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용의 눈(5)
마운드의 로저 클레멘스가 입가를 씰룩였다. 자신의 공들을 낱낱이 해부하는 것 같은 기분 나쁜 녀석에 이어, 자신 있게 던진 몸쪽 공을 너무 쉽게 집어 당기는 녀석까지. 요 며칠 최고조이던 기분이 조금 다운됐다.
‘내가 너무 안일했나?’
오랜 시간 그가 바라던 목표는 보스턴 레드삭스에 대한 복수였다. 무려 13년 동안이나 팀에 헌신했던 로저 클레멘스 자신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보스턴. 그런 보스턴 레드삭스가 그토록 바라던 월드 시리즈를 로저는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양키스의 일원이 되어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그것도 그들이 가장 믿고 신뢰하던 에이스와의 맞대결을 통해서 말이다. 그것은 개인이 팀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였고 그것을 이루는 순간 그의 목표는 이뤄졌다.
그래서였을까? 승리에 대한 욕망보다 건방진 애송이를 교육해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버렸다. 그리고 결과는 보다시피 좋지 못했다. 그냥 조금 놀아준다는 것이 볼넷, 도루 그리고 실점으로까지 이어져 버렸다.
‘뭐, 그래도 애송이 놈 교육은 교육이니깐.’
로저 클레멘스가 금새 아쉬움을 접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긴 했지만 앞으로 같은 상황이 온다고 해도 클레멘스는 지금과 똑같게 행동할 것이다. 자신은 로저 클레멘스였다. 야구라는 종목이 만들어진 이래 가장 강력한 투수.
배부른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놓쳤다고 진지해지지 않는 법이다. 토끼 한 마리가 도망쳤다고 정색하기에 보스턴이라는 살찐 사슴을 잡아먹은 그는 너무나도 배부른 사자였다.
***
포심 그리고 스플리터. 단조로운 레파토리였지만 강력했다. 투 피치라도 공 하나하나가 리그 최정상급의 구위라면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피칭. 물론 우리 타선 역시 만만치 않았다. 메츠 역사상 최강의 핵타선이라는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양키스의 타선 역시 놀고 있지만은 않는다는 점이었다.
[데릭 지터!! 쳤습니다!! 힘껏 잡아당긴 타구. 좌측 담장을 직격합니다.]
[1루 주자 척 노블라비치!! 2루 지나 3루로. 3루 지나 홈까지!! 홈에서!!!]
“세이프!!”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3회 초 양키스의 추가점. 양키스가 다시 경기를 앞서 나갑니다.]
[그사이 데릭 지터는 2루까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3회 초 2:1 상황. 원아웃 주자 2루.]
[타석에는 3번 타자 폴 오닐 선수가 들어옵니다.]
알 라이터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데릭 지터를 필두로 한 양키스 타자들의 컨디션이 너무 좋았다. 거기에 운도 따르지 않았다.
[좌익수 방향 높게 뜬공!! 어? 어?]
리키 헨더슨을 대신해 좌익수로 출전한 배니 아그바야니가 평범한 플라이볼을 놓쳤다. 2루에 머물러있던 데릭 지터가 비호처럼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27살. 메이저 풀타임 1년차. 아그바야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한눈에 봐도 당황한 모습. 그의 손이 바닥을 서너 번 되짚는다.
[아, 어처구니 없는 에러. 폴 오닐은 무사히 1루에, 2루 주자 데릭 지터는 홈까지 들어왔습니다.]
[올 시즌 메츠의 네 번째 옵션으로 쏠쏠한 활약을 보여줬던 배니 아그바야니 선수. 큰 무대의 긴장감 때문인지 영 좋지 않은 실수를 하고 맙니다.]
[3회 초. 점수는 3:1까지. 원아웃 주자 1루. 버니 윌리엄스가 타석에 들어옵니다.]
새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질려버린 아그바야니의 얼굴. 알 라이터가 뒤로 돌아 괜찮다 손짓했지만, 그의 얼굴색은 좋아지지 않았다. 아그바야니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일까? 아니면 더이상 점수를 주면 안 되겠다는 에이스의 직감 때문이었을까. 알 라이터가 여유분의 기어를 끌어 올렸다. 땅볼이 아닌 삼진을 노리는 공격적인 피칭. 그가 총 13개의 공으로 두 타자 연속 삼진을 잡아냈다.
그리고 3회 말.
타순의 시작은 8번 배니 아그바야니.
3회 더 이상의 추가실점 없이 경기를 마무리한 덕분인지 아그바야니의 안색이 조금은 돌아왔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하지만 돌아온 것은 안색뿐. 배니 아그바야니가 어슬프기 짝이 없는 스윙을 보이며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렉 준비하도록.”
한 번의 에러는 눈감아줬던 바비 발렌타인이었다. 하지만 타석에서 보인 추태는 용납하지 않았다. 배니 아그바야니를 대신 해 그렉 보어가 투입됐다. 10년간 메이저를 떠돌며 얻어낸 첫 월드 시리즈. 그렉 보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돈다.
