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09화 (109/210)

# 109화.

빈 자리(1)

개막전 시리즈 2승 1패.

원정경기, 그것도 상대가 이전 시즌 동부지구 챔피언 브레이브스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나쁘지 않은, 아니 무척 좋은 결과였다. 애틀랜타가 자랑하는 선발 투수 삼인방. 매덕스, 글레빈, 밀우드를 상대로 얻어낸 성과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 라커룸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괜찮을까?”

“글쎄, 별 일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우리 올 시즌 괜찮으려나?”

“그러게, 시작부터 영 좋지 않은데 이거.”

군데군데 동료들의 수군거림이 들린다. 어수선함으로 가득한 분위기. 오늘 경기에서 승리한 팀이라고 믿기 힘든 분위기다. 평소라면 피아자가 나서서 호탕하게 사람들을 다독였을 타이밍. 하지만 피아자는 없었다.

프레스톤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진호, 마이크씨 괜찮겠지?”

“타고난 강골이잖아.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날거야.”

“하긴, 뭐 어디 부딪힌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자 달리다가 그런 건데 심각한 부상이면 안 되지.”

“그래, 그냥 잠깐 경련이 일어난 걸 거야.”

애틀랜타와의 3차전 경기. 8회 초, 큼지막한 안타를 치고 2루까지 달려나간 피아자가 허벅지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햄스트링 같던데, 괜찮겠지?’

애초에 쪼그려 앉는 자세를 원활하게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높은 유연성이 필요했고 기본적으로 경기 시간의 절반 정도를 쪼그려 앉아야 하는 포수의 특성상 피아자의 유연성은 상당했다. 일반적으로 햄스트링 부상의 가장 큰 원인으로 피로와 유연성 부족이 지목되는 만큼 피아자의 부상은 그리 대단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마이크씨 병원으로 후송됐다는데?”

“후송?”

“부상이 심한 건가?”

“아니, 그냥 확인차 간 거 아니야?”

하지만 어디선가 들려온 피아자의 병원 이송 소식에 다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젠장, 병원이라니. 이거 단순히 근육경련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인다. 좋은 분위기로 시작된 01시즌. 불과 3경기 만에 팀의 앞날에 먹구름이 나타났다.

-뉴욕 메츠,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개막 원정 3연전 위닝 시리즈 기록!!-

-마이크 피아자 햄스트링 부상으로 15일 DL 등재.-

-뉴욕 메츠 몬트리올 엑스포스와의 원정 경기 스윕패!! 마이크 피아자의 빈자리?-

-토드 프렛, 반스 윌슨, 제이슨 필립스. 피아자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는 메츠의 고민-

뉴욕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어수선하던 분위기 위에 싸늘함이 더해졌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다. 피아자가 없는 우리 팀은 단순히 주전 포수가 자리를 비운 정도가 아니었다.

클럽 하우스 리더의 부재.

시즌 초반, 새로 들어온 얼굴들과 기존의 선수들이 섞이지 못한 시점에서 클럽 하우스의 중심이 사라졌다. 물론 이번 스윕패가 100% 피아자의 부재 때문만은 아니다. 그저 가장 강력한 타자 중 하나가 없었고, 백업 포수의 기량이 부실했으며 연패를 끊어줄 에이스 제이슨 슈미트의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는 여러 가지 불운이 겹친 결과였다.

진짜 문제는 바로 지금부터였다.

몇몇 선수들은 기내에 비치된 맥주를 마시며 축 쳐진 분위기를 띄우려 애썼고, 또 몇몇 선수들은 스윕패를 한 마당에 술을 마시는 그들을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헨더슨씨 이거 괜찮을까요?”

“응? 뭐가?”

“지금 팀 분위기요.”

뒷자리 구석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리키 헨더슨이 답했다.

“아, 팀 분위기? 뭐, 내 경험상 팀 분위기가 이렇게 되면 보통은 망하더라고. 피아자가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힘들겠어.”

“네? 그거 큰일이잖아요. 지금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헨더슨이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답했다.

