게 피아자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가 좀 많긴 하지만 말이다.

[타석에 마이크 피아자가 들어옵니다.]

1루에서 세 걸음 반. 99마일의 구속을 뽐내는 투수라고 해도 우완투수인 로저 클레멘스다. 게다가 마스크를 쓴 것은 소녀 어깨로 유명한 호르헤 포사다. 지금처럼 온전한 몸 상태의 나라면 도루에 실패할 리 만무했다.

마운드의 로저 클레멘스가 정지 동작에 들어갔다. 콤마 단위의 짧은 타이밍. 그의 왼발이 마운드를 밟는 그 순간 나의 몸이 2루를 향해 쏘아졌다.

뻐엉!!

2루까지 열아홉 걸음. 커다란 포구음이 내 귀를 울린다. 포수가 공을 뽑아 이루수에게 던지기까지 아슬아슬한 시간이다. 최선을 다해 땅을 박차고 2루를 향해 몸을 날렸다.

[1루 주자 달립니다!!]

남은 거리는 이제 여섯 걸음. 아직 이루수 척 노블라비치의 글러브는 움직이지 않는다.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

나의 몸이 낮게 깔린 채 2루를 향해 미끄러졌다.

‘젠장!!’

하지만 호르헤 포사다의 어깨를 너무 얕본 것일까? 나의 손이 2루 베이스에 닿기 전 척 노블라비치의 글러브가 나의 등을 아주 약간 먼저 두들겼다. 마운드의 투수가 로저 클레멘스고 타석의 타자가 마이크 피아자였기에 1회 말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도루를 시도한 것인데, 최악의 결과가 나와 버렸다.

“세이프!!”

‘응?’

그러나 심판의 입에서 뜻밖의 판정이 튀어나왔다. 약간 미묘하긴 했지만 분명한 아웃 상황에서 튀어나온 세이프 판정. 척 노블라비치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심판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직 비디오 판정조차 도입되지 않은 시점이다. 선수의 항의가 심판의 판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아,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Kang이 공격적인 도루를 통해 득점권까지 자력으로 진출합니다.]

[자, 이제 안타 하나면 동점이 되는 상황이에요.]

1아웃 주자 2루. 그리고 타석에 마이크 피아자.

마운드의 로저 클레멘스가 두 번째 공을 뿌렸다.

딱!!

‘이거지.’

로저 클레멘스의 몸쪽 공을 피아자가 그대로 잡아당겼다. 좌익수 방면으로 흐르는 빠른 타구. 나의 몸이 빠르게 3루로 향했다. 3루 주루코치의 손이 힘차게 돌아갔고, 나의 몸이 왼쪽으로 급격히 꺾였다. 3루 베이스를 밟고 그대로 홈까지. 호르헤 포사다의 몸이 홈플레이트를 가로막는다. 하지만 나 역시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충분한 증량을 걸친 나의 몸이 포사다의 몸을 두들겼다.

쾅!!

자연스럽게 홈플레이트를 덮으며 쓰러지려는 포사다. 하지만 내가 조금 더 강했다. 나의 숄더 차지가 그의 쓰러지는 방향을 틀어놓는다.

“세이프!!”

[2루 주자 홈까지!! 그 사이 피아자는 여유롭게 2루에 들어옵니다.]

[마이크 피아자의 2루타. 메츠가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습니다.]

로저 클레멘스의 얼굴이 또다시 씰룩인다. 이번에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짜증이다. 로저 클레멘스가 피아자를 싫어하는 것과 그 싫어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유명했다. 피아자는 로저 클레멘스의 공을 기이할 정도로 매우 잘 두들겼다. 마치 메이저의 타자가 마이너 레벨, 그것도 싱글A나 루키리그의 선수들을 두들기는 것처럼 말이다.

“좋았어!!”

1:1 동점.

경기가 원점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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