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용의 눈(8)
2차전이 끝난 저녁. 커다란 링컨의 뒷좌석에 몸을 파묻은 청년의 얼굴이 어둡다.
올해 나이 31살. 제국의 2인자. 늙어버린 제국의 보스를 대신해 일선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대리인. 브라이언 캐시맨.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대학을 졸업하고 적당한 직장의 시니어 스태프, 혹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디뎠을 나이였다. 하지만 그의 삶은 평범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이제 곧 자신의 휴대전화로 날아들 메시지가 어떤 내용일지 너무 쉽게 짐작이 갔다.
드르륵
<이런 멍청한 자식. 당장 내 방으로 달려와!!>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리더. 뉴욕의 보스. 조지 스타인브레너였다.
‘하, 진짜 다 때려치울까?’
품 안의 사표를 만지작거린다. 그가 이 봉투를 품에 담고 다닌 지도 벌써 2년. 정확히 전직 단장인 밥 왓슨이 스타인브레너 밑에선 더는 못 해 먹겠다고 사표를 던지고 나간 바로 다음 날부터였다.
YES 글로벌그룹의 본사 최상층 사무실.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사무실로 들어가는 캐시맨의 발걸음이 무겁다. 사무실 앞, 스타인브레너의 오랜 비서 제시가 그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마치 사형장으로 들어가는 사형수 같은 모습. 사무실의 문이 열리기 무섭게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말똥 같은 자식 같으니!! 너 내가 너한테 대체 얼마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말똥은 돈이라도 안 받아가지. 대체 생각이라는 게 있는 거야? 빌어먹을 자식. 내 네 살 먹은 손자 녀석을 네 자리에 앉혀도 네 놈보다는 잘 할 거야. 알아듣겠어? 이런 빌어먹을 머저리 같으니.”
“······.”
“젠장, 메츠 놈들 따위에게 지다니. 아니 잠깐만. 너 설마 내가 예전에 너 같은 새끼 받아 줄 곳은 메츠밖에 없을 거라고 메츠랑 직업 상담해보라고 이야기했던 거 진짜로 한 거냐? 그래서 저 멍청한 메츠 놈들에게 월드 시리즈 우승이라도 건네주고 거기 가서 단장질이라도 해볼 생각인 거야? 응? 하긴 멍청한 스티브 자식이나 네 놈이나 거기서 거기니 그놈으로서는 손해 볼 것도 없긴 하겠네.”
“말씀 다 하셨습니까?”
어차피 품속에는 언제라도 던져버릴 수 있는 사표를 품고 있다. 양키스라는 팀은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참고 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의외로 저 보스는 자신의 말에 대답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다 하기는. 아직 네 놈에게 해줄 말이 산더미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젠장, 1, 2차전에서 그 홈런을 세 개나 친 노란 놈은 대체 뭐야? 이제 하이스쿨이나 다닐 나이 같던데. 왜 벌써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건데? 그래서 내가 토네이도 놈을 보고 일본 놈들 데리고 오자고 너한테 이야기했었잖아. 대체 왜 말을 안 들어먹은 거야!!”
“일단 그 녀석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입니다. 그리고 그 건에 관해서는 이미 제출했었잖습니까. 제가 분명 아시아 쪽 유망주들에 대해 스카우트를 늘리자고 건의 드렸는데 ‘흥? 젖비린내나는 아시아의 애송이 놈들을 언제 키워서 데리고 오겠다는 거야. 토네이도처럼 자기 리그에서 검증된 놈들을 데리고 오란 말이야!! 어차피 거긴 푼돈 받고 야구하고 있잖아.’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안 그래도 NPB 쪽 FA 자격을 얻을 스타급 선수들과 접촉 중이고요.”
“그래서, 지금 이 꼴이 난 게 내 잘못이라 이 말이야? 이 망할 놈이!!”
“일단 진정하십쇼. 아직 월드 시리즈가 끝난 것도 아니잖습니까.”
“젠장, 2연패나 해놓고 월드 시리즈가 끝난 것도 아니잖습니까 라는 말이 나오냐. 이 멍청아!! 게다가 로저 클레멘스 그 돈만 잔뜩 받아먹는 싸가지 없는 새끼랑 우리 앤디, 그리고 리베라까지 다 내놓고 진 거잖아.”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얼굴이 또다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작년 패배 없이 월드 시리즈를 제패했던 자신의 양키스가 2연패를 한 것을 생각하니 또다시 열이 뻗친 것이다.
“그래도 다음 경기부터는 우리 홈에서 열리는 경기입니다. 게다가 그 녀석들 대부분이 월드 시리즈를 경험해보지 못한 데 반해 우리 쪽은 3년 전에 이미 패패승승승승으로 월드 시리즈를 우승해본 경험이 있는 선수들 아닙니까.”
