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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06화 (106/210)

# 106화.

2:1(3)

뻐엉

‘허······.’

그라운드의 시합이 내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올해 33살의 투수 케빈 어피어. 89년 21살의 젊은 나이에 메이저에 데뷔해서 9년간 로얄스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그는 98년 쇄골 부상, 그리고 이어지는 어깨 수술로 인해 완벽하게 몰락했다. 92에서 94마일을 웃돌던 평속은 89마일까지 감소했고 급락한 구속만큼 성적 역시 나빠졌다. 커리어 평균 3점대 초반이던 ERA는 5점을 넘어갔다.

‘아, 그러고 보니 케빈이 말년에 새로운 부상을 얻기 전까지 잠깐 괜찮았졌었나?’

내가 부상에서 결국 회복되지 못하고 강제로 은퇴 당했던 시기, 다시 삶에 여유가 생겨 야구를 취미로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까지의 시간은 제법 길었다. 덕분에 이 시기 야구계에 대해서는 아주 유명한 선수들, 그리고 유명한 몇 가지 일들을 제외한다면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케빈 어피어는 부상으로 인한 기량 하락을 이겨내지 못하고 쓸쓸하게 은퇴했다는 정도였다. 그렇기에 지금 마운드에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매우 놀라웠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케빈 어피어가 푸홀스를 비롯한 세 명의 타자를 연달아 삼진으로 잡아냈다. 전광판에 새겨진 숫자는 86. 스프링 트레이닝 초반임을 생각해도 절대 빠른 공은 아니었다. 하지만 40인 언저리 수준의 선수들이라고 해도 세 명의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냈다는 것은 구속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일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그 셋 중 하나는 그 푸홀스였다. 비록 아직 설익었다고는 하지만 당장 올해부터 리그에서 손꼽히는 활약을 보일 바로 그 푸홀스 말이다.

‘뭐, 우연인지 아닌지는 조금 더 지켜보면 알겠지.’

***

“얼마를 보조하던 지금이라도 치워야 합니다.”

“휴, 이봐. 작년 한 해 부진했다고는 해도 클래스가 있는 선수야. 지금이 저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연봉보조를 해서 팔자고?”

“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도미넌트한 투수지 반등할지 안 할지 모르는 투수가 아닙니다. 리그 최정상급의 선수들의 서비스타임이 끝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승리를 가지고 와야해요.”

“그런 누구나 알 법한 뻔한 소리는 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보자고 현실적으로.”

“돈이 아깝다고 로스터에 도움이 안되는 선수를 채워놓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겁니다. 절반 이상, 아니 80%의 보조를 하더라도 이건 치워야해요.”

“이봐, 프리드먼. 1,100만 달러가 어디 애들 이름이라고 생각해? 1,100만의 80%면.”

“압니다. 880만 달러. 하지만 지금 메츠의 페이롤을 생각하면 그걸 희생하고 우승을 가지고 올 수 있다면 얼마든지 희생 가능한 비용입니다. 지금은 매몰비용을 아까워할 시기가 아니에요.”

“자네가 그 숫자만 가지고 놀다 와서 현실감이 좀 떨어지나 본데. 야구는 그런 게 아니야. 애초에 코니 정도의 클래스 있는 투수가 고작 1년 부진했다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서야 야구 못하지.”

“호들갑이 아닙니다. 여기 이거 좀 보세요.”

프리드먼이 30페이지 정도 되는 두꺼운 서류를 내밀었다. 알레한드로 팀장이 불퉁한 표정으로 그 서류를 훑었다.

“이게 뭐야. 주장에 근거가 주장이고 또 그 근거가 주장이잖아. 기초가 되는 데이터도 명확하지 않고.”

“뒤에 보시면 스카우트 팀의 분석자료도 첨부했습니다.”

“이건 스카우트 팀의 분석자료가 아니라 스카우트 팀 ‘일부’의 예측이잖아. 이걸 메타 데이터라고 내밀면 안 되지.”

