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99화 (99/210)

# 99화.

용의 눈(7)

양키스와의 2차전.

양키스의 선발 투수는 빅게임 피쳐 앤디 페티트였다.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우리의 선발은 오렐 허샤이저. 지금까지 쌓아 올린 커리어로만 본다면 허샤이저의 압승. 하지만 현재의 폼만으로 본다면 앤디 페티트 쪽이 확실히 앞서는 대진표였다.

하지만 오렐 허샤이저는 앤디 페티트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갖고 있었다.

레이 오도네즈.

2차 세계대전 이후 99년의 그보다 뛰어난 수비를 보여준 유격수는 오직 75년의 마크 베링거밖에 없는 이 시대 최고의 수비수가 오늘도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올 시즌 0.258/0.319/0.317이라는 처참한 타격 성적을 가지고도 WAR(대체선수대비 승리기여도)로만 따진다면 내셔널리그 16개 팀의 주전 유격수 중 3번째로 높은 성적을 거둔 그의 수비가 눈부셨다.

오늘 선발로 나선 투수들인 앤디 페티트와 오렐 허샤이저 두 사람은 방법은 각기 달랐지만 모두 땅볼을 유도하는 형태의 투수라는 점은 동일했다. 물론 양키스 역시 올 시즌 양대리그를 통틀어 가장 높은 WAR을 기록한 데릭 지터라는 유격수가 버티고 있었지만, 그가 위대한 유격수인 이유는 그 뛰어난 타격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유격수 수비가 가능하다는 점이었지 결코 유격수로 훌륭한 수비가 가능하다는 이유가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 팀에는 오도네즈의 부족한 타격을 대신해 줄 훌륭한 타자들이 즐비했다.

화끈한 타격전.

각각 5이닝씩을 버틴 선발들이 물러나고 불펜들이 연달아 투입됐다.

그렇게 8회 초 양키스의 공격이 끝난 시점에서 점수는 11:10. 우리가 한 점을 앞서는 상황에서 우리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공격 찬스가 돌아왔다.

[자, 8회 말 점수는 11:10 양키스가 1점을 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1차전에서 승리했던 메츠가 이번 2차전도 승리를 가져가는 모양새입니다. 4번을 먼저 이겨야 하는 월드 시리즈에서 1, 2차전 연승이 의미하는 바는 상당히 크거든요. 지난 94번의 월드 시리즈에서 1, 2차전을 모두 패배한 팀이 반지를 차지한 것은 고작 11번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메츠도 아직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고작 1점 차이에요.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위타순이 돌아오는 이번 공격에서 추가점을 따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의미로 양키스 역시 이번 경기를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잡기 위해서는 여기서 추가점을 내줘서는 안 됩니다.]

[아, 양키스의 조 토레 감독이 여기서 승부수를 띄웁니다.]

그라운드에 야구를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나 익숙해질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옥의 종소리와 함께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유명한, 아니 유명해질 등장 곡. 메탈리카의 Enter Sandman이 바로 그것이었다. 작년 월드 시리즈 트래버 호프만의 등장 곡인 지옥의 종소리에 자극을 받아 세 번의 변경을 거쳐 확정된 등장 곡이 경기장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야구 역사상 최고의 마무리 투수.

메이저리그 최후의 42번. 양키스의 끝을 알리는 자. 샌드맨. 슈퍼 마리아노.

마리아노 리베라.

그가 마운드 위에 섰다.

[마리아노 리베라가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올 시즌 66경기 69이닝 4승 3패 45세이브. ERA 1.83. 이닝당 안타+볼넷 허용률이 0.884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철벽 그 자체.]

[이렇게 되면 양키스가 자신의 시나리오대로 경기를 풀어나간다고 가정했을 때, 리베라 선수는 최소 2이닝을 던져야 하는 셈입니다.]

[아무래도 내일 이동일로 하루의 휴식이 주어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크게 무리가 가는 일정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말이 이동일이지 같은 뉴욕인 만큼 사실상 하루 푹 쉬는 거라고 봐도 될 테니까 말이죠.]

[타석에는 9번 데니스 쿡을 대신해 맷 프랑코가 들어옵니다. 어제 경기 대타로 출전해 삼진으로 물러났던 맷 프랑코 선수. 하지만 선구안도 괜찮고 파워도 있는 선수입니다. 예상외의 한 방이 나올 수 있는 선수예요.]