“그래서 잘 안 풀리면 어쩔껀데?”
“그렇다면 여기 이걸.”
캐시맨이 품 안의 사표를 꺼내 들이민다. 그런데 어째 스타인브레너의 표정이 떨떠름하다.
“아, 이 새끼 이거. 또 이러네.”
비록 폭언에 욕설을 입에 달고 있긴 했지만, 스타인브레너는 이 캐쉬맨이라는 어린 녀석을 좋아했다. 입으로는 꼬박꼬박 대들면서도 결국 자신의 결정에 가장 어울리는 선택으로 그를 보좌하는 이 GM은 어디를 가더라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인재다. 쓸데없이 명문대를 졸업한 애송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녀석이다. 결국, 스타인브레너는 캐시맨의 사직서를 받는 대신 어디 재취업도 못 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한바탕 으름장을 놓는 것으로 오늘의 화풀이를 끝냈다.
***
베이브 루스가 지은 집. 양키 스타디움.
70년대 한차례 리모델링을 거치기는 했지만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낡아 버린 스타디움에 5만7천여 관중이 가득 찼다.
셰이 스타디움과 달리 3루 관중석에 우리 유니폼을 입은 관중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게 정상이었다. 월드 시리즈라는 큰 경기에 원정 관중이 대량으로 들어와 뭉쳐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 양키스의 선발은 데이비드 콘. 36살의 베테랑으로 94년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의 위너로 양키스라는 사기적인 전력을 갖춘 팀이기에 3선발을 맞고 있는 것이지 어지간한 팀이라면 충분히 1선발을 맡을 수 있는 투수였다. 올 시즌 활약만 보더라도 아메리칸리그 전체에서 열 손가락 안에는 충분히 들어가는 데이비드 콘.
하지만 오늘은 상대가 좋지 못했다.
딱!!
[존 올러루드 큼지막한 타구!! 우측 담장을 크게 넘어갑니다!!]
[메츠, 오늘 경기 벌써 4번째 홈런입니다.]
[양키 스타디움이 홈런이 좀 잘 나오는 구장이긴 합니다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조금 심하군요.]
[지난 경기에 이어 여전히 강력한 메츠의 타선. 양키스의 팬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하네요.]
[9회 초 벌써 7점 차입니다. 양키스의 마지막 공격이 남아있긴 합니다만, 이건 사실상 경기 끝났다고 봐야겠죠.]
2차전 승리에 이은 3차전의 압도적 승리. 이제 월드 시리즈 우승까지 남은 것은 오직 1승뿐이었다.
-충격!! 뉴욕 양키스 3차전 패배. 양키스 1941년 브루클린 다저스와의 경기 이후 58년 만의 3연패!!-
-역대 95번의 월드 시리즈, 16번의 전승 우승. 그중 일곱 번은 양키스가 기록!! 뉴욕 양키스 굴욕의 전패 준우승을 차지할 것인가.-
-역대 월드 시리즈 역사상 1, 2차전을 패배하고 역전한 경우는 총 11번. 하지만 1, 2, 3차전을 패배하고 역전한 경우는 전무!! 대역전극의 시작이 될 것인가, 아니면 메츠의 무난한 세 번째 우승이 될 것인가!!-
4차전. 양키스 선수들의 눈빛이 달랐다. 세계제일의 명문 클럽 뉴욕 양키스의 역사에 월드시리즈 4연패라는 오점을 남기는 선수가 될 수는 없다는 절박함.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감독인 조 토레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균수명이 2년이 채 되지 못하는 양키스의 감독자리를 무려 4년간 유지 중인 능력자. 본래 역사대로라면 조 토레는 무려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양키스의 감독자리를 유지한다.
물론 올 시즌 이렇게 월드 시리즈에서 패배한다면 성격 급한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그를 유임시킬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반면 우리의 바비 발렌타인 감독은 매우 여유로운 표정이다. 아니 실제로 그는 매우 여유로웠다. 월드시리즈 역사상 3:0의 스코어가 뒤집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최근 우리 팀의 기세를 보면 패배를 걱정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어 보이는 수준이다. 그 증거로 어제 양키스의 유니폼들로만 가득하던 관중석 곳곳에 우리 메츠의 유니폼들이 보였다. 월드 시리즈 우승이 결정 날지도 모르는 시합에 웃돈을 주고서 참석한 팬들이었다. 그들의 발걸음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제와 달리 경기는 제법 팽팽하게 흘러갔다. 물론 단순히 양키스 선수들의 정신상태가 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투수를 아끼지 않았다. 설사 오늘 시합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남은 시리즈를 치러낼 수 없을 것 같은 투수 운용.
