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03화 (103/210)

# 103화.

밀레니엄(2)

-파멜라 앤더슨과 결별에 의한 충격? 거듭되는 부진 강진호!! 벌써 네 경기 연속 무안타. 마침내 3할 타율마저 무너지다.-

-쿠어스 필드 3연전을 앞두고 있는 강진호.-

-쿠어스 필드 통산 전적 51타석 47타수 18안타 5홈런!! 과연 강진호는 쿠어스에서 반등에 성공할 수 있을까?-

-강진호 쿠어스 필드에서조차 볼넷 두 개뿐. 일곱 경기 연속 무안타!!-

-강진호 24일 경기 선발 라인업 제외. 이번 시즌 여섯 번째 결장.-

-뉴욕 메츠 와일드카드 탈락 확정!!-

-작년 월드 시리즈 우승팀의 극적인 몰락. 과연 문제는 어디부터였는가.-

-강진호 오는 26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벡스와의 홈 1차전 경기 출전 확정!! 상대 투수는 커트 실링. 과연 강진호는 부진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

미국으로 들어온 지 2년 7개월. M.Sc를 취득한 지 6개월 만인 지난 8월. 가리비아가 그린 카드를 손에 넣었다. 드디어 미국에서 제대로 된 생산 활동을 시작할 자격을 얻은 것이다. 이것은 모두 진호의 도움 덕분이었다.

3년 전, 진호와의 만남 이후 가리비아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가진 것이라고는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론밖에 없던 가리비아에게 진호는 자신의 삶을 구해준 은인과도 같았다. 아무것도 실전에서 증명한 것이 없던 애송이를 진호는 전적으로 믿어주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숙식 제공, 하는 일에 비해 너무나도 풍족한 임금. 장담컨대 세상에서 진호 같은 고용주도 또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가리비아가 대학원을 진학해 석사과정을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배려까지 해주었다. 남미의 평범한 학부졸업생이 미국 유수의 대학원 석사과정을 끝내고 마침내 영주권을 손에 넣기까지 모든 과정에는 진호의 배려와 도움이 숨어있었다.

그린 카드를 손에 넣은 이상 가리비아는 더 많은 선수를 케어하는 사업을 벌일 수 있었다. 실적은 충분했다. 지난 3년간 강진호라는 MVP급 타자의 피지컬을 정밀하게 케어한 것은 분명 대단한 실적이었다.

하지만 가리비아는 최소한 이번 시즌은 오직 진호만을 케어할 생각이었다.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진호의 상태는 이미 궤도에 올랐고 24시간 그를 지켜볼 필요는 없었다. 최소한 지금 진호의 부진에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금 진호의 몸은 그가 진호의 몸을 케어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완벽했다.

***

셰어 스타디움.

와일드카드 탈락이 확정됐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찾은 팬들의 숫자는 상당했다. 그것은 올 시즌 메츠의 경기가 제법 괜찮았기 때문이라는 점과 상대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벡스라는 점 때문이었다. 작년 포스트 시즌에서의 난투극 이후 메츠와 다이아몬드 벡스 간에는 기묘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기묘한 신경전은 시즌 중반 트레이드로 애리조나에 합류한 커트 실링이라는 어그로로 인해 한층 더 거세게 타올랐다.

“애리조나의 저 개자식들. 지금 샌프란시스코랑 1승 차이던가?”

“어, 이번 시리즈 우리가 스윕 하면 저 자식들 지구 우승은 완전 물 건너가는 거지.”

게다가 메츠의 와일드카드 실패는 확정이었지만 이번 시리즈를 스윕 해버리면 애리조나의 지구 우승 역시 물 먹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메츠의 팬들이 기묘한 유대감을 가지고 경기장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따악!!

누런 공이 하늘을 날았다.

[어? 어? 홈런, 홈런입니다!!]

[5회 초 메츠, Kang의 2점 홈런!! Kang이 커트 실링의 초구를 그대로 잡아 당겼습니다.]

[최근 몇 경기 부진한 모습을 보이던 Kang선수. 홈으로 돌아오자마자 시즌 35호 홈런을 기록합니다.]