그리고 4회 말 주자 없는 상황에서 나의 두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4회 말, 선두 타자 Kang이 타석에 들어옵니다. 앞선 1회 말 볼넷으로 출루했던 Kang. 현재 내셔널 리그에서 가장 유력한 MVP 후보입니다.]
마운드의 로저 클레멘스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전신의 신경이 오직 그의 손끝에 집중된다. 먹이를 찾는 맹수처럼 느긋하게, 하지만 마지막 순간 폭발적으로 움직이는 그의 손끝에서 98마일짜리 속구가 날아들었다.
딱!!
[초구!! 쳤습니다만 파울, 파울입니다.]
[아, 몸쪽 공에 배트가 밀렸네요. 로저 클레멘스. 99마일 빠른 공입니다.]
몸쪽 높은 코스 깊숙하게 걸치는 공. 존에 걸치는 공이라고는 해도 헤드샷으로 경고까지 먹은 인간이 선택하기에는 껄끄러운 코스였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심판의 경고까지 먹은 상황에서 헤드샷을 노리지는 않겠지만 지금 마운드에 선 인간은 결코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맹수의 그것을 닮은 미소가 섬찟하다.
덕아웃의 몇몇 동료가 엉덩이를 들썩인다. 하지만 이건 아슬아슬하긴 했어도 분명 존에 걸치는 공이었다.
‘젠장.’
타자가 홈플레이트에 붙는 것을 싫어하는 투수는 많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공격성을 보이는 인간은 드물었다. 타석 밖에서 가볍게 몸을 푼 내가 또다시 홈플레이트에 바짝 다가섰다.
승부에서 이기는 법은 상대방이 싫어하는 짓을 골라서 하는 것이다. 녀석이 싫어하는 티를 저렇게 팍팍 내주는데 단지 빠른 공이 무섭다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로저의 얼굴에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저 지랄 맞은 녀석이라면 어쩌면······.’
제2구. 마운드의 로저 클레멘스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맙소사. 이 인간, 또다시 몸쪽 높은 코스다.
딱!!
[쳤습니다!! 제대로 잡아당긴 큼지막한 타구!! 우측 담장 쪽!! 넘어가나요? 넘어가나요? 넘어갔습니다!!]
[4회 말, 선두 타자 Kang이 로저 클레멘스의 98마일 포심을 그대로 잡아당겨 홈런을 만들어 냅니다. 메츠가 1점을 쫓아가며 스코어는 3:2. 월드 시리즈 1차전!! 박빙의 승부가 이어집니다.]
***
부웅
그렉 보어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스트라잌!! 아웃!!”
무려 10년을 기다려온 무대. 월드 시리즈. 리키 헨더슨의 부상이, 배니 아그바야니의 실수가.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리고 그런 기회를 그는 고작 공 네 개에 날려버렸다.
로저 클레멘스.
그와는 동갑인, 하지만 데뷔는 5년이나 빨랐던 투수가 오만하게 웃는다. 서른 여섯살.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질투심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다. 하지만 그 수많은 포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뱃속 깊숙한 곳에서 은은하게 끓어오르는 열기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한 번 더.
아직 5회 말이다. 그리고 야구는 9회까지다. 물론 1점차의 긴박한 상황에서 감독이 그를 타석에 그대로 세워줄 것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투수를 상대할 기회가 또 한 번 주어진다면 어떻게든 지금과 다른 결과를 만들겠노라 스스로 다짐했다.
공수 교대.
메츠의 에이스 알 라이터가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93년, 그리고 97년. 한번은 불펜으로, 그리고 한번은 선발로 이미 두 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알 라이터다. 월드 시리즈 무대가 힘들다는 것 정도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장에라도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알 라이터를 끌어 줬던 것은 동료들이었다.
알 라이터는 알고 있었다. 그 소중했던 동료들의 역할을 지금 이 메츠에서는 바로 자신이 해야 한다고. 두 개의 반지를 가지고 있는 메츠의 에이스 알 라이터.
6회 초. 그가 사력을 다해 공을 뿌렸다.
***
8회 말.
점수는 3:2. 마운드에는 아직 로저 클레멘스가 올라와 있었다.
타순의 시작은 8번 그렉 보어. 배니 아그바야니를 대신해 투입된 그는 많은 경험을 갖춘 AAAA급의 노련한 타자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로저 클레멘스를 상대로 그가 안타를 치는 것은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배트 스피드가 너무 늦어.’
타자의 신체적 기량은 27살 정도에 정점을 찍고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대의 타자들이 꾸준한 활약을 보이는 것은 떨어지는 신체의 기량만큼 기술적인 역량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신체적으로 떨어지는 것을 기술로 커버하는 것에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 금지된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타자의 기량이 급락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30대 중반. 그리고 그렉 보어의 나이는 이미 30대 후반이었다.