“내가 옛날에 한번 해봤는데 소용 없더라고. 피아자 그 녀석이 아무렇지 않은 척 움직여서 그렇지 그 팀 분위기 단속하는 거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장담하는데 내가 여기서 피아자처럼 하려고 하면 오히려 팀 분위기만 더 망가질걸?”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은 그냥 미련을 두지 않는 쪽이 좋아. 차라리 내 컨디션을 관리해서 제대로 뛰기라도 하는 편이 팀에게는 더 도움일 거야.”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겠다는 헨더슨의 이야기. 옳은 말이었다. 현재 팀의 최고참이자 전설적인 커리어를 가진 헨더슨은 스팩만 본다면 충분히 피아자를 대신할 만했다. 하지만 최근 사람들과 조금 괜찮게 지낸다고 해도 그는 본질적으로 아웃사이더. 타인과의 교류를 즐기는 이가 아니다. 그에게 다른 이들을 다독이는 역할은 어울리지 않았다.

“정 뭐하면 네가 나서 보던지.”

헨더슨의 말에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가 될거라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너무 일렀다. 존중이란 강요하는 것이 아닌 저절로 우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선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실력이 만들어 낸 커리어라는 것이 필요했다. MVP 위너라는 커리어는 물론 대단했다. 하지만 이제 고작 4년 차. 만 23세의 젊은 나이는 평균 서른 살, 빅리그 7, 8년 차 선수들을 이끌기에 너무 부족했다.

***

9일. 홈에서 열리는 첫 경기. 셰이 스타디움이 팬들로 가득 찼다. 홈에서 열리는 시즌 첫 경기라는 이유도 이유였지만 실제 우리의 시즌권 판매는 98년 이후 매년 증가추세라고 들었다.

‘확실히 시즌권 판매가 증가했다는 말을 들을 때는 실감이 안됐는데 이렇게 구장이 우리 팬들로 가득찬 걸 보면 느낌이 묘하단 말이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우리의 야구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는 것이 가슴 한구석을 묵직하게 했다. 부담감은 아니었다. 그보다 이것은 그들의 기대에 보답하고 싶다는 책임감에 가까웠다.

상대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99년 이후 나에게 종종 말을 걸어오는 치퍼 존스가 나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했다. 개막전 우리에게 위닝시리즈를 헌납했던 브레이브스였지만 이후 3연전을 스윕패당했던 우리와 달리 그들은 플로리다와의 3연전을 싹 쓸어 담았다.

3연패를 당한 팀과 3연승을 거둔 팀.

아무래도 분위기와 기세는 브레이브스 쪽이 더 강했다.

하지만 오늘 가장 먼저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그런 기세 따위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시크하게 공을 주고받았다.

케빈 어피어.

로얄스에서 11년을 뛰었던 약팀의 에이스. 그에게 연패 이후의 등판은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었다. 게다가 지난 3년간의 부진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시범경기 연신 맹활약을 보여줬던 그다. 팀의 연패를 끊어내기에 그만큼 어울리는 투수는 없었다. 그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종종 피아자와 호흡을 맞추는 것에 불만을 표했던 만큼 오늘 선발로 출전한 백업포수 반스 윌슨의 미트가 상당히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미트라도 제대로 해야지.’

사실 팀의 2옵션 포수는 반스 윌슨이 아닌 토드 프렛이었다. 하지만 그는 피아자 이상으로 수비가 부족한 포수였다. 사실상 지명타자가 더 어울리는 선수인 것이다. 반면 오늘 마스크를 쓴 반스 윌슨은 수비 하나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대신 작년 네 경기에 출전해서 .000/.000/.000이라는 참담한 타격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전성기 시절에 비해 구속은 하락했지만 올해 새로 장착한 스플리터가 연달아 땅볼을 유도했다. 두 타자 연속 땅볼 아웃. 그리고 타석에 브레이브스 최강의 타자. 치퍼 존스가 올라왔다. 능글맞은 웃음. 하지만 눈빛만큼은 예리하다.

볼, 볼, 파울, 파울 그리고 볼.

앞선 타자들과 달리 치퍼 존스는 케빈 어피어의 스플리터 조차도 확실하게 걷어내고 있었다. 점점 맞아들어가는 타이밍. 이런 상황이라면 초조한 것은 투수다. 하지만 마운드에서 잠시 내려와 로진백을 매만지는 케빈 어피어의 표정에 초조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느긋한 와인드업. 그리고 여섯 번째 공이 날아갔다.

딱!!

높게 떠오른 타구가 외야를 향했다.

‘큭.’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잡을 수 있다. 좌중간으로 날아드는 공을 향해 전력으로 몸을 던졌다.

[아웃!! 아웃입니다!! Kang의 호수비!! 치퍼 존스의 안타를 훔쳐내네요.]