반면 우리는 정석대로 4선발인 마사토 요시이가 마운드에 올라왔고, 그가 다소 점수를 내주더라도 빠르게 그를 마운드에서 내리지 않았다.
4회가 끝난 시점에서 5:3
양키스가 2점을 앞서는 가운데 우리의 다섯 번째 공격 차례. 단타로 출루한 로빈 벤츄라의 뒤를 이어 프레스톤 윌슨이 타석에 들어섰다. 이번 월드시리즈 4경기 20타석 19타수 6안타.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이번 시리즈 대부분이 화끈한 타격전이었음을 생각한다면 크게 좋은 성적은 아니었다.
마운드의 투수는 제이슨 그림슬리. 올해 만 31세의 불펜 투수로 최대 99마일의 공을 뿌리는 올 시즌 양키스의 셋업을 담당했던 투수였다.
평균 자책점은 3.60. 타자들의 천국인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서 뛴 것 치고는 매우 훌륭한 성적이다. 실제로 89년 데뷔 이후 지금까지 그가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순간은 바로 지금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제이슨 그림슬리는 팀의 로저 클레멘스와 함께 사이좋게 경기력 향상 약물을 빨아 재낀 투수였으니 말이다. 정상적인 운동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근육들이 꿈틀거렸다.
제이슨 그림슬리의 98마일 포심이 홈플레이트를 스쳤다.
부웅!!
“스트라잌!!!”
타석의 프레스톤이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분명 나쁘지 않은 타격감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리즈 동안 유달리 운이 없었던 프레스톤이다. 아마 이전이었다면 그 불행에 신경 쓰느라 슬럼프가 찾아왔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하지만 지난 1년간의 메이저 생활을 허투루 한 것은 아니었는지 녀석의 신색은 담담했다.
제2구. 마찬가지로 빠르고 강력한 공. 20대에 최고구속 95마일을 넘기지 못하던 투수의 99마일 포심을 프레스톤이 침착하게 받아쳤다.
딱!!
[프레스톤!! 쳤습니다!! 강한 타구. 좌측 담장을······, 넘어갔습니다!! 프레스톤 윌슨 홈런!! 홈런입니다.]
[대단합니다. 양키 스타디움이 홈런이 많이 나오는 구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측 담장과 비교해 좌측 담장을 넘기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프레스톤 윌슨 선수의 월드 시리즈 1호 홈런. 메츠가 2점을 따라붙으며 동점을 만들어냅니다.]
베이스러닝을 끝내고 돌아오는 프레스톤을 향해 높게 손을 내밀었다.
짜악!!
방실방실 웃는 녀석의 표정이 보기 좋았다.
프레스톤의 뒤를 이어 타석에 선 것은 타석에서는 기대할 게 없지만 그라운드에서는 누구보다 믿음직한 남자 레이 오도네즈였다.
‘흠, 나까지 타석이 돌아오려나?’
노아웃 상황. 내 앞에 남은 타자는 총 네 명. 하위타선이라지만 마음의 준비는 어느 정도 해두고 있는 편이 좋았다.
잠시 벤치 뒤쪽에 내려놓은 헬멧을 찾아 등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딱!!
“엑?”
“어?”
“응?”
“허······.”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동료들의 깜짝 놀란 괴성이 들려왔다. 기묘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황급히 등을 돌려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 있었다.
[레이 오도네즈!! 홈런!! 홈런입니다. 좌측 담장을 살짝 넘기는 백투백 홈런!! 5회 초 뉴욕 메츠가 또다시 양키스를 앞서기 시작합니다.]
“맙소사. 오도네즈가 홈런을 쳤어.”
“아직 1999년이잖아.”
“아니야. 다들 진정하라고. 이건 포스트시즌이잖아. 카운트를 따로 해야지.”
“무슨 소리야. 그래도 99시즌 2호 홈런은 2호 홈런이지.”
96년 데뷔 이후 매년 99년까지 4년 연속 딱 1개씩의 홈런만을 기록해오던 오도네즈의 두 번째 홈런. 이 순간 나는 오늘 이 경기에서 승리할 것 같다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1999년 10월 27일. 우리끼리 불가능한 일을 지칭하던 ‘오도네즈 2호 홈런 치는 소리 하고 있네.’라는 말이 현실로 이뤄졌다.
-익명을 요구한 메츠의 P모 선수 ‘오도네즈의 시즌 2호 홈런이 일어날 확률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포스트시즌 전승 우승은 그냥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뉴욕 메츠. 76년 빅 레드 머신 이후 최초의 전승 우승!! 95년 디비전시리즈가 시작된 이후 최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