[최근 주변이 조금 시끄러워서 컨디션을 찾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텐데, 역시 보통 선수가 아니에요.]

[이거 역시 와일드카드 탈락에도 불구하고 구장을 찾아 준 메츠의 팬들에게는 아주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

“메츠의 영웅이 거기서 우중충하게 뭐하고 있는 거야.”

“그냥. 짐은 다 쌌어?”

“어, 뭐 짐이라고 해봐야 별것 없더라.”

“새로 이사 가는 집에 같이 들어가도 되는데.”

“에이, 언제까지 얹혀살 수는 없잖아. 그리고 누구누구씨 덕분에 나도 제법 부자라고.”

“부자는 무슨. 그래 봐야 뉴욕에 13평짜리 아파트 하나 간신히 얻을 돈이면서.”

“야, 내 나이에 뉴욕에 아파트 한 채 살 만큼 돈 있으면 엄청 부자거든?”

올해를 끝으로 가리비아와 함께 쓰던 아파트의 계약이 끝났다. 사실 계약이 끝나지 않았더라도 더 이상 이 아파트에 살 생각은 없었다. 올해를 기점으로 나는 아주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런 비좁은 아파트에 월세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 대형 아파트 펜트 하우스를 통째로 사버릴 만큼 말이다.

“기분은 좀 괜찮아?”

“뭐, 그럭저럭. 언제까지 울상으로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래, 그래 보인다.”

“게다가 좋은 교훈도 하나 얻었잖아.”

“교훈?”

“어, 유명인이랑 연애할 때는 정말 조심스럽게 해야겠다 하는 교훈.”

“안 하겠다는 건 아니네.”

가리비아의 이야기에 내가 씩 웃었다. 솔직히 이번의 경우 이별도 이별이지만 이후 터져나오는 기사들과 주변의 시선도 만만치 않게 힘들었다. 타블로이드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나와 파멜라에 관해 떠들었고 이제 막 활성화되기 시작한 인터넷 여론은 그런 타블로이드를 정말 미친 듯이 퍼다 날랐다. 대부분은 그저 웃어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소식이 있었다.

-강진호, 파멜라 비디오 유출?-

파멜라가 수차례 나와 관계를 맺는 것을 영상으로 남기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나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인터넷 세상이라는 것의 전파력은 아날로그와는 다르다. 무심코 찍은 영상 하나가 전 세계 모두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우리가 맞닥뜨릴 세상이었다. 나는 파멜라를 설득했고, 일견 파멜라는 수긍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 달 전. 나는 침실에 설치된 카메라를 발견했고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이 길어질수록 난 그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나와의 만남이 그저 조금 길게 이어지는 자극에 불과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별을 통보하는 나에게 그녀는 나에게 그저 이전에 설치했던 카메라일 뿐 우리의 관계를 촬영한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난 믿을 수 없었다. 이전에 그 자리에 카메라 따윈 없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래간만에 보리스가 나를 대신했다. 과정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며칠 전 보리스는 모든 것이 끝났고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왔다. 물론 여전히 언론은 여전히 시끄러웠고 사람들은 입방아를 찧었다.

하지만 난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입 다물게 하는 것은 나의 결백이 아니라는 것을.

-강진호, 시즌 35호 홈런 포함 멀티안타 기록!!-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투혼. 시즌 막판 강진호 특유의 몰아치기 재점화.-

-과연 강진호는 3할 타율을 찾아올 수 있을 것인가.-

-잠깐의 부진을 털어낸 강진호의 부활포!! 애리조나의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우승을 저지하다.-

***

메츠의 구단주 프레드 윌폰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것은 부정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 중에는 보기 드물게 친절하고 상냥했으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스티브 필립스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고 스티브는 그 기회를 통해 2000년의 메츠를 완벽하게 망가트렸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아버지, 고민할 게 뭐가 있습니까. 스티브 그 개자식은 당장에 짤라 버리고, 우리도 그 세이버 매트리션이라는 너드들을 잔뜩 고용하고 그 너드들을 컨트롤 할 수 있는 단장을 영입해야죠.”