스윙 스트라이크.

파울.

그리고 빡!!

마리아노 리베라의 공을 두들긴 맷 프랑코의 배트가 쪼개지고 타구가 힘없이 붕 떠올랐다.

[내야 뜬공!! 이루수 척 노블락이 가볍게 처리합니다.]

[와, 한순간 몸 안쪽으로 파고든 리베라 선수의 커터 좀 보세요. 과연 뱃 브레이커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습니다.]

맷 프랑코의 뒤를 이어 타석에 들어온 에드가르도가 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8회 말 2아웃 주자 없음. 나의 타석이 돌아왔다.

[타석에 2번 타자 Kang이 들어옵니다. 어제 경기 2홈런을 기록했던 Kang. 오늘 경기는 5타석 4타수 1안타. 2루타로 조금 부진합니다.]

[멀티 출루에 장타 하나를 기록했음에도 부진하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 참 재밌네요.]

[그건 아무래도 오늘 전반적인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Kang이라는 선수에 대한 기대가 이제는 그만큼 높아졌다고 봐야겠죠.]

11:10. 1점을 앞서고 있는 상황. 굳이 여기서 추가점을 내지 않더라도 9회 초 양키스의 공격만 막아낸다면 우리의 승리는 확정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단순히 나의 개인 기록 때문은 아니었다.

지나가버린 미래, 내가 가장 간절하게 원했던 것은 야구로 ‘성공’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공은 그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내가 죽는 순간까지 간절히 원했던 것은 바로 메이저리그라는 가장 위대한 무대에서 야구를 하는 것 그 자체였다.

그리고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와의 승부는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무대였다.

포스트시즌의 마리아노 리베라.

평소에도 강력한 마리아노 리베라였지만 포스트시즌의 그는 그 평소의 강함 이상을 보여줬다. 본래 있었던 미래. 그의 포스트시즌 96경기 141이닝 평균 자책점은 무려 0.70. 그야말로 언터쳐블 그 자체였다.

마리아노 리베라의 왼쪽 다리가 가슴팍까지 치솟았다.

딱!!

손끝이 얼얼하게 저렸다.

파울.

커터를 예측하고 휘둘렀지만, 그 예측 이상으로 깊숙하게 리베라의 공이 파고들었다. 밖에서 보던 것보다 더 빠르고 날카롭다.

‘이게 일반적인 커터라 이거네.’

이 시점에서는 아직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아니었다. 마리아노 리베라는 중요한 상황에서만 던지는 또 다른 커터가 존재한다. 일반적인 커터 그립으로는 나올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커터.

딱!!

이번에도 또 파울이었다. 순식간에 볼카운트 0-2.

마리아노 리베라가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인가?’

제3구. 리베라의 공이 바깥쪽 낮은 코스로 파고들었다.

딱!!

‘젠장.’

포심이었다. 특별한 커터를 예상하고 배트를 휘둘렀기에 미묘하게 빗나간 공이 또다시 파울 지역으로 향한다. 차라리 보이는 대로 휘둘렀다면 좋은 타구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을. 약간의 아쉬움.

리베라가 네 번째 공을 준비했다.

‘이거다!!’

미묘하게 느리다는 느낌. 솔직히 콤마 두 자리의 시간 차이를 느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것은 그저 나의 느낌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 느낌이라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바깥쪽 높은 코스에서 몸쪽으로 파고드는 92마일 커터.

나의 배트가 예상되는 위치를 향해 힘차게 움직였다.

딱!!

예상했던 그 커터였다. 일반적인 커터보다 훨씬 덜 떨어지는 커터. 원리는 간단했다. 본래 커터는 팔꿈치와 손목의 스윙을 공의 역회전이 아닌 횡회전에 돌림으로써 수평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구종이다.