[이제 메츠의 외야에서 Kang의 저런 수비는 거의 상수라고 봐야겠죠. 정말 수비 범위가 넓은 선수예요.]

공수 교대. 마운드에 케빈 밀우드가 올라왔다. 99년 보여줬던 도미넌트함은 많이 퇴색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훌륭한 투수였다.

포심과 스플리터 커브 체인지업까지 다양한 레파토리로 타자들에게 땅볼을 유도하는 어피어와 달리 포심과 슬라이더의 비중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밀우드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피어가 잃어버린 구속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97마일 몸쪽 포심 패스트볼. 헨더슨의 배트가 허공을 휘저었다.

[선두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는 케빈 밀우드 선수. 오늘 공이 아주 좋습니다.]

[작년 4.66의 ERA로 커리어 가장 나쁜 성적을 기록했던 케빈 밀우드 선수. 하지만 오늘 공을 보니 재작년의 그 강력한 모습을 올해도 또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군요. 구위가 아주 훌륭합니다.]

[자 타석에는 2번 타자 Kang이 올라옵니다. 현재 내셔널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타자 중 한명이죠. 케빈 밀우드 선수를 상대로 27타석 23타수 8안타 2홈런 4사사구. 0.348/0.444/0/739를 기록 중입니다. 삼진도 두 개밖에 되지 않아요. 이정도면 거의 천적 수준인데요?]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을 준다. 밀우드가 무시할 수 없는 투수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녀석의 공은 언제나 ‘칠 만하다.’라는 느낌을 줬다.

그리고 오늘도 그 느낌은 유효했다.

딱!!

[초구 쳤습니다!! 강한 타구!!]

몸쪽으로 파고드는 속구를 그대로 후려갈겼다. 2루타? 수비의 대응에 따라 어쩌면 3루까지도 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이다. 1루를 향하는 발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젠장.’

셰이 스타디움의 넓은 외야 한복판. 네델란드 령 퀴라소 출신의 가무잡잡한 중견수가 왼손을 번쩍 들고 서있었다.

[아웃!! 아웃입니다. 앤드루 존스. 놀라운 수비!! 워닝트랙까지 날아오는 Kang의 타구를 낚아챕니다.]

[메츠와 브레이브스의 경기를 볼 때마다 느끼지만 저 두 선수 수비는 정말 사람같지가 않아요. 타구판단, 반응속도, 순발력, 그리고 운동능력까지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외야수 수비로 보여줄 수 있는 극한의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다고 밖에는 표현할 말이 없네요.]

언제 봐도 정말 비상식적인 움직임이다. 분명 정위치에서 수비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는데 대체 언제 저기까지 이동했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종종 나와 앤드루 존스의 수비를 비교하곤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수비쪽은 그래도 인간미가 있는데 반해 저 녀석 수비는 그런건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잡을만한 공은 다 잡고, 안 잡힐 만한 공도 종종 잡아 내고, 심지어 이렇게 잡는 게 불가능한 공까지 가끔 잡아내 버린다.

“젠장, 저 자식 인간적으로 너무 한 거 아니야? 저런 공까지 잡아버리면 공을 쳐낼 곳이 없잖아.”

덕아웃으로 돌아와 가볍게 투덜거리는데 헨더슨과 프레스톤이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왜?”

“그게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맞아. 그런 이야기는 나처럼 인간적으로 수비하는 사람이 해야지. 똑같은 놈이 똑같은 놈을 욕하는 건 아니지.”

“에이, 전 그래도 가끔 실수도 하고 잡을만한 공도 종종 놓치잖아요.”

“실수? 잡을만한 공? 네가 말하는 그 잡을 만한 공이 어지간한 외야수가 잡고 나면 호수비 소리 듣는 그런 타구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뻐엉!!

“스트라잌!! 아웃!!”

헨더슨, 그리고 프레스톤과 잠시 노닥거리는 사이 어느새 우리의 공격이 끝났다. 2개의 삼진. 오늘 밀우드는 우리에게 쉽게 점수를 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그렇다면 점수가 날 때 까지 두들겨 보는 수밖에.’

경기가 흘러갔다.

***

“젠장, 너 제정신이냐?”

“갑자기 왜 시비질이야.”

덕아웃 뒤편 나지막하게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소란스러운 그라운드. 덕아웃의 제일 앞줄에 앉아 있는 감독과 코치들의 귀까지는 들어가지 않을 작은 목소리였다.

‘망할.’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너무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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