“역시 그래야겠지?”

하지만 그의 아들 제프 윌폰은 달랐다. 그는 욕심이 많고 의욕적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 조지 스타인브레너를 존경했다.

사람들에게 조지 스타인브레너와 프레드 윌폰 중 누가 더 좋은 사람인지를 묻는다면 십중팔구 프레드 윌폰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둘 중 누가 더 좋은 구단주인지를 묻는다면 백이면백 모두 조지 스타인브레너를 택할 것이다.

제프 윌폰은 좋은 사람이기보다는 좋은 구단주, 좋은 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물려받게 될 이 뉴욕 메츠라는 구단을 뉴욕 양키스에 못지않은 위대한 구단으로 일궈내고 싶었다.

작년 강진호의 7+1년(클럽옵션) 7천만+1300만 달러 역시 그의 강력한 주장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좋은 선수를 얻기 위해서는 큰돈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큰돈이 좋은 인재를 불러온다. 이것은 그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에게 스티브 필립스는 자신이 물려받을 구단을 망가트린 쥐새끼에 불과했다.

“신규 채용을 확대하겠습니다. 학부생, 졸업생을 가리지 않고 좋은 녀석들을 끌어모으겠어요. 저기 양키스의 브라이언 캐시맨을 좀 보세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런트에 취직했는데 지금은 그 양키스의 단장이에요. 구태의연한 방식으로는 안됩니다. 아버지, 이제 구단은 저에게 맡겨 주세요.”

제프 윌폰의 두 눈이 야망으로 번뜩였다. 노쇠한 프레드 윌폰이었다. 그의 주력 사업인 부동산 사업 대부분은 이미 눈앞의 아들, 제프 윌폰이 대신 처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들이 진행한 그 사업들은 클린턴 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맞물리면서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이룩했다. 비록 다른 분야이기는 했지만 실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한 아들이다. 믿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프레드 윌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

“어이, 앤드류 뭘 보는 거야?”

“어? 아무것도 아니야.”

“에이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

앤드류가 성급히 윈도우 창을 내리는 걸 목격한 제임스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이봐 좋은 건 좀 같이 보자고.”

“아니,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앤드류가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끌어내린 윈도우 창을 화면에 띄웠다.

“응? 이게 뭐야? 야구? 아, 너 원래 대학에서 야구 했었다고 했었지? 근데 부상 때문에 접었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야구는 왜?”

“그냥.”

“그런 거 봐봤자 속만 상하지. 그럴 시간에 열심히 일해서 아예 구단을 하나 통째로 사버리자고.”

“잘도 그러겠다.”

“잘도 그러기는. 이번에 옆 부서 라제쉬가 크게 한 건 해서 보너스로 600만 달러 받아간 거 몰라서 그래? 우리도 그런 거 몇 번 해주면 뭐 구단 하나 정도야 가뿐하지.”

입사동기인 제임스의 이야기에 앤드류가 미소지었다. 뭐 힘들기는 하겠지만 아주 가망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차피 야구는 4년 전 어깨 부상과 함께 그의 손을 떠났다. 대학에서 4년간 피 터지게 공부한 경영학,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이 투자자의 삶이야 말로 이제 자신이 전념해야 하는 삶이었다.

‘하지만······.’

예상되는 연봉은 지금의 20% 남짓. 업무 시간은 지금의 1.5배 이상. 장래성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암울했고 심지어 영원히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야구였다. 아홉 명의 얼간이가 넓은 경기장 위에서 던지고 치고 달리는 공놀이. 앤드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 앤드류?”

“미안, 제임스. 나 어디 좀 급하게 가봐야 할 곳이 생겨서.”

“오후 업무는 어쩌려고.”

“중요한 건 얼추 다 끝내 놨으니깐!!”

맨해튼, 월 스트리트 21번가. 180센티 남짓한 한 청년이 급하게 휘파람을 불어 노란 택시를 잡아탔다.

“셰이 스타디움으로요. 지금 빨리요.”

23살 앤드류 프리드먼.

그가 인생의 기로에서 현실이 아닌 꿈을 선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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