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98화 (98/210)

# 98화.

용의 눈(6)

“괜찮겠어?”

“······.”

마치 불타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빛. 지금 입을 여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모욕이라는 것처럼 로저 클레멘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독의 지시로 마운드에 오른 양키스의 멜 스토틀마이어 투수코치가 고민에 빠졌다.

7이닝 2실점. 1점 차이. 만약 이 경기가 리그 전이었다면 두말할 것 없이 투수를 믿고 맡겼을 것이다. 당연하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그 로저 클레멘스다. 그는 존중받아 마땅한 커리어를 기록 중인 대투수였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월드 시리즈. 1승 1패가 향후 수십 년 동안 회자될 수 있는 승부의 장이었다. 비록 최근 3년 사이 2번의 월드 시리즈를 차지한 양키스였지만 그들 역시 우승이 중요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손에서 조금 빠진 겁니다. 아직 멀쩡합니다.”

로저 클레멘스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멜 스토틀마이어에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는 지치지 않았다. 물론 8회인 만큼 처음 마운드에 오를 때처럼 팔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판이 필요한가를 묻는다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보스턴에 대한 복수심이라는 변명으로 시작한 금지된 약물은 그의 신체를 한층 강건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지간해서는 지치지 않는 체력, 그리고 범인의 상상을 넘어서는 회복력을 안겨주었다. 그의 현재 몸 상태는 다른 투수들이 5이닝 혹은 6이닝 정도를 뛰었을 때와 비슷했다.

“정말 괜찮겠어?”

멜 스토틀마이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굳이 시험하려는 그에 대해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그의 불안을 잠재우고 피칭을 이어나갈 수 있다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로저 클레멘스가 그의 오른손을 꽉 움켜쥐었다.

‘큭.’

어마어마한 악력.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에 스토틀마이어가 순간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좋았어. 아직 멀쩡하군.”

“아웃 카운트 6개 정도는 충분합니다.”

[메츠,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1루 주자 그렉 보어를 대신해 대주자 로저 세드뇨 선수를 9번 타자 알 라이터를 대신해 맷 프랑코를 투입하는군요.]

[뜻밖의 안타가 나온 지금이 승부를 걸 타이밍이라 이거죠. 8회 말 1점 차. 물론 아직 한 번의 공격이 더 남아있기는 합니다만, 상위타순이 시작되는 지금이 어쩌면 마지막 찬스일지도 모릅니다.]

뻐엉!!

“스트라잌!!”

‘찬스? 웃기지 말라고 해.’

신경조차 쓸 필요 없어 보이던 엑스트라에게 뜻밖의 일격을 허용한 것은 인정한다. 단순히 앵앵거리는 벌레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침 하나 정도는 들고 있는 꿀벌 정도는 되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부웅!!

“스트라잌!!”

남은 것은 오직 2이닝 6개의 카운트뿐.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로저 클레멘스의 공이 메츠의 타자들을 가로막았다.

뻥!!

“스트라잌 아웃!!”

***

기대도 하지 않았던 그렉 보어가 안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후속타는 나오지 않았다. 맷 프랑코, 에드가르도 알폰조 연달아 두 명의 타자가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2아웃 주자 1루. 나의 타석이 돌아왔다.

‘젠장. 최소한 주자가 득점권에라도 가 있기를 바랐는데.’

1점이 절실한 상황. 로저 세드뇨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단타로 홈까지 들어오기는 무리다. 필요한 것은 최소 2루타. 후속 타자인 피아자는 믿음직했지만 어찌 됐건 내가 살아나가야지만 그에게 타선이 연결된다.

각오를 굳히고 방망이를 움켜쥐었다.

[8회 말 2사 주자 1루. 3:2의 상황에서 타석에 Kang이 들어옵니다.]

[올 시즌 2년 차로 MVP급의 활약을 펼친 Kang 선수. 오늘 경기에서도 아주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메츠가 낸 2점의 득점이 모두 Kang이 만든 득점입니다.]

[그렇습니다. 1회 말 볼넷으로 출루해서 단독 도루, 그리고 피아자 선수의 2루타로 1득점을, 4회 말에는 솔로 홈런으로 두 번째 득점을 기록했습니다.]

[오늘 경기 3타석 2타수 1안타 1홈런. Kang의 네 번째 타석입니다.]