프리드먼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이건 명백한 억지다. 애초에 한 경기 한 경기에서 기록한 스탯들을 근거자료로 첨부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이건 그저 전임 단장 시절 자신이 주도했던 트레이드가 완벽하게 그릇된 트레이드이고, 또 그것으로 인해 매년 쓰지도 않는 선수를 위해 수백만 달러의 금액을 지출할 수 없다는 꼬장에 불과했다.

지금 데이비드 콘은 그저 로스터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방해물이다. 팀 전력에 플러스는커녕 마이너스만 되는 존재. 그가 자리를 비우고 매년 나가야 하는 1,100만 달러의 자금 중 220만 달러씩을 회수하는 것만으로도 메츠에게는 아주 큰 이득이다.

프리드먼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

따악!!

[알버트 푸홀스!! 쳤습니다!! 좌중간으로 향하는 타구!! 안타!! 안타입니다.]

케빈 어피어가 가볍게 혀를 찼다.

‘저 자식. 저걸 쳐내네.’

아직 몸이 덜 풀렸고 그렇기에 구속 역시 완전하지 않았다. 아마 시즌 중에는 3, 4마일 정도 더 구속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몸이 완전히 올라오지 않은 것은 상대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마이너 선수인 만큼 미리 몸을 만들어 왔을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방금 공을 쳐낸 것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제대로 맞은 것 같지도 않은데 저기까지 날아갈 줄이야. 허, 이것 참.’

쇄골, 그리고 어깨로 이어진 두 번의 부상. 그리고 지난 3년간의 완벽한 몰락. 케빈 어피어는 자신의 커리어를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게 던지려 해도 이미 떨어진 구속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 하지 않았고 마침내 해답을 찾았다.

방금 그가 던진 공은 스플리터. 올 시즌 반등을 위해 그가 피땀 흘려 연마한 구종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그럭저럭 던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포심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궤적으로 예리하게 들어가는 스플리터는 아니었다.

오늘 경기 그가 기록한 성적은 3이닝 6삼진 1피안타 무실점. 충분히 합격점을 받을만한 성적이었다. 그 증거는 저기 덕아웃에 앉아있는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흡족한 표정과 약간 상기된 데이브 웰스 투수코치의 얼굴이었다.

덕아웃 구석 진호의 얼굴도 보인다. 이제 고작 4년 차.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선수였다. 2년 연속 MVP급 성적을 기록 중인 메츠의 중심타자. 뭐 아직 클럽하우스에서 발언력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았지만 메츠가 녀석과 맺은 계약을 생각해보면 추후 메츠라는 팀은 저 녀석을 중심으로 설계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짜식 운 좋은 줄 알아라.’

그리고 그것은 케빈 어피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지 그와 저 강진호의 차이는 처음 시작한 팀이 지속적으로 우승을 노릴 수 있는 빅마켓인가, 아니면 프렌차이즈 하나 붙잡기도 버거운 스몰마켓인가 하는 차이뿐이었다. 만약 로얄스가 그토록 빡빡한 팀이 아니었다면 자신 역시 아직 그곳에 몸담고 있었을 것이다.

덕아웃으로 돌아온 케빈에게 데이브가 다가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네.”

딱 적절한 타이밍이다. 아직 몸도 다 풀리지 않은 시점, 감독에게 어필 역시 충분했다. 뭐 아직 보여준 것이 없는 애송이라면 분위기가 좋을 때 공 몇 개라도 더 던지고 싶어 하겠지만 이미 오랜 메이저 생활을 통해 쌓아 올린 것들이 있는 케빈 어피어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가 보여줘야 할 것은 자신이 메이저에 통하는 투수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건강하다는 증거, 그것 뿐이었다.

어깨에 아이싱을 감고 퇴근을 준비했다. 진호는 여전히 덕아웃에 앉아 있었다.

“이봐, 오늘 경기 끝까지 볼 생각이야?”

“네, 뭐 딱히 오늘은 퇴근해서 할 일도 없거든요. 아 맞다. 혹시 생각 있으면 제시네로 가보세요. 미리 퇴근한 친구들 거기서 가볍게 맥주 한잔 하고 있을 겁니다.”