하지만 리베라의 경우 비범한 손가락의 힘을 이용해 공을 긁어줌으로써 일반적인 커터와 전혀 다른 그립, 그러니깐 포심 패스트볼에 가까운 그립으로 커터를 던지곤 했다. 그렇기에 그는 본래 횡회전으로 사용돼야 할 힘을 고스란히 역회전에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타자 친화적인 양키 스타디움을 홈으로 사용하는 리베라는 덜떨어지는 자신의 커터에 일부러 역회전을 억제해 땅볼을 유도했는데 이것은 양키 스타디움이라는 무대에서 아주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무대, 큰 타구의 위험성을 각오하더라도 삼진에 더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가끔 그만이 던질 수 있는 그 특별한 커터를 던지곤 했는데 그 경우 솟아오른다는 착각을 들게 할 만큼 위력적인 커터가 나오곤 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마운드, 리베라의 얼굴에 경악이 스친다.

딱 좋은 공이었다. 생각했던 그것보다 조금 덜떨어지고 조금 더 움직이기는 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높게 떠오른 타구가 우측 담장을 슬쩍 넘어갔다.

[홈런!! 홈런입니다. 경기에 쐐기를 박아버리는 솔로포!! 월드시리즈 2차전 Kang이 또다시 홈런을 기록합니다.]

-뉴욕 메츠 2차전 12:10 승리. 시리즈 스코어 2:0, 이제 경기는 양키 스타디움으로-

-아시아에서 온 핫가이. Kang의 그칠 줄 모르는 홈런 쇼.-

-뉴욕 메츠. 비대해질 페이롤 관리에 비상사태?-

***

2차전 경기가 끝나고 이동일이라 이름 붙은 휴식일. 나의 에이전트 제프 보리스가 집으로 찾아왔다.

“축하합니다.”

“에이, 아직 결정 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축하에요.”

“결정이요? 아, 월드 시리즈, 그리고 이번에 발표된 골드글러브 후보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뭐 월드 시리즈야 이미 1, 2차전을 이겼으니 거의 다 이뤄진 거나 다름없고 골드글러브 역시 Kang이 배제될 확률은 극히 낮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리고 제가 드리는 축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네? 그러면 대체 뭘 축하한다는 말씀인 건지?”

“그때 지시하신 일 성공적으로 끝냈습니다.”

“아, 연장계약이요? 음, 분명 7년 7천만 달러까지 제안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축하 라면 설마 그쪽에서는 그걸 받아들이겠다던가요? 아니지,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걸 받아들이는 건 말이 안 되는데.”

현재 팀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리그 최고의 공격형 포수 마이크 피아자의 금액이 7년 1억 달러다. 심지어 그는 FA 계약으로 수령 한 금액이 그러했다. 아무리 메이저리그에 연봉 인플레가 일어나고 있다지만 서비스 타임 5년을 커버하는 7년으로 7천만 달러를 받는다는 것은 몹시 무리한 제안이었다.

애초에 그들이 제안했던 것은 7+1년(클럽옵션) 4천만 달러+1200만 달러의 제안이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조금 달라져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20홈런을 기대할 수 있는 뛰어난 수비의 외야수와 40홈런이 가능한 MVP급 올라운드 플레이어는 그 무게부터가 달랐다.

“여깄습니다.”

제프 보리스가 씨익 웃으며 나에게 서류를 건넸다.

7+1년(클럽옵션) 7천만+1300만 달러.

여러 가지 세세한 옵션들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1999년, 아직 서비스 타임이 5년이나 남은 선수에게 건네는 연장계약이라고는 믿기 힘든 제안. 물론 올해 나의 활약이 대단하긴 했지만, 그래 봤자 고작 한 해다. 고작 1년 대단한 성적을 거뒀다고 해서 이런 제안을 받아오다니. 대체 보리스가 어떤 마법을 부린 것인지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만족하시나요?”

“물론이죠. 솔직히 기대 이상입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이대로 진행해주세요. 물론 관련된 일정은 월드 시리즈가 끝난 이후로 잡아주시고요.”

미래를 알고 있는 나에게 사실 돈이란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물론 생활에 지장을 줄 만큼 가난한 상황이라면 이야기는 달랐지만,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자본이 축적된 상태라면 마음만 먹는다면 나는 세계제일의 부자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연봉이란 단순히 그런 돈의 의미만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곧 메이저리그라는 세계에서 나의 가치였고, 뉴욕 메츠가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는 족쇄였으며 커리어에 기록되는 성적과는 조금 다른 나의 또 다른 성적표였다.

월드 시리즈 3차전을 앞둔 1999년 10월 25일.

내 야구 인생에 하나의 굵은 마디가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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