8회 말. 벌써 110개가 넘는 공을 던졌음에도 로저 클레멘스에게서 지친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98마일 빠른 공이 바깥쪽 낮은 코스로 꽉 차게 들어왔다.

뻐엉!!

“스트라잌!!!”

‘젠장.’

앞선 타자들을 상대할 때도 팔팔해 보이던 클레멘스다. 하지만 지금 이 공은 숫제 이번 경기 그가 보여준 모든 공들 중 가장 강력해 보였다. 역시, 피아자가 자기를 잘 두들긴다고 이유 없이 시비를 걸어대는 쫌생이답게 4회 내가 홈런을 친 것을 아직도 담아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두 번째 바깥 코스. 빠르게 날아드는 공.

‘스플리터다.’

반쯤 돌아간 배트를 멈춰 세웠다.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 나의 예감은 잘 들어맞는 편이었고 그것은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뻐엉!!

볼카운트 1-1

로저 클레멘스가 세 번째 공을 던졌다.

딱!!

파울. 그리고 또 파울. 그리고 또다시 파울. 좋은 코스인 척 나를 유혹하는 스플리터를 골라냈다. 볼카운트 2-2.

또다시 로저 클레멘스의 얼굴이 씰룩인다.

‘좋은데?’

마운드에서 내려가 로진백을 두드리고 침을 발라 손가락에 끈적함을 더하는 로저 클레멘스. 그가 마운드로 돌아와 투수판을 밟기 직전의 타이밍에 맞춰 타임을 요청했다.

‘짜증을 좀 내 보라고.’

천천히 옷깃을 정돈하고 장갑을 조여 맺다. 힐끔 마운드를 살폈을 때, 그곳에는 몇 번이나 자신의 공을 커트 당하고 이제는 피칭 타이밍마저 뺏긴 그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급하게 들어오는 공. 난폭했고 거칠었으며 존 안쪽으로 몰려있었다. 하지만 빠르고 강했다.

딱!!

이번에도 역시 파울이었다. 전광판에 떠오른 숫자는 두 자릿수가 아니었다.

100

8회 말 118구째에 나온 시속 100마일. 아무리 약빨이라지만 인간이라고 믿기 힘든 터프함이었다. 볼카운트는 여전히 2-2. 마운드의 로저 클레멘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짜증이 잔뜩 섞인 표정의 로저 클레멘스. 호르헤 포사다가 마운드로 올라갔다.

글러브와 미트로 입을 가린 두 사람. 하지만 코 위로 보이는 표정과 동작에서 의견의 충돌이 느껴진다.

‘설마 여기서 볼넷으로 거르자는 말은 아닐 것 같은데. 뭘까?’

한참을 이야기하던 포사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운드의 로저 클레멘스가 여덟 번째 공을 뿌렸다.

‘바깥쪽? 빠졌어!!’

바깥쪽 공 두 개 만큼 빠진 공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나를 볼넷으로 내보내겠다는 의도인 걸까? 구속 역시 그리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나의 등허리를 스친다.

로저 클레멘스다.

피아자에게 볼넷을 내주기 싫어서 헤드샷을 날려버리는 인간. 말년에 풀타임을 뛰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팀에 고액으로 합류해 순위경쟁 용병 짓을 하는 비양심적인 인간. 그런 주제에 커리어 하나만큼은 메이저 역사상 최고였던 인간. 과연 그런 인간이 여기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타자에게 순순히 볼넷을 내줄까? 그것도 포수의 의견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꺾어가면서?

아니다.

그렇다면?

나의 배트가 힘차게 움직였다. 노리는 곳은 존의 정중앙. 바깥쪽으로 향하던 공이 홈플레이트를 한참 앞에 두고 안으로 꺾여 들어왔다. 의식하고 있다면 너무나도 쉬운 밋밋한 슬라이더. 하지만 그대로 보고 있었다면 루킹삼진을 당했을 만한 공이었다.

딱!!