“공을 던진 날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 주의라서. 그보다 그렇게 앉아서 구경을 했으면 감상도 좀 들려줘 보라고. 오늘 어땠어?”

“3이닝 퍼펙트인데 뭐 딱히 평가할 게 있나요.”

시합을 지켜본 줄 알았건만 멍하니 딴생각이라도 했던 것일까? 마지막 1개의 안타를 허용했건만 퍼펙트라니. 케빈 어피어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제대로 보긴 한 거야? 마지막에 안타를 허용했잖아.”

“아, 그거요? 어차피 시즌 중에는 제가 그 자리에 있을 거잖아요. 그러니까 오늘처럼 하시면 3이닝 퍼펙틉니다.”

진호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답했다. 광오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미 세 개의 골드 글러브를 수집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중견수가 하는 이야기였다. 가볍게 올라왔던 짜증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큭, 너 이 자식. 꽤 마음에 드는데? 젠장, 오늘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인 게 아쉽군. 그래, 좋았어. 네 말처럼 저런 공을 아웃으로만 만들어 준다면 내가 그럴 때마다 한잔 제대로 대접하도록 하지.”

“저런, 올해 연봉을 전부 제 술값으로 탕진하실 생각인가 보네요.”

“뭐라고?”

진호의 뻔뻔한 대답에 케빈 어피어가 크게 웃었다. 그리고 예감했다. 약팀의 에이스로 11년. 평생 포스트시즌과 인연이 없는 삶을 살아온 그였다. 어쩌면 올해야말로 그의 인생에 최초의 가을 야구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

-많은 사람들이 1,300만 달러라는 금액에 의구심을 갖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2할8푼의 타율은 기록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잽머니의 침략. 시애틀 프랜차이즈 사상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다.-

-메이저에서 아무것도 증명한 것이 없는 타자에게 3년 2,700만? 시애틀 펫 길릭 단장은 미친 것이 분명하다.-

메츠와 카디널스가 한창 시범경기를 진행 중인 미국 동부 플로리다의 정 반대편 애리조나의 피오리아 스포츠 컴플렉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시애틀 매너리스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이 구장에 어떤 남자가 우뚝 섰다.

왜소한 체격. 근처 육중한 덩치를 자랑하는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흡사 어린아이와도 같아 보이는 그 남자는 오른손으로 방망이를 세워들고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어깨 옷깃을 잡아당겼다.

입안이 조금 말라왔다. 프로로 데뷔하고 아홉 시즌. 이미 더 오를 곳이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올랐고 얻어낼 수 있는 모든 영광을 얻었다. 도전을 택하지 않더라도 그는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진짜 야구가 있다.’

그렇기에 그는 그 모든 영광을 내려놓았다. 호의적이지 않은 여론. 비관하는 사람들. 심지어 자신이 몸을 담은 팀의 팬들마저도 자신을 데리고 온 것은 잘못된 선택이라 소리 높였다. 모든 것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직 고난만이 가득 하기에 그것은 더욱 가치 있는 법이다.

만 27세 그리고 5개월.

신인이라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 한 타자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유격수를 뚫지 못하는 약한 타구. 하지만 그의 발은 이미 1루를 밟고 서 있었다. 그것은 가장 스즈키 이치로다운 안타였다.

***

“팀장님, 이거 어떻습니까.”

늦은 저녁. 프리드먼이 서른장 가량의 보고서를 들고 나타났다.

“또?”

알레한드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벌써 아홉 번째. 저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는 도무지 포기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게다가 더 짜증나는 것은 그의 보고서가 점점 더 완벽해진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용납할 수 없었다. 데이비드 콘의 실패는 곧 자신의 실패다. 저 구단주 대리는 대범한 척하지만, 사실은 쪼잔하기 그지없는 놈이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부디 올해 콘이 반등하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팀장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계획대로 된다면 저희는 프런트라이너 급 미래가 기대되는 유망주를 얻음과 동시에 연 800만 달러가량의 손실을 그대로 보전할 수 있는 마켓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손실은 그보다 낮고 이득은 그보다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손실 보전?”

그리고 그런 알레한드로에게 프리드먼이 쉽게 넘길 수 없는 제안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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