8회 말에도 99마일짜리 포심과 90마일짜리 스플리터를 던져대는 약에 찌든 괴물을 상대하기에 그는 너무 늙어버렸다.
뻐엉!!
“스트라잌!!”
초구 스트라이크. 상당히 몰린 공이었다. 아마 마이크 피아자가 저 자리에 있었더라면 충분히 외야로 퍼 올릴 수 있을 만큼 쉬운 공. 하지만 그렉 보어의 배트는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딱!!
2구 바깥쪽 높은 코스 97마일 빠른 공. 그렉 보어의 배트가 간신히 공을 건드렸지만 늦었다. 파울.
‘8이닝 3실점. 알 라이터는 충분히 잘 던졌어. 아마 여기서 대타를 쓰겠지.’
9번 타자는 아마도 로저 세드뇨. 그리고 그 다음은 에드가르도다. 사실상 남은 기회은 에드가르도, 나, 그리고 피아자로 이어지는 상위 타선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렉 보어가 삼진이나 범타로 물러난다고 가정했을 때, 내 앞에 로저 세드뇨, 혹은 에드가르도가 출루에 성공만 해준다면 아직 역전의 찬스는 있었다.
딱!!
그렉 보어가 세 번째 파울 타구를 만들었다. 10년 만의 기회. 포기할 수 없는 타석에서 보여주는 노장의 투혼이다. 따라갈 수 없는 공을 따라잡으려 하는 그의 투혼이 눈부셨다. 마운드의 로저 클레멘스가 여섯 번째 와인드업에 들어간다. 그의 얼굴에는 이미 은은한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다.
***
타석 밖으로 물러난 그렉 보어가 찐득한 땀방울을 닦아냈다. 고작 다섯 개의 공이었다. 하지만 그 공들을 뽑아내기 위해 그는 무려 36년이라는 세월 동안 배트를 휘둘러왔다. 그리하여 볼카운트는 0-2. 하나의 스트라이크와 네 개의 파울. 맨손으로 헬멧을 문질러 헬멧에 묻혀둔 파인 타르를 손바닥에 골고루 발랐다. 가볍게 침을 뱉어 양손에 비비고 더러워진 배트를 꾹 잡는다. 이제는 드물었지만, 그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메이저의 많은 타자들은 이렇게 맨손으로 야구 배트를 잡아 왔다.
그렉 보어가 다시 타석에 섰다. 넓게 펼쳐 단단하게 대지를 붙든 두 다리. 촌스러운 타격폼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 폼을 찾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7년. 이 폼을 완성하고야 그는 마침내 마이너를 벗어나 메이저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그래 봐야 딱 거기까지였지만.’
마운드의 로저 클레멘스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발버둥 치는 벌레를 보는 것 같은 표정. 하지만 상처받지 않는다. 분노 또한 하지 않는다. 아무리 까치발을 들어도 아무리 팔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위대한 투수다. 아무런 감정 없이 오직 일념으로 그가 던지는 공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그는 파울조차 만들 수 없었다.
제6구. 로저 클레멘스의 공이 날아들었다. 앵앵거리는 벌레를 침몰시키기 위한 그의 무기. 속구만으로도 과분한 그렉 보어라는 타자에게 과분하기 짝이 없는 그의 결정구. 스플리터였다.
‘조금 빠졌나?’
8회 말 강철같은 체력을 자랑하는 그라고 해도 조금은 힘이 빠진 탓인지 회전이 좋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충분하다. 눈앞의 저 타자는 이름조차 모를 늙어빠진 마이너에 불과했다.
하지만 로저 클레멘스는 잊지 말았어야 했다. 눈앞의 타자는 비록 메이저라는 위대한 무대에 주연은커녕 조연의 재능조차 갖추지 못한 한 명의 엑스트라에 불과했지만, 스스로의 평생을 보답받지 못하는 야구라는 가혹한 운동에 바쳐온 위대한 인간이였다는 것을.
‘드디어!!’
늙어버린 그렉 보어의 동체 시력은 로저 클레멘스의 빠른 공이 날아드는 곳을 정확히 알아채지 못한다.
늙어버린 그렉 보어의 순발력은 로저 클레멘스의 빠른 공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늙어버린 엑스트라가 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
다섯 번의 불가능을 버텨내며 마침내 그렉 보어가 단 한 번의 기회를 포착했다.
물론 노림수라고 해도 이것은 천운이었다. 만약 로저 클레멘스의 스플리터가 평소와 같은 예리함을 자랑했다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그저 땅볼에 불과했을 것이다.
딱!!
[쳤습니다!! 그렉 보어!! 그렉 보어가 로저 클레멘스의 스플리터를 쳐냅니다.]
하지만 천운이라고 해도 그것을 만들어 낸 것은 오직 그렉 보어의 집념이었다. 8회 말 그렉 보어가 2, 3루간을 뚫는 안타로 1루 베이스를 밟았다.
월드시리즈 1차전 메츠의 마지막 역전기회가 마련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