로저 클레멘스라는 인간의 인성을 의심한 것이, 그리고 그가 말년에 포심, 스플리터 투 피치에서 슬라이더를 더한 쓰리 피치 투수로 변신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좌측 담장 끝으로 향하는 타구. 1루의 로저 세드뇨는 이미 2루 베이스를 밟고 있다. 배트를 내려놓고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2루? 아니 외야수의 반응에 따라 어쩌면 3루까지도 가능할 타구다. 지금 상황에서 하나의 베이스는 그야말로 천금과도 같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 몸을 왼쪽으로 꺾었다. 오른발이 1루 베이스를 스친다. 속도는 떨어지지 않았다. 2루 베이스까지 여덟 걸음. 3루 주루코치의 손이 힘차게 돌고 있다.

[Kang!! 쳤습니다!! 강한 타구. 우익수 폴 오닐 달려가지만 늦습니다. 워닝트랙 깊숙한 곳까지 틀어박히는 공!! 그사이 1루 주자는 2루 지나 3루에, 3루 지나 홈까지!! 동점, 동점입니다!!]

[Kang, 빠릅니다!! 2루 지나 3루까지. 폴 오닐!! 폴 오닐!!]

[아, 맙소사. 우측 펜스 높은 곳을 맞고 불규칙하게 굴절된 타구!! 폴 오닐이 공을 놓쳤습니다.]

2루 지나 3루까지. 그런데 3루 코치의 기색이 심상치 않다. 그의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설마?’

뒤를 돌아보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며 코치의 지시를 따른다. 벌써 90야드(82.026미터)를 달린 심장이 급격히 산소를 요구했다. 하지만 괜찮다. 오랜 훈련으로 단련된 나의 몸은 고작 이정도 전력 질주로 느려지지 않는다. 불끈거리는 두 다리에 박차를 가했다. 3루 베이스를 지나 홈까지. 홈 베이스의 호르헤 포사다가 자세를 잡고 있다. 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폴 오닐!! 공을 잡아 척 노블라비치에게!!]

[아!! 송구 좋지 않습니다. 척 노블라비치 선수 무너진 자세에서 그대로 홈으로!!]

홈플레이트까지 다섯 걸음. 홈을 막고 있던 포사다의 몸이 열렸다.

‘어째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거저 주는 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다. 나의 왼발이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역전!!! 역전입니다!!! 맙소사. 8회 말 Kang이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기록합니다.]

[월드 시리즈 1차전. Kang의 역전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 8회 말 메츠가 양키스를 1점 차로 앞섭니다.]

[와우, 정말 대단한 장면이었습니다. 아, 그런데 잠깐만요 방금 이게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으로 기록될까요? 폴 오닐 선수의 송구 실책으로 기록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글쎄요, 이건 기록원이 어떻게 기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긴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정상적인 송구라고 해도 Kang을 잡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고 봅니다. 타구의 방향, 수비의 위치 모두 좋지 못했어요.]

[어쨌든 정말 희귀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이게 만약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으로 인정된다면 어디 보자······. 아, 무려 70년만의 월드 시리즈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이로군요. 기록상 월드 시리즈에서 기록한 마지막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은 1929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그러니깐 지금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뮬 하스 선수가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기록한 것이 마지막입니다.]

[아, 지금 올라왔습니다.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입니다. 8회 말 Kang의 네 번째 타석이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으로 기록됩니다.]

덕아웃에서 동료들이 힘차게 달려 나온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손바닥들. 그 속에는 힘든 경기에서 역전을 이뤄냈다는 기쁨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 미친 자식!! 월드 시리즈에서 멀티 홈런이라니.”

마치 자기의 일처럼 좋아하는 프레스톤. 그리고 자기가 주루 플레이 연습하자고 매일 보챘던 덕분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 자랑하는 리키 헨더슨. 그리고 그렉 보어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나를 끌어안고 등을 두들긴다.

8회 말. 극적인 역전 홈런.

경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 어? 넘어갔습니다!! 마이크 피아자!! 홈런!! 홈런입니다.]

[아, 마이크 피아자 선수. 여기서 쐐기점을 만들어 버리네요. 8회 말 5:3. 로저 클레멘스가 결국 마운드를 넘깁니다.]

-월드 시리즈 1차전 8회 말 메츠의 짜릿한 역전승.-

-4타석 3타수 2안타 2홈런(1 장내 홈런) 1볼넷. 3타점 3득점으로 큰 무대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인 강진호. 이미 MVP는 확정적!!-

-서브웨이 시리즈 1차전. 위기에 빠진 팀을 구원하는 강진호의 장내 홈런.-

-월드 시리즈 1차전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 70년 만의 진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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